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의 가운데(3) >
8회 초.
디아고 헤밍턴은 놀라운 감각을 경험하고 있었다.
몸은 지쳐가고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명료했다. 보통, 이 정도로 피곤하면 눈도 조금 흐려지는 법인데 시야조차도 평소보다 훨씬 선명했다.
최고의 무대, 최고의 적수, 그리고 최고의 동료.
모든 것이 최고였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8회 마지막 타자를 삼진으로!! 경기 열여섯 번째 삼진!!]
[대단합니다. 디아고 헤밍턴. 이건 그냥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저 구속 좀 보세요.]
전광판에 찍힌 숫자에 동엽이 혀를 내둘렀다.
“와, 지금 그러니까 8회에 구속이 올라간다고? 97.1마일? 이거 완전 미쳤네.”
오늘 경기 최고 구속이다.
경기를 지켜보던 동엽이 혀를 내두를 정도다. 타석에서 직접 상대했던 에두아르도 크루즈는 그냥 허탈하게 웃었다.
그야말로 쉴 틈도 없는 공수교대.
성민이 축축해진 언더웨어를 갈아입기 무섭게 다시 차례가 돌아왔다.
하지만 쉬지 못하는 것은 디아고 헤밍턴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작 4분 20초. 또 한 번의 공수 교대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그리고 9회 초.
미셸 에쉬만과 루시 알베리가 디아고 헤밍턴의 삼진 두 개를 더해줬다.
[9회 초 투아웃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 김성민 선수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건 9회 말에도 투수 교대 없이 가겠다는 이야기죠.]
[그거야 너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해설자들의 태도가 조심스러웠다.
당연하다. 물론 그들 역시 오늘 월드 시리즈 1차전이 투수전이 될 확률이 높다는 건 예상했었다. 양대 리그에서 터무니없는 기록을 써내려간 에이스들간의 맞대결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9회 초 투아웃까지 양 팀 투수가 모두 퍼펙트를 유지 중이라니.
초구.
97.1마일의 빠른 공.
-부웅!!
“스트라잌!!”
9회 초. 마지막 타자. 그것도 투수를 상대로 던졌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힘을 준 공이었다. 성민이 엄살을 부렸다.
“에드, 이거 투수를 상대로 너무한 거 아니야? 좀 살살 하자고. 살살.”
“투수? 그래 투수는 투수지. 어지간한 타자들보다 훨씬 잘 치는 투수라서 문제지. 성민, 작년에······. 아니다 작년까지 갈 필요도 없지. 시즌 초에 디아고 상대로 유일하게 타점 올렸던 게 누구였는지 벌써 까먹은 거야?”
“그거야 시즌 초라서 작년에 꾸준히 타석에 섰던 가닥이 남아있던 거고. 올해는 지금까지 그 경기 제외하고 타석에 섰던 게 고작 두 경기라고. 그나마도 두 달 전이고.”
“그러니까 방망이를 그렇게 잘 휘두르면서 아메리칸 리그는 대체 왜 간 거야. 그냥 팀에 남았으면 이런 귀찮은 일 없이 디아고랑 너랑 사이좋게 퍼······. 아니 하여간 무난하게 두 번째 반지를 낄 수 있었잖아.”
투덜거리는 와중에도 퍼펙트라는 말은 입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에드 맥밀란의 모습에 성민이 웃었다.
“그리고 넌 롤렉스 두 개 챙기고?”
“흥, 누가 지금 그깟 롤렉스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
“에드, 너도 알잖아. 지금 디아고도, 나도 이런 경기를 해나갈 수 있는 건 서로를 의식하고 각자의 한계까지 기량을 끌어올리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거. 게다가 솔직히······.”
성민의 시선이 슬쩍 보스턴 덕아웃으로 향했다.
에드 맥밀란이 단박에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먹었다.
“지금 네가 생각하는 그건 절대 아니거든. 1년간 공 더 받았으면 나도 완전 여유롭게 충분히 저 정도는 할 수 있었거든?”
“정말 그렇게 생각해?”
에드 맥밀란이 입을 다물었다.
나쁜 자식. 그래도 1년이나 같이 했던 정이 있는데 팩트로 때리다니. 사실 본인 입으로 말하고도 좀 무리수라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애초에 에두아르도 크루즈 녀석의 미트질은 그게 누구건 감히 비교하려고 들 대상이 아니다. 마치 저 페데리코 수 자식의 수비처럼. 차이가 있다면 페데리코 수의 수비는 보여줄 때마다 사람들의 환호성을 자아내지만, 에두아르도 크루즈 녀석의 미트질은 성공할 때마다 ‘심판 눈깔이 삐었냐?’라는 욕설을 불러온다는 점 정도였다.
에드 맥밀란의 분노를 대신하여 디아고 헤밍턴이 97.4마일짜리 속구를 아슬아슬한 코스로 집어넣었다.
-부웅!!
“스트라잌!!”
확실히 엄살은 아니었는지 스윙이 많이 흐트러졌다.
물론 그냥 관중이 보기에는 여전히 멋진 스윙이다. 하지만 MVP급 타자인 에드 맥밀란의 눈에는 조금 달랐다. 폼 자체는 작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타격은 섬세한 동작이다. 몸이 바뀌면 그것에 맞게 조금씩 조절을 해줘야 한다. 훈련하지 못한 티가 확실히 났다.
세 번째.
디아고 헤밍턴이 야구공을 움켜쥐었다.
[9회 초 투아웃 볼카운트 0-2. 지금까지 디아고 헤밍턴 선수가 상대한 타자의 숫자는 26명. 아직 일루를 밟은 타자는 없습니다.]
[만약 이대로 무사히 이닝을 마무리 짓는다면 그 기록까지는 이제 한 걸음만 남게 되는 셈이죠.]
[맞습니다. 아니, 9이닝까지 27명의 타자를 상대했는데 왜 한 걸음이 남았어? 라고 생각하는 분도 계실 수 있습니다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기록의 경우 승리하지 못한다면 인정이 되지 않거든요.]
[와우, 그것 9이닝 동안 주자를 하나도 내보내지 않았는데 승리를 하지 못하다니. 오히려 그 기록보다 더 어려운 조건 같은데요? 혹시 실제 사례가 있습니까?]
[네, 실제로 과거 1959년 피츠버그 소속의 하비 해딕스 선수가 연장 12회까지 기록을 이어갔지만 13회 말에 끝내기 홈런으로 패전투수가 되면서 기록이 무산된 적이 있고 1995년 몬트리올 엑스포스 소속이던 페드로 마르티네즈 선수 역시 연장 10회 초에 2루타를 맞으면서 무산됐던 기록이 있습니다.]
97마일의 속구는 무서웠다.
하지만 이제 슬슬 눈에 익었다. 볼카운트 0-2.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공 하나를 빼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성민이 생각하는 디아고 헤밍턴이라면 그런 것 없다. 이 만화 주인공 같은 녀석은 여기서 자신이 가장 자신있어하는 공을 존에 집어넣겠지.
성민이 방망이를 움켜쥐고 녀석의 세 번째 공을 기다렸다.
역동적인 투구 자세. 그리고 그의 손끝에서 공이 날아올랐다. 97마일 속······, 어? 아니었다. 79.3마일 체인지업이었다. 그것도 존 밖으로 빠져나가는.
-부웅!!
“스트라잌!! 아웃!!”
에드 맥밀란이 히죽 웃었다.
아슬아슬하긴 했겠지만 사실 굳이 방망이를 멈추려면 못 멈출 것도 없었다. 체크스윙이 아니라고 나올 확률도 반반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움직임 도중에 제동을 거는 건 그만큼 몸에 큰 무리를 준다. 게다가 연습도 제대로 되지 않은 이런 타격으로는 오늘 저렇게 이를 악물고 전력으로 나오는 디아고 헤밍턴을 상대할 자신도 없었다.
그러니 공격은 타자들에게 맡기겠다.
물론 그 공격을 맡기기 위해서는 우선 디아고 헤밍턴의 손에서 퍼펙트를 뺏어와야겠지만.
9회 말 LA 다저스의 공격.
하위 타순의 시작.
사실 어렵지 않았다. 아메리칸 리그 룰이라고 해도 7, 8, 9번 타자는 비교적 수월하다. 하물며 오늘은 내셔널 리그 룰이다. 성민 같이 지극히 이례적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9번 타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바로 지금처럼.
[88.7마일의 빠른 공!! 김성민 선수가 디아고 헤밍턴 선수에게 삼진을 뽑아냅니다.]
[오늘 경기 정말 대단한데요? 9회가 끝났는데 이제 두 팀 모두 딱 타순이 세바퀴 돌았습니다. 점수는 여전히 0:0. 오늘 경기는 정말 월드 시리즈. 아니 메이저리그 역사에 전무후무한 경기가 될겁니다.]
[그나저나 디아고 헤밍턴 선수가 9회 말 공격에도 타석에 올라왔다는 건 10회에도 마운드에 오를 거라는 뜻이겠죠?]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지금 기록이 이어지고 있어요. 이 상황에서 마운드에서 투수를 내린다? 만약 감독이 그런 선택을 했다면 그날 저녁 최소한 자동차가 불탈 각오는 해야 할 겁니다.]
[지금 디아고 헤밍턴 선수의 투구 수가 119개. 김성민 선수의 경우 105개입니다. 사실 김성민 선수가 너무 투구 수가 적어서 조금 묻히는 감이 있습니다만 9이닝을 던지고 119개면 디아고 헤밍턴 선수도 상당히 효율적인 피칭을 했다는 뜻이거든요.]
[맞습니다. 이번 시즌 메이저리그의 이닝당 평균 투구수가 16.27개였으니까 평균보다 거의 27개 정도를 덜 던진 셈입니다.]
연장 10회.
디아고 헤밍턴이 다시 마운드에 올라왔다.
이미 119개의 공을 던졌음에도 그는 마치 지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네 번째 타순을 맞이하는 보스턴의 타자들을 압도했다.
그리고 보스턴의 덕아웃.
엔리케 로만이 명장의 미소를 띤 채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어색하지는 않았다.
대외적으로만 본다면 그는 작년 엉망진창으로 망가졌던 보스턴의 팀 케미스트리를 극적으로 회복시켜 월드 시리즈까지 진출시킨 대단한 감독이었으니까.
그리고 누군가의 행동이 그런 그의 미소를 일그러트렸다.
“성민,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은 엔리케 로만만이 아니었다.
해설자들 역시 크게 놀랐다. 아니 퍼펙트를 진행 중인 투수가 대체 어째서 교체 준비를 하는 거지?
5만 7천명이 가득 찬 경기장이다. 누군가는 스마트폰을 누군가는 해설을 함께 들으며 경기를 관전하고 있었다. 보스턴 덕아웃은 그림자도 보이지도 않는 4층 구석진 자리까지도 직접 보지 못했더라도 정보가 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런 미친?”
경기장 전체의 술렁거림이다. 마운드 위에 선 디아고 헤밍턴 역시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대체 무슨 일일까?
그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목격했다. 보스턴 덕아웃이 바쁘게 움직이는 장면. 그리고 성민이 교체될 준비를 하는 모습을 말이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최고의 무대에서 최고의 동료들과 최고의 적수와의 싸움으로 극한까지 올라와 있던 그의 집중력이 순간 흔들렸다.
투구 수는 이미 126개.
보통이라면 진즉에 교체되어 마땅한 투구수였다.
그리고 타석에서 그의 공을 기다리는 것은 간절하게 네 번째 기회를 바라던 매튜 쿠퍼.
그는 경기장의 소란에도 불구하고 오직 대기 타석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랄로 가야르도와 마운드 위에서 괴물 같은 포스를 뽐내는 디아고 헤밍턴에게만 온전히 자신의 정신을 쏟고 있었다.
분명 그는 랄로 가야르도에 비하자면 부족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랄로 가야르도라는 녀석이 3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에 이 젊은 나이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튜 쿠퍼는 격년으로 한 번 나올만한 천재라고 부를 만했다. 뭐, 그걸 천재라고 불러줘야 할 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조금 갈릴 수 있었지만 말이다.
-딱!!
격년 단위의 천재 매튜 쿠퍼의 방망이가 디아고 헤밍턴의 127번째 공을 후려갈겼다. 가장 완벽했던 경기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월드 시리즈 1차전 기록되지 못한 두 개의 퍼펙트]
[김성민 부상? 그저 사소한 근육 통증일뿐. 남은 등판일정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어.]
[AL 챔피언십 시리즈 MVP 매튜 쿠퍼!! 10회 초 디아고 헤밍턴의 퍼펙트를 깨트리는 솔로 홈런포.]
-그런데 성민아 대체 거기서 왜 몸이 불편하다고 한 거냐? 아무런 이상도 없었는데?
“그냥 제가 생각할 때 그 타이밍이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승부처였어요.”
-어째서?
“뭐, 디아고 그 녀석 저한테 엄청 신경 쓰고 있었잖아요. 정상적이라면 퍼펙트까지 기록한 직후였고요. 게다가 타석에는 뭐 그 바보 콤비가 연달아 들어갈 차례였고요.”
-하지만······
“무엇보다 투구 수도 100개를 넘겼는데 시리즈에 등판 한 번 하고 끝낼 것도 아니고. 승부가 한 번 더 남았으니까요.”
-그건 너무 생각이 많은 거 아니냐? 마치 감독이나 할 법한 생각같구나.
“에이, 감독이면 이렇게 생각 안 하죠.”
-응?
필 니크로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대기록을 앞둔 선수의 관점이라고? 천만에.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경기를 운영하는 감독의 관점이다. 그것도 보통 감독이 아니다. 대단한 명장이나 도전해볼 만한 일이다.
애초에 감독이라고 해도 이런 기록을 진행 중인 투수를 내리는 도박 수를 두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경기를 패배했더라면 감독이 보통 욕먹는 거로 끝날 일이 아니다.
-아······.
그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한 필 니크로의 신음에 성민이 씨익 웃었다.
그래, 이건 만약 패배했더라면 ‘감독’이 보통 욕먹는 거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 역사의 가운데(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