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63화 (264/287)

< 웃는 남자(3) >

“젠장, 거봐. 내가 뭐라고 그랬어. 코리 콜린스가 아니라 조나단 웰스를 넣었어야 했다니까. 하여간 야구라는 게 어? 공만 빠르다고 다 되는 게 아닌데 이 머저리들은 그걸 몰라요.”

경기가 끝난 직후.

동엽은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수다쟁이 아저씨의 식사 초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뭔가 외국에 나와서 이런 식의 인연을 만드는 것에 살짝 로망이 있기도 했고, 어쨌거나 이틀이나 이렇게 얼굴을 보는 것도 보통 인연은 아니었다. 게다가 어차피 보스턴으로 가는 비행기는 내일 저녁 비행기였다. 어차피 남는 시간 동안에는 미국 관광을 할 예정이었으니 현지인과 저녁을 먹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었다.

하지만 조금 오산이었던 부분은 바로 근처라고 이야기 했던 그 아저씨의 집에 도시 내부가 아닌 차를 몰고 한참을 나가야 하는 교외라는 점이었다. 200킬로 넘게 떨어진 곳에 있는 집을 바로 근처라고 말하는 스케일. 그리고 너무 아무 생각 없이 따라온 건 아닌가 하는 약간의 불안감이 동엽을 엄습했다.

그렇게 털털거리는 포드 픽업트럭을 타고 도착한 곳은 LA에서 150마일 정도 떨어진 농장이었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최소한 공포영화에 나오는 그런 음습한 느낌의 농장은 아니었으니까. 작년에는 불펜 바로 뒷좌석에서 봤다는 말이 농담은 아닌 듯 대도시 인근임에도 규모 역시 작지 않았다.

집 앞 차고에 차를 집어넣으면서도 수다쟁이 아저씨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그나저나 내일은 보스턴으로 간다고 그랬지? 월드 시리즈를 보기 위해서 그 먼 곳에서 미국까지 오다니 정말 대단한 열정이야. 역시 젊은 패기가 참 좋다니까. 우리 애도 이런 패기를 좀 닮아야 하는데 말이지.”

“아이가 있으세요?”

“당연하지. 자네랑 비슷한 나이지. 애써 좋은 대학 보내놨더니 도시에서 취업은 안 하고 농장에 돌아와서는 새로운 농법이 어떻고 기계가 어떻고 아주 잔소리가 어휴. 게다가 거 무슨 종자회사 놈들한테 로열티를 다 줘가면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그러는데. 아니 그놈들한테 그런 거 일일이 다 줘가면서 농사를 지으면 대체 남는 게 뭐가 있다고 그러는지.”

그리고 그 투덜거림의 응답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다가 3년 전에 걸려서 위자료로 1년 수입 고스란히 다 가져다 바친 거는 기억 안 나세요? 게다가 하밋 아저씨가 그랬잖아요.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라고. 다음번에 또 걸리면 그때는 자기도 어떻게 해줄 수 없다고 말이에요.”

갈색 생머리. 구릿빛 피부. 푸른 눈. 길고 쭉 뻗은 팔다리와 시원한 이목구비. 점프 수트를 입은 미녀가 차고 뒷문을 열고 등장했다. 어디 헐리웃 영화에서나 볼 법한 미모였다.

“그거야 변호사 놈들이 항상 하는 이야기고. 5년만 잘 버티면 그깟 1년 위자료 정도는 충분히 메울 수 있다고. 너희 할아버지도 항상 그런 식으로 농사를 지어서 이렇게 번듯한 농장을 마련한 거고, 나도 그렇게 농사를 지어서 너에게 그 비싼 대학 등록금을 대줄 수 있었던 거다.”

“근 칠십 년 전통이면 시대의 흐름에 맞게 이제 바뀔 때도 된 거죠. 그건 그렇고 그쪽은 누구예요? 보아하니 여기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야구장에서 만난 친구야. 아주 훌륭한 청년이지. 월드 시리즈를 보기 위해서 무려 한국에서 건너왔다고. 젊음은 이런 열정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그녀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하여간, 이 아버지 어디서 놈팽이 주워오는 솜씨 하나는 일품이다.

“에휴, 알았으니 어서 가서 손 씻고 오세요. 저녁 준비해뒀으니까요.”

좋은 선택이었다.

역시 외국에 나오면 외국인과 적극적으로 교류를 해야 한다. 동엽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는 미소가 지어졌다.

***

보스턴 펜웨이파크

[보스턴 레드삭스와 LA 다저스. LA 다저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시리즈 3차전. 이곳은 펜웨이 파크입니다.]

[지난 1, 2차전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는 대부분 전문가의 예상을 깨고 정말 훌륭한 경기력을 보여줬어요. 덕분에 시리즈 스코어 2:0이라는 매우 훌륭한 성적표를 들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지난 2004년 이후로 30년 만의 도전이죠? 보스턴으로서는 정말 놓치기 싫은 기회일 겁니다.]

[하지만 기회를 놓치기 싫은 건 디펜딩 챔피언인 다저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작년에 우승을 하기는 했지만, 그전까지 다저스는 모든 우승 팀이 월드 시리즈에서 다저스를 만난 것은 아니지만 월드 시리즈에서 다저스를 만난 모든 팀은 우승을 했다는 조롱을 받을 정도로 심각하게 우승 운이 없었단 말이죠. 그들 역시도 작년 간신히 깨트렸던 그 징크스를 다시 시작하고 싶진 않을 겁니다.]

브라이언 보일이 마운드에 섰다.

야구공을 손에 쥔 이후 항상 상상해오던 장면이었다. 월드 시리즈. 관중들로 가득 찬 경기장.

시리즈 스코어 2:0

보스턴의 팬들은 자신들의 팀이 만들어낸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열광했다. 이대로라면 LA로 돌아갈 것도 없이 보스턴에서 모든 일을 끝내는 것도 가능한 상황이다.

[오늘 보스턴 레드삭스의 선발 투수는 브라이언 보일 선수, 그리고 LA 다저스의 선발 투수는 조나단 웰스 선수입니다. 지난 2차전과는 정 반대라고 볼 수 있죠.]

[그렇습니다. 무게감이 조금 다르기는 합니다만, 떠오르는 신인. 그리고 검증된 베테랑. 지난 2차전 승부에서는 검증된 베테랑인 라만 그레고리 선수를 기용했던 보스턴이 웃었습니다. 과연 오늘 승부는 어떻게 될지. 자, 타석에 LA 다저스의 1번 타자 마르타 블랑코 선수가 들어옵니다.]

에이스가 압도적인 피칭을 펼친 경기에서 패배했다. 그리고 모두의 사랑을 받는 막내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패배했다.

시리즈 스코어 2:0.

이제 두 번만 더 패배하면 모든 것이 끝나는 상황. 그리고 무대는 상대의 홈구장. 온갖 악재들로 가득한 상황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충분히 흔들릴 수 있는 상황. 하지만 마르타 블랑코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잘못됐을 때를 생각하지 않는다. 머릿속에 남긴 이미지는 오직 최고의 결과뿐이었다.

그렇기에 오늘 나는 영웅이 되겠다.

마운드의 브라이언 보일이 전력을 다해 공을 던졌다.

바깥쪽 꽉 찬 코스 96.7마일의 빠른 공

-부웅!!

“스트라잌!!”

깔끔한 초구 헛스윙 스트라이크.

첫 단추가 깔끔하다. 어린 시절의 상상 그대로다.

그리고 두 번째.

타석의 마르타 블랑코의 시선이 공을 쫓았다.

0.2초.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 하지만 극한까지 벼려진 마르타 블랑코의 인지 속에서 0.2초는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긴 시간 속에서 그의 판단력이 소리쳤다.

그래, 바로 지금이다!!

-딱!!

빠르고 강한 타구. 밀어친 타구였지만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보스턴의 좌익수인 미셸 에쉬만이 달렸다. 다른 구장이었다면 이건 무조건 좌측 담장을 넘어간다. 하지만 이곳은 펜웨이 파크. 녹색의 괴물이 내려다보는 구장이다. 그린 몬스터의 상단에 마르타 블랑코의 타구가 직격했다.

인간 미셸 에쉬만은 여러모로 하자가 많은 남자였다. 타자로서도 그리 썩 좋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글러브를 끼고 좌측 외야를 누비는 그는 조금 달랐다.

오른쪽!!

그의 몸이 담장을 맞고 튕겨 나오는 타구의 움직임을 읽었다. 물론 저걸 잡는다고 이루타가 아웃으로 둔갑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그라운드를 돌고 있는 마르타 블랑코의 주루속도를 생각한다면 저 공을 놓쳤을 때 벌어질 최악의 결과는 어쩌면 담장을 넘어가는 것 이상일지도 모른다.

인사이드 더 파크 홈런.

투수와 야수들의 멘탈을 부수기에 그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으리라.

만 34세의 나이에 찾아온 첫 우승 찬스다. 이 순조로운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가고 싶다.

[담장 맞고 튀어 나온 공. 보스턴의 좌익수 미셸 에쉬만이 적절하게 커버합니다. 그리고 그사이 주자는 2루로!!]

그 간절한 마음을 담아 미셸 에쉬만의 오른팔이 불을 뿜었다.

-뻐엉!!

[마르타 블랑코. 2루에서 더 달리지 않습니다.]

[현명한 판단이었어요. 아마 무리해서 3루로 달렸다면은 이건 십중팔구 아웃이었을 겁니다.]

브라이언 보일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이건 그의 상상 속에 있던 장면과는 조금 달랐다. 조금 모자랐나? 코스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구속이 조금 부족하다. 마지막 채는 동작이 완벽하지 못했던 탓이다.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괜찮다는 손짓을 보냈다. 작년 브레이크 아웃 이후의 마르타 블랑코는 최고의 선수 중 하나다. 저기서 약간의 플루크만 더해지면 그대로 MVP 타자의 탄생이다. 아무리 좋은 공을 던진다고 해도 담장을 넘겨버릴 기량이 있다.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뻐엉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존을 완벽하게 벗어나는 빠른 공. 하지만 구위는 나쁘지 않았다. 그래, 이런 느낌으로 조금만 더 안쪽으로.

2번 타자인 세실리아 마토스가 웃었다.

애송이가 당황했구나. 큰 무대 경험이 없는 애송이들에게 종종 나타나는 증상이다. 구속은 좋은 무기다. 하지만 무기는 어디까지나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 그것을 잊어버린 애송이 투수가 무기에 집착하는 순간 그건 그저 먹잇감에 불과하다.

-딱!!

만약에 세실리아 마토스의 기량이 조금만 부족했더라면.

혹은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애송이의 멘탈이라는 것이 큰 경기에서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지를 조금만 빠르게 눈치챘더라면.

세실리아 마토스의 타구가 펜웨이 파크 가장 넓은 우측 외야를 굴렀다.

[큼지막한 타구!! 마르타 블랑코 달립니다!! 3루 지나 홈까지!! 여유로운 홈인!!]

그 사이 세실리아 마토스가 1루를 지나 2루까지 달렸다. 마르타 블랑코만큼은 아니지만 느리지 않다.

-뻐엉!!

“세이프!!”

노아웃 주자 2루.

점수는 1:0.

브라이언 보일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의 상상과는 완벽하게 다른 장면.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서둘러 마운드로 올라갔다.

괜찮다. 고작 1점이다. 침착하게 막으면 그만이다. 네 공을 믿어라. 슬라이더 위주로 풀어가자. 너의 슬라이더는 리그 제일이다.

이어지는 3번 타자 에드 맥밀란을 상대로 내야 땅볼 아웃. 그라운드의 이상하던 분위기가 약간은 진정됐다.

그리고 타석에 케빈 체임벌린이 들어왔다.

시리즈 스코어 2:0.

1점의 선취점을 올렸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는 점수다. 그렇기에 무언가 계기가 필요한 바로 이 순간.

브라이언 보일이 가장 자신있어하는 슬라이더를 상대로 LA 다저스를 지탱해왔던 늙은 타자의 방망이가 불을 뿜었다.

-딱!!

브라이언 보일의 멘탈과 경기장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박살내는 시원한 홈런포였다.

[LA 다저스 기사회생!! 3차전 13:7 승리!!]

[1회 초 무너진 젊은 에이스. 브라이언 보일 0.2이닝 5실점 패배!!]

[아직 끝나지 않은 기회!! 보스턴 감독 엔리케 로만 ‘우리는 홈에서 시리즈를 끝낼 것이다.’]

***

-띵동

“누구? 어? 맥스?”

월드 시리즈 4차전까지 16시간.

성민의 집 앞으로 내일의 선발 투수인 맥스 슈피겐이 방문했다.

“성민, 잠깐 이야기 괜찮을까?”

“얼마든지.”

성민이 웃었다.

< 웃는 남자(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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