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강의 팀(5) >
에드 맥밀란이 아쉬운 표정으로 물러났다.
물론 이번 승부에 어울리는 표정은 아니었다.
삼구삼진.
그야말로 아쉬움이라고는 조금도 남지 않을 압도적인 패배였다.
“성민 선배 진짜로 더 강해졌구나.”
여러 매체를 통해서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경기장에서 보는 느낌은 또 달랐다.
KBO에서 뛰던 시절만 하더라도 저 선배라면 MLB에 가도 성공하겠구나. 정도로 생각했다. 물론 여기서 성공은 ‘3년 6,600만 달러를 받고 가도 망했다는 소리는 듣지 않겠구나.’ 정도의 생각이었다. 대충 메이저리그에서도 준수한 1선발 정도?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수준이다.
문득 인터넷에 떠도는 김성민 KBO 억제기 설이 떠올랐다.
연못에 사는 포식자가 더 자라지 않는 것처럼, 어차피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으니 더 잘할 필요가 없었다는 논지의 주장이었다.
물론 동엽이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린스는 억제기를 끼고 우승시킬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팀이 아니었다.
게다가 성민의 메이저 1년 차와 2년 차 성적을 비교해볼 때 이것은 그냥 KBO에서 30경기 202이닝 25승 무패. 평자책 0.89를 할 수 있는 투수가 메이저에 가서 더 발전했다고 봄이 타당했다.
‘그렇다면 혹시 나도?’
물론 성민의 발전이 그저 너클볼을 완숙하게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뤄진 발전일지, 아니면 메이저리그라는 새로운 자극이 만들어 낸 발전일지는 상식적으로 생각해본다면 뻔한 답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본디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기 마련이다. 동엽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마음속에 메이저리그에 대한 갈망이 조금 더 커졌다.
삼자범퇴 후 공수 교대.
디아고 헤밍턴이 웃었다.
생각해보면 웃을 타이밍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이번 승부가 지난 4월처럼 허망하게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세상에 8이닝 무자책 3실점 패배라니. 당시에는 ‘하필 팀을 골라도 저런 썩은 팀을 골랐나.’라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런 팀을 이끌고 이렇게 꾸역꾸역 월드 시리즈까지 진출하는 걸 보니 ‘어느 팀이라도 상관없다는 자신감이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우연일 것이다. 선수 하나로 팀이 바뀌다니. 그런 건 불가능하다. 한 명의 선발 투수가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날의 경기뿐이다.
그리고 디아고 헤밍턴은 오늘의 경기를 아주 완벽하게 책임질 생각이었다.
자신이 이 시대 최강의 선발 투수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뻐엉!!
“스트라잌!! 아웃!!”
96.1마일의 속구.
좌완. 게다가 완벽에 가까운 디셉션과 릴리즈 포인트를 가진 투수다. 숫자로 표기되는 이상의 위력이 보스턴 타자들을 침묵시켰다.
“저거 진짜 괴물이네. 저 녀석 이번 시즌 평균자책점이 1.87이라고?”
“어, 근데 그것도 세 경기인가? 확 망친 경기가 있어서 그렇다고 하더라. 심지어 그중에서 두 경기가 쿠어스였다네.”
“다저 스타디움에서는?”
“너 들으면 의욕이 확 사라질 것 같은데?”
“이봐 매튜. 지금 날 뭐로 보고. 난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불타오르는 사나이라고.”
“0.97.”
“그건 대체 뭐 하는 괴물이냐?”
랄로 가야르도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무리 투수 친화 구장인 다저 스타디움 한정이라지만 0점대 평균자책점이라니. 그게 어디 메이저리그에서 가당키나 한 수치인가.
“대체 그 아저씨는 올스타전에서 저런 녀석을 상대로 어떻게 홈런을 때렸던 거야? 그날을 돌이켜보면 오늘이랑 비교해도 딱히 차이 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내가 볼 때 그건 백퍼 뽀록이다.”
두 녀석의 투덜거림에 에두아르도가 슬쩍 끼어들었다.
“지금 우리도 그 뽀록이 상당히 간절한 거 잘 알고들 있지?”
“어휴, 걱정하지 마세요. 전 그런 뽀록이 아니라 정정당당한 실력으로 멋지게 저기 4층을 쾅!! 맞춰버릴 테니까.”
“매튜 네가 잘도 그러겠다. 그냥 안전하게 1루나 밟아봐. 내가 알아서 걸어들어오게 해줄 테니까.”
“어, 뭐지? 이거 혹시 데자뷰인가? 언젠가 경기에서 비슷한 이야기 하다가 내 말대로 이뤄졌던 것 같은 기억이 떠오르는데?”
녀석들의 만담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삼자범퇴.
그것도 KKK.
마운드의 디아고 헤밍턴이 포효했다. 타자의 홈런 직후 빠던 만큼이나 지양되는 행위였지만 아무도 그것에 불쾌함을 표시하지 못했다. 본래 그런 규정은 모두의 존중을 받을 수 있는 위대한 선수에게는 예외로 적용되는 법이다. 물론 디아고 헤밍턴이라는 남자는 이제 고작 메이저 7년 차에 불과했지만, 때로 어떤 선수가 위대해지는 데는 7년이면 충분했다. 지금 마운드에 선 디아고 헤밍턴은 이미 그런 남자였다.
그 화끈한 삼진 쇼에 다저 스타디움이 달아올랐다.
보통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을 달아오르게 하는 것은 타격전이다. 실제로 야구는 더 화끈한 타격전이 벌어질 때 더 높은 인기를 보여줬다. 하지만 마운드에 선 투수가 이토록 특별하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이 달아오른 야구장에 열기를 더하기 위하여 다저스의 캡틴이 타석에 들어왔다. 이제는 노장이라는 표현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남자.
그의 시선이 성민에게 닿았다.
처음 그의 나이를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동양인들이 젊어 보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설마 저 얼굴로 자신과 고작 여섯 살 차이밖에 나지 않다니.
하지만 부러운 것은 주름 없이 팽팽한 그의 얼굴 피부가 아니었다. 진짜 부러운 것은 너클볼 투수라는 특별한 위치였다.
“타자도 투수의 너클볼 투수 같은 그런 게 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지.”
“글쎄요. 한 번 직접 개발해보시지 그러십니까.”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퉁명한 대답에 케빈 체임벌린이 웃었다.
“나중에 은퇴하면 시간도 많을 테니 정말 그래 볼까? 혹시 알아? 내가 그런 걸 개발하면 1호 수혜자가 자네가 될는지.”
“어휴, 전 됐습니다. 때 되면 빨리 은퇴해서 벌어놓은 돈이나 알차게 쓰고 싶네요.”
“글쎄, 또 막상 때가 되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르지.”
만 37세의 타자 케빈 체임벌린은 은퇴를 앞둔 노장이다.
하지만 6년 후 만 37세의 너클볼 투수 김성민은 어떨까?
케빈 체임벌린이 고개를 저었다.
월드시리즈 1차전.
지금은 그런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다.
지난 올스타전에서 압도적인 포스를 뽐내던 디아고 헤밍턴을 침몰시킨 것은 Mr. 양키스인 리암 루카스였다.
돌이켜보면 그와 리암 루카스는 참 많은 것이 닮았다. 비슷한 데뷔 시기. 비슷한 나이. 각각 리그를 대표하는 명문 팀의 핵심 선수로 원클럽맨이라는 점까지. 덕분에 젊은 시절부터 케빈 체임벌린은 그에게 상당한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물론 케빈 체임벌린과 리암 루카스를 비교한다면 백이면 백 리암 루카스 쪽에 손을 들어주리라. 실제로 공신력 있는 야구 사이트 두 곳 모두 리암 루카스의 WAR을 1할 정도 높게 보고 있다.
이제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그것은 이제 뒤집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우승은 다르다.
결국, 스포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승이다. 커리어의 마지막, 캡틴이라는 이름을 걸고 2년 연속, 혹은 3년 연속 우승을 기록하고 화려하게 은퇴한다? 그리고 그 우승의 주역이 케빈 체임벌린 본인이다?
마운드의 투수가 투구 자세에 들어갔다.
리암 루카스가 Mr. 양키스라고 불리는 것은 가장 중요한 순간에 빛났기 때문이다. 케빈 체임벌린이 캡틴이라고 불리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긴 시간 그 명문 팀의 기둥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선수가 감당할 수 없는 중압감과 책임감을 이겨낼 정신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방증이었다.
큰 무대.
많은 관객.
마운드에는 최고의 투수.
긴 시간, 내셔널리그의 주인공이었던 사나이가 성민의 공을 기다렸다.
4층의 박동엽이 오페라글라스를 들었다.
전체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성민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그 궁금증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직전 이닝, 상대 투수가 압도적인 활약을 펼친 직후다. 타석에 들어온 타자는 박동엽이 아직 학생이던 시절, 그리고 성민이 이제 막 프로가 됐던 시절 이미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로 이름을 날리던 남자다.
과연 성민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영감님, 이 타이밍에는 방심하지 말라고 잔소리하셔야죠. 한 방이 있는 타자 아닙니까.’
필 니크로는 답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성민의 심장은 평소보다 아주 조금 빠르게. 하지만 아주 담대하게 뛰고 있었다. 전신의 신경을 오가는 전기 신호 역시 눈부셨다. 그의 모든 것이 타석의 타자를 분석하고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필 니크로에게 거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성민 스스로가 더 강하게 집중하기 위한 일종의 루틴이다.
지난 양키스전.
에노모토 코이치를 상대로 보여줬던 그 완벽한 너클볼이 또 한 번 성민의 손에서 구현됐다. 필 니크로의 시선이 야구공을 따라 흔들렸다.
과연 결과는 어떨까?
아메리칸 리그를 대표했던 타자인 리암 루카스는 가장 완벽했던 날의 디아고 헤밍턴이 던진 그 완벽한 공을 두들겨 홈런으로 만들어 냈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리그를 대표했던 타자란 그런 존재다.
내셔널리그를 대표했던 타자인 케빈 체임벌린의 방망이가 성민의 공을 향해 움직였다.
그것은 나이를 먹어가며 가장 좋았던 시절의 몸을 잃어버리고, 그 잃어버린 능력에 맞게 타격폼을 수정하고 다시 꾸역꾸역 메이저리그에서 버텨 나가는 노장의 관록이 담긴 스윙이었다.
-딱!!
높게 뜬 타구.
약 0.1초.
케빈 체임벌린이 생각했다.
역시 이건 다 다저 스타디움이 투수 구장인 탓이라고.
‘젠장,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손해라니까. 구장 보정인지 뭔지를 감안하더라도 내가 리암 그 녀석보다 1할이나 적은 게 말이 돼?’
담장에 살짝 미치지 못하는 외야 플라이.
성민의 공이 다저스의 타자들을 요리했다.
“이봐, 아까부터 그 망원경으로 뭘 그리 열심히 보는 거야? 경기장은 공연장이 아니라고. 조금 더 현장의 분위기를 느껴야지.”
“응? 아저씨도 이걸로 보고 싶다고요?”
“하지만 뭐 빌려준다면 고맙게 보도록 하지. 어이쿠. 이거 선수들 표정이 바로 코앞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네? 이건 작년에 덕아웃 바로 뒤편 가장 비싼 좌석에서 경기를 직관했던 때가 떠오르는군.”
디아고 헤밍턴의 투지 넘치던 얼굴과는 달랐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담담함. 하지만 성민과 제법 긴 시간 함께 뛰었던 동엽은 왠지 알 수 있었다. 그 담담한 표정 속에 담긴 흥분, 즐거움.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아쉬움을.
경기가 흘러갔다.
디아고 헤밍턴은 그야말로 힘으로 타자를 윽박지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줬다. 처음에는 아니, 다저 스타디움에서는 평균자책점이 0.97이라니 그건 대체 뭐 하는 괴물이야? 라고 외치던 랄로 가야르도는 두 번째 타석에서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난 직후.
“으음, 이해했어.”
“뭘? 공략이라도 떠오른 거야?”
“아니, 어떻게 0.97이었는지를 이해했다고. 올스타전에서 루카스 아저씨가 했던 거 그거 역시 완전 뽀록 맞네.”
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성민 역시 만만치는 않았다.
다저스 덕아웃의 선수 중 입 밖으로 말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그 표정들이 말하고 있었다.
‘거봐, 내가 예전부터 이야기했지? 저 자식 괴물이라고. 저거 트레이드로 내보내는 거 진짜 멍청한 짓이라고.’
타자들이 제대로 된 타격을 하지 못하는 경기가 빠르게 흘러갔다.
타순은 이미 두 바퀴를 돌았다.
하지만 벌써 7회.
그리고 경기가 시작된 지는 고작 1시간 37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 최강의 팀(5)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