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58화 (259/287)

< 역사의 가운데(1) >

경기를 지켜보는 관중들도 직감했다.

이건 보기 드문 명경기다.

1986년 어느 약쟁이의 20탈삼진 경기를 직관했던 그들의 할아버지가 죽는 그 순간까지 1986년에는 아직 약을 하지 않았던 청정 투수였음을 주장했던 것처럼.

1999년의 올스타전 직관한 아버지가 아직도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경기를 지켜보는 이들의 야구관 자체를 바꿔놓을 만한 대단한 경기다.

“젠장, 왜 하필 이런 경기가 LA에서 열리는 거야. 이건 꼭 직관해야 하는 경기였잖아.”

“그러니까. 선발 투수 둘 다 7회까지 그걸 하는 경기라니. 그것도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

“그래도 지금 유리한 건 역시 성민이겠지?”

“당연하지. 지난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도 물론 퍼펙트는 아니었지만, 양상은 비슷했잖아. 투수도 결국 사람이고 투구 수가 늘어나면 체력적으로 지치게 돼 있어. 지금 성민이가 72개고 디아고가 82개잖아. 물론 디아고도 6회까지 던진 거치고는 나쁘지 않지만, 투구 수 10개 차이면 꽤 크지. 이 페이스대로면 9회까지 가면 디아고는 무조건 100개 넘어가는 거고 성민이는 기껏해야 95개쯤 되지 않겠어?”

[7회 초. 보스턴의 공격. 마운드에 다시 디아고 헤밍턴 선수가 올라옵니다.]

[지금까지 아웃 카운트 18개 가운데 삼진만 무려 12개. 오늘 디아고 헤밍턴 선수 정말 놀라운 활약입니다.]

[그렇다고 투구 수가 많은가 하면 또 그것도 아니에요. 지금까지 투구 수는 85개에 불과합니다. 선수당 4.56개의 매우 경제적인 피칭을 하고 있어요. 얼핏 생각하면 삼진을 잡으려면 최소한 공 3개가 필요한데 모든 타자를 삼구삼진으로 잡는 것도 아니고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싶지만, 사실 투구 수에 영향을 주는 건 불필요한 볼질 쪽이거든요. 공격적인 피칭을 하면 투구 수도 상당히 절약된다는 걸 오늘 디아고 헤밍턴 선수가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말씀드리는 순간, 디아고 헤밍턴!! 선두 타자 제롬 스튜버츠 선수를 상대로 공 네 개 만에 헛스윙 삼진!! 저 선수도 정말 공을 맞추는 능력 하나 만큼은 타고난 선수인데 아주 예술적인 슬라이더였습니다.]

[이걸로 벌써 경기 열세 번째 삼진!! 오늘 디아고 헤밍턴 선수 정말 무섭습니다. 보스턴 타자들이 힘을 못 쓰고 있어요.]

덕아웃 뒤편 가장 비싼 자리에서 관람하던 프레스톤 윌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 정도는 되니까 우리 애들이 그렇게 영혼까지 털렸지. 아니, 지금 보니까 시즌 때보다 더 잘 던지는 것 같은데? 저 정도면 거의 내 현역 시절이라도 장담하기 힘들겠는데?

그리고 4층 가장 구석 자리.

동엽이 다시 한번 비싼 돈을 내고라도 직관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성민도 그렇고 디아고 헤밍턴도 그렇고 진짜 괴물들이다. 동시에 아쉬웠다. 이렇게 먼 자리가 아니라 포수 뒤편, 성민과 디아고가 던지는 공이 가장 타자의 시점에 가깝게 보이는 자리라면 대체 어떤 느낌일까?

다저 스타디움은 이미 늦었지만, 다음 성민과 디아고가 등판하는 보스턴에서는 정말 크게 무리를 해서라도 포수 뒤편 자리를 앉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이 든 김에 가격을 확인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펼쳤다.

그리고 최저가 정렬만 했던 터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진짜 좋은 자리의 가격에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일, 십, 백, 천, 만······. 환율이 지금 1,161원이니까 12,190,500원? 이런 미친? 표 한 장이 거의 내 연봉 20%라고? 잠깐만. 아니지, 아니지. 이거 비용으로 처리되는 거 아닌가? 그러면 세후 연봉으로 계산하는 게 아니라. 아오!! 어쨌거나 더럽게 비싸잖아!!”

티켓 재판매 사이트에 올라온 가격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이었다.

몇 번을 고민했지만 역시 이건 무리다. 경기 한 번에 1년 생활비가 훅 사라지다니. 언제 부상으로 나가리 될지 모르는 것이 야구 선수다. 지금 돈을 잘 번다고 막 쓸 수는 없다. 동엽이 과감하게 스마트폰을 접었다.

매튜 쿠퍼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타석에 들어섰다.

고개를 슬쩍 돌려보니 대기 타석의 랄로 가야르도가 보였다. 바로 직전 공격에서 어째서 홈 경기 0점대 평균자책점이었는지를 알겠다고 이야기했던 주제에 녀석의 얼굴에는 여전히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그 얼굴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0점대라는 건, 0점은 아니라는 거잖아. 결국, 누군가는 점수를 냈다는 이야기고, 난 그 누군가에 충분히 속할 수 있는 사람이야.’

망할 자식.

다음 타자가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데 도저히 약한 소리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매튜 쿠퍼가 지난 부상 이후로 한층 단단해진 몸에 힘을 불어넣었다.

성민의 어머니와 결혼을 한다고 했던가? 저 뒤편에 프레스톤 윌슨 감독이 느껴졌다. 뭐, 존경한다든지 선망하는 선수라든지 하는 낯간지러운 것은 아니다. 단지 언제가 그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이후 했던 어느 인터뷰가 마음에 남았을 뿐이다.

‘그냥 적당히 하려고 했는데 옆에서 너무 열심히 달리는 녀석이 눈부셔서. 심지어 대충 달려도 나보다 더 빠를 것 같은 녀석이 그러는 게 화가 나서. 이를 악물고 따라가 봤더니 여기까지 와버렸습니다.’

그건 누가 들어도 강진호의 이야기였다.

처음 저 인터뷰를 봤던 당시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매튜 쿠퍼는 그 나이 또래의 학생들이 다 그렇듯 자신감으로 충만했고, ‘누군가는 자신을 저렇게 생각하겠지.’ 정도의 생각만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마이너에서 랄로 가야르도라는 괴물을 만나고 우연히 다시 읽게 된 그 잡지의 인터뷰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저 영감님은 이런 기분 속에서 무려 20년이 넘는 세월을 뛰었던 거구나. 그것참 엿 같은 일이었겠네.

매튜 쿠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저 영감이 아니고, 랄로 녀석은 강진호가 아니다.

그 두 사람의 재능은 어마어마한 차이였겠지만, 나와 랄로 녀석의 재능은 손톱보다는 조금 크고 그냥 손가락 몇 마디 정도? 그래, 딱 그 정도다. 인생은 길고 프로 생활은 이제 시작됐다. 고작 그 정도 재능의 차이는 그 긴 시간과 사건 속에서 충분히 뒤집힐 수 있다.

마운드의 디아고 헤밍턴이 이를 악물었다.

세 번째 타순. 사실상 마지막 고비다.

최고의 공을 던졌지만 시원하게 담장 밖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메이저리그는 괴물들이 가득하고, 월드 시리즈까지 올라온 팀의 중심타자는 그런 괴물의 범주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런 경험은 이미 충분하다. 굳이 오늘 그 경험을 더할 생각은 없었다.

7회 초.

97.1마일의 속구.

-딱!!

빗맞은 타구가 내야 관중석을 두들겼다.

무서운 힘이다.

두 번째.

낮게 제구된 94.3마일의 커터.

매튜 쿠퍼의 방망이가 멈춰 섰다.

-뻐엉

“스트라잌!!”

정말 절묘한 공이었다. 이건 휘둘렀어도 내야 땅볼 아웃이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이건 기계가 판정했으면 무조건 볼이다. 대체 이런 공을 어떻게 치라는 건가. 빌어먹을. 하여간, 저기 바다 건너 동네에서는 다들 심판이 눈에 AR기기를 끼고 존을 구분한다던데 여긴 아직도 그놈의 프레이밍이다.

볼카운트 0-2.

아주 유리한 카운트다. 보통이라면 공 하나나 둘 정도는 빼겠지. 하지만 오늘 디아고 헤밍턴은 매우 공격적이었다. 지금 녀석이라면 정면으로 승부를 걸어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세 번째.

마운드의 투수가 힘차게 와인드업했다.

온다.

81.1마일의 체인지업.

무려 13마일이나 차이 나는 공. 하지만 괜찮았다. 예상했던 공이다. 오늘 녀석의 체인지업은 알고도 치지 못할 만큼 대단했고, 13개의 삼진 가운데 5개가 이 체인지업으로 만들어졌으니까.

그 자신감 넘치는 공을 공략한다!!

매튜 쿠퍼의 방망이가 그 공을 향해 움직였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스윙 스트라이크!! 삼구삼진!! 디아고 헤밍턴!! 경기 열네 번째 삼진입니다. 존을 완벽하게 빠져나가는 체인지업으로 매튜 쿠퍼 선수의 헛스윙을 끌어냅니다!!]

[81.1마일의 체인지업!! 지금 매튜 쿠퍼 선수 타이밍은 얼추 맞았거든요? 그런데 코스가 아주 절묘했어요. 게다가 횡무브먼트가 어마어마했습니다.]

매튜 쿠퍼가 바닥을 걷어찼다.

젠장. 생각했던 구종이 왔다고 너무 흥분했다. 아무리 공격적인 투수라고 해도 0-2에서 공을 뺄 거라는 생각 없이 방망이를 휘두르다니.

아니, 아니다. 매튜 쿠퍼가 고개를 저었다.

저런 수준의 투수가 던지는 공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이게 정답이다. 그냥 운이 없었던 것뿐이다. 그러니 부디 네 번째 기회가 찾아오기를.

“잘해봐.”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랄로 가야르도가 타석으로 걸어왔다.

[7회 초. 2아웃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 랄로 가야르도 선수가 올라옵니다.]

[이번 시즌 아메리칸 리그의 강력한 MVP 후보죠? 첫 번째 타석 외야 플라이. 두 번째 타석에서도 거의 폴대 근처까지 가는 큼지막한 파울 플라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마운드의 디아고 헤밍턴이 모자를 벗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한 방이 있는 타자를 상대하는 건 언제나 힘들다. 특히나 오늘처럼 대단한 경기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자칫하면 담장을 넘어가고, 그대로 경기를 결정짓는 1점이 될 수 있다는 부담감이 에이스의 어깨를 짓누른다.

축축한 몸과는 달리 바짝 말라가는 입술을 혓바닥으로 핥았다.

오늘 경기 가장 위험한 타자다.

존을 빠져나가는 공을 두들겨 거의 폴대까지 날려 보낸 무식한 힘의 소유자. 그렇다고 발이 느린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우타자 주제에 1루까지 평균 4.17초. 준족이라고까지 하기에는 조금 부족하지만, 이번 시즌 메이저리그 우타자 평균이 4.57초라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빠른 편이다.

초구.

신중한 커터.

매튜 쿠퍼에게 던졌던 그 두 번째보다는 조금 못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감각이 손끝을 스쳤다.

절묘한 코스.

-뻐엉!!

하지만 바로 직전 아슬아슬한 공에 심판의 손이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랄로 가야르도의 방망이가 움직이지 않았다.

에드 맥밀란이 힐끔 심판을 바라봤다. 하지만 조금 더 빠진 탓일까? 이번에는 손이 올라오지 않는다. 만약 에두아르도 크루즈 녀석이었다면 이 공도 스트라이크로 둔갑시킬 수 있었을까?

에드 맥밀란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오늘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마지노선은 조금 전 매튜 쿠퍼에게 던졌던 그 두 번째 공정도라는 점이었다.

볼카운트 1-0

천재 랄로 가야르도의 정신이 오직 마운드의 투수에게 집중됐다. 그 투지 넘치는 얼굴에 디아고 헤밍턴이 피식 웃었다. 좋은 타자다. 아마 더 좋은 타자가 되겠지.

하지만 디아고 헤밍턴 이전,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 세 번의 사이 영을 수상한 투수는 오직 열 명.

작년 디아고 헤밍턴은 커리어 세 번째 사이 영을 수상하며 그 전설적인 열 명의 투수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올해 네 번째 사이 영이 확실시 되는 지금.

그는 이미 이 시대의 지배자. 아니, 시대를 넘어 역사에 이름을 새길 투수다.

역대 최고에 도전하는 투수의 온몸이 꿈틀거렸다. 타고난 재능과 그 재능을 극한까지 끌어낸 연습. 그리고 겹쳐진 행운이 만들어낸 피칭.

그리고 그 앞에, 타자로써 그와 비슷한 길을 걸어갈 가능성을 품은 천재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그것은 마찬가지로 타고난 재능과 그 재능을 극한까지 끌어낸 연습. 그리고 약간의 행운으로 완성된 타격이었다.

-딱!!

[쳤습니다!! 빠른 타구!!]

그리고 그만한 기량을 가진 타자와 투수의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행운의 여신이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였다.

월드시리즈 1차전.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페데리코 수가 뛰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석 4층 어느 유격수의 눈과 입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야구에서 사람들을 가장 경악케 하는 것은 시원한 홈런도 날카로운 피칭도 아닌 생각하지 못한 순간의 위대한 수비인 법이다.

리그 역사상 이와 같은 수비가 몇 이나 됐을까? 그 전설적인 오즈의 마법사? 야구 역사상 가장 완벽한 수비였다는 더 캐치? 혹은 어째서 그가 그곳에 나타났는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던 더 플립?

모두가 그 환상적인 수비에 숨을 죽이고 있던 바로 그 순간.

덕아웃의 성민이 글러브를 움켜쥐었다.

“다시 내 차례네.”

그 어마어마한 장면이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 평이한 음성. 보스턴의 선수들이 성민을 바라봤다. 그리고 동시에 강제로 깨달았다. 지금 내가 뛰는 이 경기는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야 하는 경기로구나.

‘나는 지금 야구의 역사 한 가운데 서 있구나.’라는 것을.

< 역사의 가운데(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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