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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클볼-264화 (265/287)

< 웃는 남자(4) >

작년 보스턴의 프런트는 그들이 오랜 시간 유망주를 모았고 그들 중 상당수가 솔리드 플레이어 이상까지 기량이 올라왔다고 판단했다.

올해부터다.

올해부터야 말로 우리가 달릴 시간이다.

그리고 그해 보스턴은 폭발했다.

물론 모두가 알다시피 좋은 의미의 폭발이 아니었다. 그들은 성적을 폭발시키는 대신 물리적인 의미에서 팀을 폭발시켰으니까. 덕분에 보스턴은 큰돈을 들여서 영입했던 선수 상당수를 헐값으로 내보내야 했다. 성민과 같은 에이전시 소속인 오토 람머마이어 역시 그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폭발의 중심에 있던 남자 중 하나가 바로 이 맥스 슈피겐이었다. 자신의 재능에 대한 믿음이 과했던 나머지 오만하고 무례했다.

물론 당시 폭발의 잘못을 그 어린 유망주들에게만 돌리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그들의 잘못이 오만과 무례였다면 큰돈을 받고 왔던 베테랑들의 잘못은 전통이란 이름 아래 어린 선수들에게 책임과 의무만을 지우려고 했던 무능이었으니까.

그리고 1년.

자신의 재능을 믿고 오만했던 젊은 선발 유망주는 변했다. 작년의 그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나의 재능은 진짜다. 지금 저 잰 척하는 녀석들도 결국 나이만 더 먹었을 뿐이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나도 충분히 그 이상의 투수가 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일이 있었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중에는 자신이 그 나이가 돼도 과연 저럴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드는 투수들과 또래임에도 그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은 공을 던지는 녀석도 존재했다.

맥스 슈피겐은 마침내 그 사실을 깨닫게 됐다.

아, 나는 하늘이 내린 천재가 아니었구나. 기껏해야 1년에 두셋은 나오는 그런 평범한 수재에 불과했구나.

“그런 이야기입니다. 젠장.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브라이언 보일 자식은 대단해요. 옆에서 보고 있으면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성민이나 디아고 같은 투수가 될 수 있는 건 그런 녀석이겠죠.”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젠장, 여기서는 그렇게 긍정하는 게 아니라 ‘아니야. 지금 당장의 기록만으로는 알 수 없지. 선수 생활은 길고 너흰 아직 어려.’ 뭐 이런 격려를 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 내일 월드 시리즈 등판하는 투수인데요?”

“위로에는 영 소질이 없어서 말이야. 게다가 야수도 아니고. 투수가 선수 생활이 길다니. 그럴 리가. 어차피 통계적으로 봤을 때 선발 투수 대부분은 2천 이닝을 고비로 망가져. 1년에 180이닝씩 던진다고 치면 기껏해야 11년 남짓이지. 게다가 불펜은 그보다 더 짧은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걸 넘어서는 건 정말 소수지.”

맥스 슈피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람이 진짜 상처받는 순간은 자신도 이미 알고 있는, 하지만 애써 외면하는 팩트로 두들겨 맞는 순간이다.

“너 매튜를 어떻게 생각하냐?”

“여기서 갑자기 쿠퍼 그 얼간이 이름은 왜 나오는 겁니까?”

“매튜 쿠퍼랑 랄로 가야르도 중에서 누가 더 크게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냐?”

“그야 당연히 가야르도죠. 둘 다 얼간이지만 그래도 가야르도 녀석 재능은 진짜 아닙니까.”

“그러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둘 중 실패할 확률이 더 낮은 녀석은 누구라고 생각하냐?”

“뭐가 달라진 겁니까? 같은 질문 아닙니까? 당연히 더 크게 성공할 확률이 높은 녀석이 더 실패할 확률도 낮겠죠. 타고난 재능이 다른데.”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같지 않아. 큰 성공은 큰 재능을 가진 녀석이 삐끗하지 않았을 때 이룰 수 있는 일이지만, 실패하지 않는 인생은 좌절에도 포기하지 않는 터프한 녀석이 이룰 수 있는 거거든.”

“쿠퍼가 그런 녀석이라 이 말입니까?”

성민이 대답하는 대신 자신의 옷 소매를 걷었다.

“여기 이거 보이냐?”

흉하게 남아있는 팔꿈치의 수술자국.

맥스 슈피겐이 대체 이건 왜 보여주냐는 눈빛을 보냈다.

“대부분 선발은 기껏해야 2천 이닝이야. 아니, 2천 이닝을 던질 수 있는 선발이면 이미 올스타 한 번 쯤은 올라가고 리그에서 이름 꽤 날리는 선발이지. 그리고 내가 생각할 때 그걸 넘어가는 데 필요한 건 단순히 재능이 아니야. 오히려 재능은 2천 이닝까지지.”

“열혈, 근성, 정신력 운운하는 건 너무 케케묵은 이야기 아닙니까? 요즘에는 헐리웃 3류 영화에서도 그건 잘 안 쓴다고요.”

“지난 경기 브라이언에게 가장 크게 부족했던 부분이 바로 그 케케묵은 부분이었지. 아마 그 자리에 양키스의 욘 마르틴이 있었다면 그거 두들겨 맞고도 꾸역꾸역 6이닝쯤 버텨냈을걸? 그랬다면 우리는 시리즈 스코어 3:0으로 지금보다 더 여유롭게 다음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겠지.”

맥스 슈피겐이 피식 웃었다.

“위로에는 영 소질이 없으시다더니 엄청 능수능란한데요?”

“다른 것에 비하면 소질이 없는 게 이 정도인 거야.”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야구 하는 걸 보면 사실인 것 같긴 하네요.”

-그게 아닐걸.

“마지막으로 한 가지. 그래서 그 터프한 근성은 대체 어떻게 기르는 겁니까?”

“야구를 하다 보면 가끔 정신이 혼미해지고, 다 때려치우고 싶고,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것 같은 정말 눈물이 핑 도는 순간들이 올 거다.”

“상상도 하기 싫은 순간들이네요.”

“그럴 때마다 배에 힘을 주고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원래 맷집이라는 놈은 두들겨 맞으면서도 정신을 잃지 않는 놈만 기를 수 있는 법이거든.”

“젠장, 전혀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말씀들이었습니다만. 일단은 잘 알겠습니다.”

맥스 슈피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움이 전혀 안 될 것 같다는 말과 달리 성민 방의 초인종을 누르던 당시 초조함으로 가득하던 그의 표정이 조금은 풀려있었다.

“소질 없는 위로 감사합니다. 이 위로는 월드 시리즈의 마지막 경기를 홈에서 선발로 마운드에 설 수 있게 해드리는 거로 보답해보죠.”

“뭐, 나쁘지 않네. 아 그리고.”

“또 뭡니까?”

“열혈과 근성 그리고 사나이의 땀내는 케케묵은 이야기가 아니야. 그 부분이야 말로 요즘 헐리웃 영화가 재미없는 이유지.”

필 니크로가 격렬하게 동의했다.

***

애초에 펜웨이 파크는 시즌 중에도 30개 구단에서 가장 비싼 푯값을 자랑하는 곳이다. 너무나도 당연히 월드 시리즈 역시 이곳의 푯값은 다저 스타디움보다 훨씬 높았다. 게다가 꾸준히 월드 시리즈를 나가던 다저스와 달리 보스턴이 월드 시리즈에 나간 것은 26년 전이 마지막이다. 사람들의 열망 역시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미리 사놓기를 잘했네.”

무엇보다 우승 가능성.

심지어 홈에서 우승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푯값을 천정부지로 솟게 했다. 동엽이 3, 4, 5차전 합쳐서 860달러를 주고 샀던 티켓은 5차전 티켓만 따로 850달러에 거래될 만큼 오른 상태였다.

그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동엽이 앉은 자리는 외야의 3층. 전광판 바로 아래 자리였다. 마찬가지로 오페라글라스는 필수다.

“오늘 경기에서 만약 패배하면 무조건 LA로 돌아가는 건가? 그러면 옆자리에 그 아저씨가 또 있으려나?”

거기까지 생각한 동엽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선배 우승이 걸린 일인데. 당연히 보스턴을 응원해야지.”

그리고 그런 동엽의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그의 스마트폰에 메시지가 하나 날아왔다. 성민이었다.

“응?”

-펜웨이 파크 푯값도 비싸고, 심지어 구하기도 힘들어서 좋은 자리는 못 구했을 텐데 내 등판 경기 표 한 장 보낸다. 이왕 미국까지 왔으니 한 경기 정도는 생생한 자리에서 보도록 해.-

맙소사.

며칠 전 검색했을 때 단위가 만 단위에서 놀던 바로 그 구역이었다. 어지간한 선물이라면 못 이긴 척 받겠지만, 가격을 몰랐다면 모를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다.

-선배, 이런 거 안 주셔도 돼요. 저 이미 표 사놨어요.-

-어차피 엄마 용으로 따로 빼놨었는데 윌슨 감독님이 엄마표까지 사는 바람에 한 장 남는 표야. 부담 갖지 말고 그냥 와서 열심히 응원이나 해. 정 부담되면 나중에 한국에 가면 밥이나 한 번 사던지.-

동엽이 다시 한번 자신의 허튼 생각을 반성했다.

아무리 여자가 좋아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자신을 생각해주는 선배의 우승을 진지하게 응원하지 않았다니.

그리고 그가 생각지도 못했던 행운을 맞이한 그때.

보스턴과 LA 다저스의 시리즈 4차전이 시작됐다.

***

‘역시 난 큰 경기 체질이야.’

마운드 위에 선 맥스 슈피겐의 몸이 가벼웠다. 컨디션이 매우 좋다. 그것도 이번 시즌 전체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큼. 조금 전 연습 때도 공끝이 쭉쭉 뻗어 들어갔다. 어쩌면 오늘 정말 큰 일을 낼지도?

브라이언 보일이 어린 시절부터 월드 시리즈의 마운드를 꿈꿨던 것처럼. 맥스 슈피겐 역시 마찬가지로 월드 시리즈의 마운드를 꿈꿨었다. 물론 그 역시 지금과는 상황이 조금 다르긴 했다. 꿈속의 맥스 슈피겐은 월드 시리즈 1차전에 선발로 올라가 퍼펙트를 기록하는 투수였으니까.

하지만 1차전과 4차전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아직 퍼펙트의 기회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맥스 슈피겐이 초구를 준비했다.

에두아르도 크루즈는 어제의 실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 컨디션이 괜찮은 투수의 기부터 일단 살리고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조금 전 연습에서 던졌던 공 가운데 가장 좋은 공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그에게 날아온 사인은 커브. 기분 좋은 선택이었다.

커브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가 주특기로 사용했던 공이었다. 제대로 연마하기 어렵지만, 제대로 연마만 할 수 있다면 정말 무서운 구질이다. 종적으로 떨어지는 공을 횡으로 움직이는 방망이로 맞추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 커브의 낙폭을 어느 정도 조절할 줄 알았고, 존의 안팎을 사용할 만큼 수준 높은 커브를 연마했다.

그리고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의도처럼 맥스 슈피겐이 던진 커브는 거의 완벽했다.

다만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부분은 지금 타석에 선 타자가 MVP 5위 이내에 손꼽히는 타자라는 점이었으며, 지난 몇 경기를 통해 그의 컨디션이 어마어마하게 올라와 있었다는 점이었다.

마르타 블랑코는 운만 따른다면 진지하게 MVP를 노릴 만한 기량의 타자였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가장 좋은 공이라도 언제든지 담장 밖으로 때려낼 수 있다는 뜻이다.

-딱!!

순간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머릿속에 어제의 악몽이 떠올랐다.

월드 시리즈 1회 초. 홈구장을 가득 메운 팬들 앞에서 자신이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공을 두들겨 맞은 애송이 투수.

그의 시선이 마운드의 투수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맥스 슈피겐이 실로 기이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분노와 좌절. 스스로에 대한 실망으로 가득 찬 눈빛.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입꼬리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미소를 띠고 있었다.

[월드 시리즈 4차전 맥스 슈피겐 5.1이닝 4실점!!]

[보스턴 레드삭스 11:9 신승!! 이제 남은 승리는 오직 한 번뿐!!]

[운명의 월드 시리즈 5차전!! 디아고 헤밍턴 vs 김성민. 완벽한 투수들의 재대결!!]

< 웃는 남자(4)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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