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62화 (263/287)

< 웃는 남자(2) >

“드디어 내일이네요. 진짜 올해 초만 하더라도 이건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죠.”

“그러게나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서는 장면은 조금 상상했지만, 여기에 브라이언 네가 함께 있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지.”

라만 그레고리의 이야기에 브라이언 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여기서 이렇게 함께 하는 건 올해가 마지막이겠죠?”

“그거야 모를 일이지. 보스턴도 큰 팀이고 결국 그들이 나를 얼마나 원하는지에 따라 답이 정해질 테니. 게다가 미래는 예상해봤자 소용 없다는 거, 이미 잘 알고 있잖아?”

이 바닥에서 선수가 자신의 미래를 예상하는 것만큼 허무한 건 없다. 그들의 예상대로라면 브라이언 보일은 얼마 후 완공될 탬파베이 레이스의 새 구장을 바탕으로 탬파베이의 진짜 프랜차이즈가 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렇게 라만 그레고리와 함께 묶인 채 보스턴으로 건너왔다.

“그러니 그냥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

가끔 그런 일이 있다.

물건을 샀는데 얼마 안 되서 가격이 확 뛰는 경우. 물론 그렇다고 내가 그 물건을 내다 팔 건 아니다. 나도 필요해서 산 물건이니까. 그러니 사실 금전적으로 이득이 생겼다고 보기도 조금 뭐하다. 하지만 기분상으로는 뭔가 엄청 이득을 본 기분이다.

지금 동엽이 딱 그런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옆 자리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제와 같은 자리.

동엽의 옆자리 역시 어제의 그 아저씨가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뭔가를 떠들었다.

“어제 경기가 정말 대단하긴 대단했나 봐. 글쎄, 하루 사이에 100달러가 올랐더라니까. 내가 진짜 이걸 내다 팔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으흠. 아니 물론 그런 고민 따윈 전혀 하지 않았지. 당연한 일 아니겠어? 나만큼 다저스를 사랑하는 사람이 또 어딨겠어.”

[LA 다저스와 보스턴 레드삭스. 보스턴 레드삭스와 LA 다저스의 월드 시리즈 2차전. 이곳은 다저 스타디움입니다.]

[어제는 정말 대단한 경기였어요. 제가 야구 중계를 올해로 21년째 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경기는 정말 처음이었죠.]

[그건 모두가 마찬가지일 겁니다. 아니, 앞으로도 그럴 거에요. 두 선발이 모두 9회까지 퍼펙트를 유지했는데 정작 퍼펙트를 기록한 투수는 아무도 없는 경기가 또 나올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거든요.]

[자, 오늘 다저스의 2선발로 마운드에 서는 투수는 코리 콜린스. 현재 다저스에서는 포스트 디아고 헤밍턴으로 불리는 선수죠.]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시즌 29경기에 선발로 등판해서 163.1이닝 평균자책점 2.92으로 상당히 좋은 성적을 거뒀습니다. 디아고 헤밍턴 선수의 22세 시즌과 비교하면 오히려 더 나은 성적이죠.]

[22세의 디아고 헤밍턴보다 나은 성적이라니. 확실히 다저스가 기대할만한 선수로군요.]

[그에 맞서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선발 투수는 라만 그레고리로 검증된 탬파베이 산 에이스죠. 보스턴 레드삭스가 바그너 가이탄이라는 서비스 타임 3년 차의 올스타급 유격수를 내주고 반년을 렌탈해온 투수입니다. 물론 그 외에 잔돈을 조금 받기는 했습니다만, 어쨌거나 핵심은 저 라만 그레고리였죠.]

[3년 전 아메리칸리그 사이 영 상을 수상했던 투수입니다만 재작년 부상 이후로 2년, 아니 올해 초까지 조금 부진했었어요. 물론 부진했다고해도 여전히 어느 팀을 가건 상위 선발을 할 만한 성적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당시 사이 영 위너의 포스는 찾지 못했었단 말이죠. 하지만 트레이드 이후 성적이 정말 놀랍습니다. 평균자책점 2.37로 아메리칸리그 어느 팀을 가도 1선발을 경쟁해볼만한 성적입니다. 물론 보스턴을 제외하고 말이죠.]

[실제로 보스턴 이적 이후 라만 그레고리 선수의 SO/9를 보면 무려 12.9개로 양대 리그를 통틀어 디아고 헤밍턴 선수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수치입니다.]

[어제 경기에 이어 월드 시리즈라는 이름에 걸맞은 대단한 경기가 예상되는군요.]

마운드에 선 코리 콜린스가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것은 거울을 보고 연습한 것 같은 훌륭한 미소였다.

‘어우, 개쫄리네.’

물론 속마음은 정반대였다. 생애 최초의 월드 시리즈 선발 등판이 2선발이다. 그나마 작년에 불펜으로라도 마운드에 서본 경험이 조금은 도움이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바로 어제, 1차전에서 두 선발 투수가 보여준 퍼포먼스는 ‘미쳤다.’라는 표현 말고는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는 수준이었다. 그 바로 다음 경기에 서는 상황이다. 위산이 역류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학습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쫄리면 쫄릴수록 입꼬리를 들어 올려라. 게다가 그의 뒤를 지켜주는 다저스의 야수진은 세계 최고다.

할 수 있다.

뭐 굳이 말하자면 김성민도 작년에는 메이저 1년 차였는데 월드 시리즈 1차전에 선발로 섰고 MVP까지 차지했다. 코리 콜린스 본인이라고 그러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라고 스스로에게 세뇌를 걸었다.

그리고 타석에 보스턴의 선두 타자 제롬 스튜버츠가 섰다.

어제 보니 타격감이 그리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마운드에 선 투수가 디아고 헤밍턴이었다는 점 때문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수비에서의 움직임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컨디션이 100%는 아니라는 느낌이다.

‘우선은 아웃 카운트 하나부터.’

침착하게 연습한 그대로 몸쪽으로 바짝 붙인 속구를 집어넣었다.

코리 콜린스의 판단은 옳았다. 아니, 사실 당연한 일이다. 10월에 컨디션이 100%인 타자는 흔하지 않았다. 게다가 제롬 스튜버츠는 이번 시즌 보스턴 내야에서 가장 열심히 움직인 야수였으며 거의 모든 경기에 1번 타자로 출장했다. 체력적으로 지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그가 간과했던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롬 스튜버츠가 여전히 타순 조정없이 보스턴의 1번 타자로 출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딱!!

실로 얍씰한 타격.

그의 방망이가 코리 콜린스의 공을 슬쩍 두들겼다. 아니, 이건 그저 방망이를 가져다 댔다는 표현이 더 적절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분명 다저스의 야수들은 세계 최고다.

하지만 제롬 스튜버츠 역시 아메리칸리그의 쟁쟁한 타자들과 야수들을 상대로 고작 저딴 타격으로 버텨낸 남자였다.

“세이프!!”

간발의 차로 제롬 스튜버츠의 발이 1루를 먼저 밟았다.

그리고 타석에 매튜 쿠퍼가 들어왔다. 어제 결승 홈런의 주인공. 난공불락과 같았던 디아고 헤밍턴을 무너트린 슬러거.

-부웅!!

“스트라잌!!”

그의 시원한 스윙이 사뭇 위협적이다. 코리 콜린스가 입꼬리를 더 높게 들어 올렸다. 에드 맥밀란의 주문이 이 어린 투수의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해주었다.

코리 콜린스가 가장 잘 던지는 슬라이더.

그것도 바깥으로 크게 빠지는 공이었다.

-딱!!

그리고 놀랍게도 이 미친 슬러거는 그 크게 빠지는 슬라이더를 거의 폴대까지 날려 보냈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힘이다.

그리고 세 번째.

이번에는 그보다 더 빠지는 체인지업. 과연 이런 공에 속을까 싶은 수준의 공이었다.

-부웅!!

그리고 놀랍게도 속았다.

헛스윙 삼진.

그 삼진이 코리 콜린스의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해주었다. 그래, 월드 시리즈라고 해서 특별할 것도 없다. 어차피 타석에 서는 타자도 다 같은 메이저리거다. 내 공이면 충분히 통한다.

그리고

-딱!!

[너, 넘어갔습니다!! 3층 외야석 상단을 직격하는 대형 홈런!! 랄로 가야르도의 1회 초!! 선제 2점 홈런입니다.]

[랄로 가야르도 선수, 코리 콜린스의 97.4마일 속구를 완벽하게 잡아 당겼습니다.]

그 자신감은 1분도 채 되지 않아 산산이 부서졌다.

1회에만 무려 4실점.

팀 베이크 감독이 고민했다. 하지만 아직이다. 고작 1회 초. 코리 콜린스는 흔들렸을지언정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시리즈는 길고 선수는 제한적이다. 불펜을 벌써 낭비할 수는 없었다.

“젠장, 내가 이럴 줄 알았어. 2선발 자리에는 코리 콜린스가 아니라 조나단 웰스를 넣었어야해. 시즌 성적이야 조금 뒤떨어진다지만 이런 자리에는 저런 어린 녀석이 아니라 베테랑이 어울리는 법이라고.”

박동엽 옆자리의 수다쟁이 아저씨가 연신 투덜댔다.

그리고 마운드에 라만 그레고리가 올라왔다.

항상 꿈꾸던 무대였다.

물론 꿈속에서는 입고 있던 옷의 색깔이 조금 달랐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누군가는 평생을 정상급 선수로 뛰어도 올라보지 못하는 무대이거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매우 좋았다. 긴장감으로 팽팽하다. 성민과 디아고는 어제 더할 나위 없는 경기를 보여주었다. 오늘 하루 사이에 100달러에서 많게는 5천 달러까지 올라간 푯값이야말로 이번 시리즈에 사람들의 관심이 얼마나 높은지를 증명했다.

‘이왕이면 디아고 쪽을 상대하는 게 더 좋았을 것 같긴 하지만.’

뭐, 이것도 나쁘진 않겠지.

3년 전, 사이 영을 탔던.

그리고 내년 FA를 앞둔 1미터 97센티의 에이스가 공을 뿌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방금 자신이 했던 생각이 얼마나 터무니 없었는지를.

그리고 어제 경기를 풀어갔던 그 두 투수가 얼마나 괴물이었는지를.

-딱!!

LA 다저스의 선두 타자.

올해 나이 33세.

작년 시즌의 MVP 14위. 그리고 이번 시즌에는 5위권 이내 진입이 유력한 시즌 28홈런의 사나이.

마르타 블랑코의 방망이가 시원하게 라만 그레고리의 낙차 큰 커브를 잡아당겼다.

직전 이닝. 랄로 가야르도의 그것처럼 외야석 3층 상단을 직격하는 미친 비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외야석 3층 상단을 직격하건, 혹은 아슬아슬하게 담장을 넘어가건 홈런이라는 사실은 똑같다.

[마르타 블랑코!! 라만 그레고리 선수의 초구를 완벽하게 퍼 올렸습니다!!]

그 순간 사람들은 깨달았다.

아, 이건 1회 초에 4점을 내준 코리 콜린스를 욕할 일이 아니구나. 그것보다는 저런 타자들을 상대로 9회까지 퍼펙트로 경기를 틀어막았던 어제의 투수들이 얼마나 괴물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해야 될 일이로구나.

라만 그레고리가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도는 마르타 블랑코를 바라보며 쓰게 웃었다. 가끔 홈런보다 좋은 안타라는 해괴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항상 그 말의 결론은 투수의 멘탈이다. 하지만 헛소리다. 세상에 투수 멘탈을 깨트리기에 홈런보다 좋은 것은 없다.

꿈꾸던 무대의 첫 시작이 솔로 홈런이라니.

라만 그레고리가 고개를 저었다.

3년 전, 사이 영을 받으며 한참 잘나가던 시절의 그였다면 아마 멘탈이 바사삭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난 2년. 그는 더 이상 특급의 에이스가 아니었다. 몇몇 언론에서는 그가 다시는 이전의 모습을 찾기 힘들 거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그 2년의 시간은 진심이 담긴 위로조차 상처가 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이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나를 부수지 못하는 모든 고난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

고작 1점이다.

아직 나에게는 3점의 여유가 있고, 나는 아직 부서지지 않았다.

라만 그레고리가 왕년의 사이 영 위너에 어울리는 피칭을 이어갔다. 그리고 LA 다저스의 타자들 역시 작년의 우승팀에 어울리는 타격으로 그에 맞섰다.

[보스턴 레드삭스-LA 다저스 월드 시리즈 2차전 9:6!! 보스턴 레드삭스의 승리!!]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집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질주!! 시리즈 스코어 2:0 파죽의 2연승!!]

[시리즈 스코어 2:0 과연 LA 다저스는 반전할 수 있을까?]

[보스턴 레드삭스는 어떻게 다시 강팀이 되었나.]

< 웃는 남자(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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