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59화 (260/287)

< 역사의 가운데(2) >

4층.

동엽의 입이 중력의 힘을 거스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니 대체 어떻게 저런 수비가 가능한 걸까? 어지간하면 나도 다 할 수 있어. 라는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동엽이었지만 저것만큼은 도저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저기서 저런 공을 저렇게 점프를 뛰어서 낚아챈다고?

옆자리에 앉은 수다쟁이 아저씨도 방금 수비에는 깜짝 놀랐는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디아고 헤밍턴이 페데리코 수를 한번 강하게 껴안았다. 메이저리그에는 퍼펙트를 달성한 투수가 포수에게 롤렉스를 선물하는 관습이 있다. 디아고는 만약 오늘 자신이 그것을 달성한다면 페데리코 수에게 롤렉스 이상의 것을 선물하겠노라 결심했다.

마운드에 성민이 섰다.

좋은 수비 뒤에 좋은 공격이 따라온다는 말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최소한 페데리코 수의 환상적인 수비가 무언가를 바꿔놓은 것은 분명했다. 보스턴 레드삭스 선수들, 그리고 LA 다저스 선수들의 얼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자신감이 붙은 다저스 선수들의 얼굴과 무언가 위축된 레드삭스 선수들. 그들의 얼굴을 살핀 필 니크로가 말했다.

-흐름이 좋지 않구나. 위험할 수도 있다.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바뀐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 분명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경기장에서 뛰는 것은 숫자가 아니다. 모든 것이 결국 숫자로 표시되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경기장에서 뛰는 것은 여전히 사람이고, 사람은 그때그때의 분위기와 흐름에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필 니크로가 입 밖으로 나오려는 이야기를 삼켰다. 돌이켜보면 이런 종류의 일에 진짜 전문가는 성민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흐름.

타석에 다저스의 1번 타자 마르타 블랑코가 올라왔다.

세 번째 타순.

그리고 바뀐 분위기를 살리겠다는 각오가 단단히 엿보였다.

초구 존을 공략하는 빠른 너클볼.

마르타 블랑코의 방망이가 공을 건드렸다.

-딱!!

파울라인을 살짝 벗어나는 땅볼 타구. 잠시 타석에서 물러난 마르타 블랑코가 장갑을 동여맸다.

“슬슬 공이 눈에 익어가는 느낌이야. 그런 의미에서 이제 이 지루한 평행을 깨트릴 때도 된 것 같은데? 두 개의 그거라니. 이건 경기를 보는 관객들도, 경기를 하는 우리도 너무 재미가 없잖아?”

그의 이야기에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피식 웃었다. 이 녀석들은 모른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경기를 뛰고 있는지. 아니, 상상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다.

공수 교대 직전.

성민은 그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아까 5회부터 너무 공격적이었어. 물론 하위 타순들 상대였다고는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이제 세 번째 타순 시작인 거 알지? 지금까지는 공격적인 피칭이 잘 먹혔지만, 이제는 좀 힘들 수도 있어. 특히 다저스의 상위 타순은 매섭다고. 공 하나 삐끗하면 그대로 담장이야. 그러니까 최악의 경우에는 볼넷을 주더라도 조금 피해 가는 피칭을 해보자고.”

“응?”

특별히 잘못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만약 지금 성민이 ‘그것’을 하는 중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성민의 이야기에 차마 뭐라고 답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이 녀석 설마 자기가 ‘그걸’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그렇다면 그걸 의식하지 않는 투수에게 대체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하지?

하지만 아니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그리고 그거 하려면 어차피 9회까지 다 막는 거로 되는 것도 아니야. 9회까지 막고 승리까지 해야 하는 거라고. 지금 저 괴물을 상대로 그게 수월할 것 같아? 그나마 뭔가 될 것 같은 상황에서 저 모양 저 꼴이 났는데?”

성민 역시도 본인이 퍼펙트를 진행 중인 걸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그는 눈앞에 놓인 퍼펙트라는 기록이 아닌 어째서 퍼펙트라는 기록이 그토록 존중받을 수 있는지 그 근원을 본 것뿐이었다.

모든 위대한 기록이 가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승리를 위해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보여주는 객관적인 지표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 모든 복잡한 숫자놀이가 종국적으로 향하는 곳은 승리다.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에두아르도 크루즈를 향해 성민이 웃으며 말했다.

“게다가 그런다고 해서 꼭 기록이 깨지라는 법도 없잖아? 게다가 우리 애들 시즌 초랑 비교하면 아주 괜찮아졌잖아. 안 그래?”

젠장, 지금 저게 저 위대한 기록을 이어가는 투수가 하는 이야기라고? 오히려 기록에 집착해도 이상하지 않을 판국에? 그래, 물론 성민은 이미 퍼펙트를 기록해봤다. 하지만 그건 정규시즌 이야기다. 월드 시리즈는 또 의미가 다르다.

하지만 그렇기에 에두아르도 크루즈는 성민이 오늘의 승리에 얼마나 많은 것을 걸고 있는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이기자. 우리 꼭 이기자.”

“뭐 그렇게 당연한 소리를.”

마르타 블랑코가 다시 타석에 들어왔다.

두 번째.

이번에도 역시 빠른 너클볼. 존에서 벗어나는 공을 주문했다. 물론 꼭 그곳에 들어올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사실 탄착군이 형성된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너클볼이란 본래 그런 공이니까.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성민의 공을 기다렸다.

공이 흔들린다.

타자가 방망이를 휘두르고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시선이 공의 흐름을 쫓는다.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직감. 그리고 그 위에 쌓인 1년의 경험. 그의 미트가 성민의 공을 받아냈다.

-뻐엉!!

“스트라잌!!”

주문했던 것보다 20센티쯤 밖으로 더 빠진 공이었다. 하지만 충분하다. 보통 공이 20센티가 더 빠졌다면 그건 20센티나 빗나간 공이지만 너클볼이 20센티가 빠졌다는 건 고작 그만큼의 범위 안에 공을 집어넣었다는 의미였으니까.

볼카운트 0-2.

이어지는 세 번째와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 마르타 블랑코가 제법 성민을 잘 물고 늘어졌다. 확실히 MVP 10위 이내에 들어갈 만한 타자답다.

하지만

‘이건 역시 한 방을 노릴 생각이 전혀 없군.’

그는 이번 시즌 28개의 홈런을 쳐낸 한 방이 있는 타자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작정하고 공을 두들겼을 때 이야기다. 이런 소극적인 걷어내기로는 장타를 만들 수 없다. 지금 마르타 블랑코가 이런 타격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역시 퍼펙트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라도 볼넷을 각오한 피칭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 어쨌거나 풀카운트까지 가면 존에 들어오는 공은 결국 스트라이크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만약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볼넷으로 퍼펙트는 깨트릴 수 있고 말이야.’

볼카운트 2-2.

여섯 번째.

홈플레이트 가까이에서 아슬아슬한 공이라도 어떻게든 걷어내려는 마르타 블랑코를 향해 성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전력을 다한 속구.

위치는 몸쪽 높은 코스.

자칫 손이라도 미끄러지면 몸에 맞는 볼로 퍼펙트가 깨질 수 있는 위치. 그렇기에 마르타 블랑코의 머릿속에서 잠시 사라진 위치. 어떻게든 공을 걷어내기 위해 마지막까지 공을 지켜보던 그의 허를 찌르는 90.3마일의 빠른 공이 존을 통과했다.

-뻐엉!!

아슬아슬한 위치. 마르타 블랑코의 시선이 심판을 향했다. 바로 직전 이닝 디아고 헤밍턴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지 못했던 것과 비슷하게 벗어난 공이다. 하지만 성민의 로케이션은 완벽했다.

지금 공을 받는 포수가 만약 에드 맥밀란이었다면 공 반개쯤 더 안쪽으로. 하지만 에두아르도 크루즈에게는 이걸로 충분하다.

“스트라잌!!”

심판의 손이 올라왔다.

[김성민 선수의 과감한 몸쪽 높은 속구에 마르타 블랑코 선수 루킹 삼진입니다.]

[와, 지금 그걸 기록 중인 상황에서 이런 승부는 좀처럼 쉽지 않죠. 조금만 삐끗해도 그대로 기록이 깨지는 거거든요.]

[김성민 선수 같은 경우는 워낙에 커맨드가 뛰어나고, 또 이런 큰 경기나, 대기록에 도전했던 경험이 많은 선수니까요.]

이어지는 2번 타자는 세실리아 마토스.

2년 전만 하더라도 마르타 블랑코와 비슷한 수준의 선수로 평가받았지만, 마르타 블랑코가 브레이크 아웃한 현재 명백히 그보다 한 수 쳐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역시 거의 올스타급에 근접한 실력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는 매년 3 정도의 WAR을 기대할만한 타자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딱!!

3구째 타격.

그 평범한 내야 땅볼을 성민이 받아 가볍게 처리했다.

[경기가 계속되는 가운데 타석에는 다저스의 3번 타자 에드 맥밀란 선수가 올라옵니다.]

[이 선수도 참 대단한 선수죠. 애초에 수비부담이 큰 포수가 중심 타선에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인데 이 선수 같은 경우에는 빅마켓인 LA 다저스에서도 무려 3번을 치고 있거든요.]

[이번 시즌 타격 성적을 보면 충분히 그럴만합니다. 0.284/0.387/0.563. 홈런만 무려 37개를 기록했어요. 이번시즌 아메리칸리그의 가장 강력한 MVP 후보가 랄로 가야르도 선수라면 내셔널리그는 에드 맥밀란 선수가 자기 이름을 거의 다 새겨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에두아르도 크루즈는 매년 5에 가까운 WAR을 오직 프레이밍으로 적립한다. 물론 논란은 많다. 프레이밍이 정말 그만한 승리 기여도가 있느냐, 그것이 오직 포수의 역량이냐 등등. 하지만 어쨌거나 가장 공신력 있는 사이트들에서 그의 프레이밍에 그만한 수치를 부여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에드 맥밀란은 그런 에두아르도 크루즈에 필적하는 ‘공격형’ 포수다. 그가 이번 시즌 기록한 Wrc+는 무려 165. 포지션 보정치를 넣은 PoswRC+로 보게 되면 175으로 리그에서 두 번째로 높다. 그리고 그보다 높은 Wrc+를 기록한 포수는 역사상 오직 네 명뿐이다.

작년, 성민의 너클볼을 받기 위해 1년 내내 고생했던 포수가 이번에는 성민의 너클볼을 쳐내기 위해 타석에 섰다.

보내고

다시 보내고

두들겨 보고.

건드리고

또, 다시 보내고

건드리고

또 건드렸다.

볼카운트는 2-2

그리고 여덟 번째.

빠른 너클볼.

그의 시선이 성민의 공을 쫓았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 공. 존의 근처로 날아든다면 일단 두들기고 봐야 한다. 하지만 올해, 그에게 위대한 시즌을 선물했던 그의 직감이 소리쳤다.

‘흘려보내라.’

잠깐의 망설임.

만약 그가 성민이라는 남자를 몰랐다면 어떻게든 방망이가 따라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김성민이라는 사나이를 제법 잘 알고 있었다. 퍼펙트가 진행중인 상황에서 포수가 바뀌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공을 뿌리고, 그렇게 바뀐 포수가 너클볼 받는 것이 완전하지 않은데도 원바운드되는 공을 던지는 미친놈. 그리고 끝끝내 퍼펙트를 해낸 대단한 놈.

에드 맥밀란의 방망이가 멈춰 섰다.

-뻐엉!!

그 참을성에 필 니크로가 살짝 감탄했다.

-이 상황에서 이걸?

볼카운트 3-2

풀카운트 상황. 아홉 번째 공.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들이 침묵했다. 그들 역시 지금 이 타석이 오늘 승부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임을 직감했다.

성민의 선택은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너클볼.

슬슬 지쳐가는 몸에 힘을 더했다. 더 빨리 지친 작은 근육들의 움직임을, 아직 힘이 넘치는 더 큰 근육들의 움직임을. 극도로 단련된 감각이 예리하게 잡아냈다. 그리하여 만전의 상태에서나 나올법한 그 완벽한 너클볼이 그의 손끝을 떠났다.

에드 맥밀란의 본능이 또 한 번 소리쳤다.

‘빠지는 공이다!!’

동시에 그의 이성이 외쳤다.

‘그런데 지금 퍼펙트 중인데?’

그리고 본능과 이성의 어느 사이에서 지금 공을 받는 포수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냈다.

에두아르도 크루즈.

그는 에드 맥밀란이 휘두르는 방망이만큼의 성적을 저 미트로 만들어내는 남자다. 에드 맥밀린의 기준으로는 빠지는 공도 저 남자의 손에서는 스트라이크로 둔갑한다.

그렇기에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은 너무나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다만 불합리했던 것은

퍼펙트 상황에서 완전히 빠지는 공을 던지겠다는 사인을 보낸 투수.

그리고 그런 투수의 사인에 반박 없이 고개를 끄덕인 포수가 이 자리에 있다는 점이었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월드 시리즈 1차전 7회 말.

합리와 불합리의 싸움에서 대기록을 내던질 각오를 했던 불합리가 승리했다.

< 역사의 가운데(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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