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56화 (257/287)

< 최강의 팀(4) >

다시 말하지만, 동엽이 있는 곳은 4층이다.

어지간한 공연도 4층에서 보면 까마득하다. 하물며 이곳은 5만6천석 규모의 다저 스타디움이다. 심지어 4층도 그냥 4층이 아니다. 외야 폴대 근처의 가장 안 좋은 4층 자리다. 여기서 페데리코 수는 엄지손톱보다 더 작게 보인다. 차라리 관람을 위해서는 집에서 TV로 보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동엽은 이 플레이 한 번을 본 것만으로도 직관 오기를 잘했다고 느꼈다.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플레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타격의 순간부터 움직이기 시작한 유격수의 반응. 그리고 그를 커버하는 이루수의 움직임까지. 더 멀리, 더 높은 곳에 있었기에 그 전체적인 움직임이 한눈에 들어왔다.

과연 내가 저 자리에 서 있었다면 저런 플레이를 할 수 있었을까?

동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쩌면 할 수도 있다.

단 연습에서 부담 없이 그리고 이런 종류의 플레이를 할 것이라 미리 예상을 하고 움직였을 때.

실전에서? 그것도 월드시리즈 1차전. 1회 초에. 저런 도박적인 플레이를? 이건 그냥 실패하고 주변에 욕을 먹을까 걱정되는 게 문제가 아니다. 큰 경기의 중압감, 그리고 실패했을 때 느낄 자괴감을 생각하면 몸이 느려질 수밖에 없다.

페데리코 수.

동엽이 현역 최고의 유격수. 아니, 어쩌면 과거를 줄줄이 소환한다고 해도 역대 최고 수준의 기량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유격수의 플레이를 머릿속에 깊이 새겼다.

그리고 마운드에 그가 올라왔다.

[1회 말 다저스의 공격. 마운드에 김성민 선수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작년 월드 시리즈 MVP. 다저스 우승의 1등 공신이었죠. 작년에 그 든든했던 투수를 이제 적으로 만나는 다저스 팬들의 심정도 참 씁쓸하겠네요.]

[사실 작년 3년 6,600만 달러에 계약을 맺을 때만 하더라도 오버페이라는 말이 참 많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오히려 정말 염가에 봉사하고 있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다저스 입장에서는 월드시리즈 우승에 1등 공신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6,600만 달러치는 다 해줬다고 봐야겠죠. 정말 꾸준히 월드시리즈에 진출만 하던 팀 아닙니까. 사실 작년에도 김성민 선수가 없었다면 우승을 했을지는 의문이고요.]

[이번 시즌. 2년 남은 김성민 선수를 대신해서 에밀리오 가르시아라는 젊은 선발 투수와 필립 탱고라는 최고의 3루 유망주를 데리고 왔던 다저스!! 사실 이 트레이드가 실패인지 성공인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저 선수들이 어떻게 성장할지는 모르니까요. 다만, 이번 월드 시리즈. 만약 김성민 선수로 인해서 다저스의 우승이 실패한다면. 앞으로 저 선수들이 어떻게 성장하건 간에 이 트레이드는 실패라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결국, 메이저리그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최후의 우승 뿐이니까요.]

박동엽 옆에 앉아있던 수다쟁이 아저씨가 마운드에 오른 성민을 보고 떠들었다.

“한국인이라니까 잘 알겠지. 정말 작년에 월드 시리즈는 대단했어. 나도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사업이 잘돼서 여기 이런 자리가 아니라 저기 아주 좋은 자리에서 경기를 봤었지. 원정까지는 따라가지 못했지만 홈에서 열리는 경기는 모조리 챙겨봤단 말이야. 후, 케빈 맥밀란 이 멍청한 자식은 무슨 영광을 볼 거라고 저런 선수를 내주고 애송이들을 데리고 온 건지. 뭐, 필립 탱고는 좋은 녀석이지만 어디 사이 영 위너에 비길 수 있으려고.”

물론 여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꼬레아, 그리고 성민뿐이었다. 그나마 성민이라는 발음도 실로 기묘하여 대충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흥분하여 떠드는 모습이 안 좋은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저 선배가 한국에서 저랑 같이 뛰었거든요. 저도 야구 선수에요. 그때도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하, 이렇게 보니까 정말 클래스 차이가 어마어마하네요.”

어차피 상대도 자기가 알아듣지 못할 말로 떠들고 있었다. 동엽이 그냥 한국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성민이 고개를 돌려 객석을 바라봤다.

5만 6천석. 무려 4층까지 올라간 스타디움이 가득 찼다. 바로 작년까지 홈으로 쓰던 구장이지만 느낌이 달랐다. 당시만 하더라도 그의 승리를 바라던 팬들이 이제는 패배를 바라고 있었다.

-최고의 무대로구나.

필 니크로의 이야기에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의 무대.

최고의 적수.

필 니크로가 그가 봤던 모든 투수 가운데 그보다 확실히 낫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인정한 상대다. 라이브 볼 시대의 역사 그 자체인 사람 입에서 나온 이야기다. 야구의 기술이라는 것이 꾸준히 발전해왔음을 고려할 때, 시대를 보정해서 본다면 객관적인 기량으로는 역사상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금상첨화다.

-아주 단단히 각오를 한 것 같더구나.

‘뭐, 녀석도 녀석 나름대로 사정이라는 게 있을테니까요. 그래도 덕분에 더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더 좋다고?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 안 그래도 무서운 상대 투수가 인생투를 펼치려는 것 같은 상황이?

‘어차피 녀석을 상대하는 건 제가 아니잖습니까. 그건 저기 뒤에 서 있는 녀석들에게 맡겨둘 문제죠. 어차피 제가 상대할 건 저기 저 녀석들이니까요.’

-오늘은 너도 타석에 서는 날인데?

‘에이, 투수의 타석에 뭘 기대하면 그게 도둑놈이죠.’

-그렇다고 하기에는 이전 경기에서 유일하게 타점을 올린 건 너였던 것 같다만.

‘우리 애들도 이제 많이 좋아졌거든요.’

경기 직전의 긴 사담.

뭔가 몇 년 전 마린스를 옹호하던 성민을 보는 것 같았다. 당시 뺀질뺀질하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라 필 니크로가 미소 지었다. 역시 이 녀석은 모든 것이 갖춰진 팀보다 이렇게 어딘가 허술한 팀에서 더 빛난다.

물론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속이 터질 것 같지만.

타석에 마르타 블랑코가 올라왔다.

[다저스의 1번 타자. 마르타 블랑코 선수가 올라옵니다. 이 선수도 이번 시즌 성적이 굉장히 좋죠?]

[작년만 하더라도 플루크라는 말도 있었습니다만, 이건 그냥 브레이크 아웃, 그러니까 기량이 만개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시즌 0.288/0.401/0.521. 홈런만 28개를 쳤어요.]

마르타 블랑코는 본래도 준수한 선수였다. 하지만 작년 이후로는 거의 MVP에 도전할만한 선수로 성장했다. 33세라는 비교적 많은 나이를 생각하면 거의 가능성은 없었지만 이대로 5, 6년만 지금처럼 더 활약해준다면 명예의 전당도 노려볼만한 성적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실수인 것 같단 말이지.”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저 녀석을 보스턴으로 보낸 것 말이야. 케빈은 좋은 단장이지만 너무 미래를 봤어. 차라리 올해와 내년 바짝 달려서 역사에 남을 팀을 만드는 게 본인 명성에도 훨씬 좋은 일이었을텐데 말이지.”

하지만 그런 선수조차도 올해의 성민은 부담스러웠다.

이번 시즌 4월과 7월. 두 차례 성민을 상대했지만 모두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이 무대는 월드 시리즈. 그리고 마르타 블랑코는 경기를 여는 1번 타자다. 마냥 약한 소리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좋은 수비 뒤에는 좋은 공격이 따른다.’

마르타 블랑코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물론 페데리코 녀석의 수비가 워낙에 빛났던 탓에 살짝 묻힌 감이 있었지만, 마르타 블랑코의 커버가 있었기에 그 수비가 빛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날아오는 공을 맨손으로 잡아서 그대로 정확히 던진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초구 와인드업.

다저스에 있던 시절보다 한층 더 느긋해진 폼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다저스에 있던 시절보다 더 치명적이다.

81.9마일 빠른 너클볼이 날아왔다.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공.

시즌 28개의 홈런을 만들어 낸 방망이가 힘차게 움직였다.

-딱!!

손끝이 얼얼하다. 완벽하게 빗맞았다. 1루 파울라인을 크게 넘어가는 공. 다행이다. 그래도 공 하나에 아웃은······.

“아웃!!”

보스턴의 일루수 랄로 가야르도가 해맑게 웃는 표정으로 미트를 높이 치켜들었다. 마르타 블랑코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육두문자가 튀어나왔다. 아니 저 공을? 자신이나 페데리코 수라면 모를까 저건 케빈 체임벌린이라도 못 받을 공이었다. 그런데 수비 못 하기로 유명한 보스턴의 일루수가 저걸 받는다고?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마르타 블랑코가 허탈한 웃음과 함께 물러났다.

-뭐지? 지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거지?

필 니크로가 혼란에 빠졌다.

랄로 가야르도가 방망이로 성민을 도와주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방망이가 없을 때 랄로 가야르도는 그냥 머저리 아니었나? 이건 마치 박동엽이 평범한 내야땅볼을 안정적으로 병살타로 만드는 장면을 본 기분이다.

‘아이참. 얘들도 발전이라는 걸 했다니까요. 뭐 그걸 감안해도 방금 저건 놀랍긴 하지만요.’

경기를 지켜보던 박동엽이 ‘그래, 내야수라면 당연히 저 정도 수비는 해야지. 하물며 메이저리그인데. 저건 솔직히 내가 뛰어도 잡을 수 있는 공이겠다.’라는 필 니크로가 듣는다면 ‘그래도 넌 명색의 유격수고······. 아니, 근데 진짜 받을 수 있는 건 확실하냐?’라고 되물을만한 생각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는 2번 타자 세실리아 마토스 역시 내야땅볼로 물러났다. 다저스의 페데리코 수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루시 알베리 역시 나쁘지 않은 유격수였다. TV로 보던 것보다 훨씬 깔끔해보이는 플레이에 동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시 저런 게 현실적인 수비지.”

그리고 타석에 다저스의 3번 타자 에드 맥밀란이 올라왔다.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그에게 인사했다.

“오래간만이군.”

“그러게. 근데 이것보다 더 오래간만에 보게 될 줄 알았는데 상당히 분발했더라.”

“뭐, 에이스가 워낙 훌륭해서 말이야. 글쎄 작년 월드시리즈 MVP라지 뭐야? 어느 팀의 어떤 투수랑은 다르게 큰 경기에 매우 강한 모양이더라고.”

“흥, 큰 경기에 강한 투수라니. 그런 미신을 믿는 거야?”

“30년 전에는 프레이밍도 미신이었지. 아마 그 시대였다면 난 7년 2억 같은 건 상상도 못 했겠지.”

“젠장, 하여간 항상 입은 잘 살아 있다니까. 난 대체 왜 매일 손해 보면서 네 녀석만 보면 말을 섞고 있는 건지.”

에드 맥밀란이 투덜거리며 방망이를 쥐고 성민을 바라봤다.

확실히 아쉬웠다. 하지만 그 아쉬움에 함몰될 생각은 없었다. 분명 성민은 좋은 투수였다. 아마 역사를 통틀어도 현재의 그와 비교해서 우위에 설 수 있는 투수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오늘 우리 선발이 그 거의 없는 투수 중 하나네?’

게다가 팀 전체를 보면 또 어떤가.

그 엉망진창이던 팀을 고작 1년 만에 월드 시리즈까지 올린 것에는 박수를 칠 만하다. 보스턴의 단장인 존 맥도웰은 아주 큰 일을 해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에드 맥밀란은 확신할 수 있었다. 팀 전체의 힘으로 봤을 때 보스턴은 다저스에 미치지 못 한다. 그렇기에 오늘 승리하는 팀은 필연적으로 다저스다.

성민이 가볍게 공을 움켜쥐었다.

야구에서도 물론 팀은 중요하다. 하지만 야구는 농구, 축구, 미식축구와는 다르다. 실시간으로 유기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그 스포츠들과 달리 야구의 시작은 심플하다.

투수와 타자.

역사를 통틀어 우위에 설 수 있는 투수가 거의 없는 남자가 힘차게 공을 뿌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타석에 선 남자는 역사까지 갈 것도 없이 현역만 뒤져보더라도 우위에 설 수 있는 타자가 매우 많은 남자였다.

초구.

60.1마일 느린 너클볼

-부웅!!

“스트라이크!!”

< 최강의 팀(4)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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