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강의 팀(3) >
메이저리그의 표는 비싸다. 포스트 시즌은 더 비싸고 그중에서 월드 시리즈는 더욱더 비싸다. 하물며 개막전은 말할 것도 없다.
정가로는 당연히 구할 수 없다. 한국과 다르게 미국의 경우 매크로를 사용한 구매는 불법이지만 티켓의 재판매는 합법이다. 가격 역시 상한이 없다.
이번 개막전 덕아웃 바로 뒷좌석의 경우 평균 2만 5천 달러라는 터무니없는 시세가 형성됐다. 권 여사와 프레스톤 윌슨 감독. 그리고 조이 제임슨이 성민을 응원하기 위해 그곳을 찾았다.
“후, 이거 진짜 빡세네.”
그리고 3루와 외야의 경계 지역 4층.
다시 말하지만 3층도 아닌 4층. 선수들의 플레이는커녕 세세한 모습조차 까마득하게 보이는 바로 그곳에 동엽이 있었다. 양쪽 눈 시력이 2.0임에도 불구하고 손톱보다 작은 선수들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내가 살다 살다 오페라글라스를 야구를 보려고 가지고 오게 될 줄은 몰랐네.”
현대인이라면 검색은 기본이다.
이미 인터넷을 통해 사건 뷰 등을 파악한 동엽이다. 경기 중에는 써먹기 힘들겠지만, 경기를 준비 중인 타이밍에 선수 얼굴이라도 직접 보려면 오페라글라스 정도는 들고 와야 한다는 팁은 이미 알고 있었다.
“후, 진짜 이 사람들은 떼돈 벌겠다. 이런 자리 푯값으로 90만 원이나 줬는데 저기 불펜 뒤편 같은 곳은 진짜 몇백만 원 할 거 아니야.”
동엽의 경우 티켓 재구매 사이트에서 최저가 정렬을 한 덕분에 몇백을 넘어 몇천 단위라는 사실은 알 수 없었다. 동엽이 앉은 4층 D급 좌석과 성민의 가족들이 앉은 불펜 뒤편 A급 좌석의 간격은 그만큼 까마득했다.
주변은 상당히 시끄러웠다. 미국의 경기장 문화는 한국보다 많이 더 정숙하다고 들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 느낌이다. 게다가 말이 너무 빠른 탓일까? 영어 공부를 제법 한 것 같은데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꼬부랑말들이 동엽의 귀를 쉴새 없이 때렸다.
“오, 젊은 친구. 여행 중인가? 한국? 중국? 일본?”
옆자리의 아저씨가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다. 물론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중에서 한 가지 꼬레아 라는 단어는 귀에 탁 들어왔다.
“예스!! 예스. 아임 프롬 코리아.”
청국장 냄새나는 구수한 발음이었지만 어차피 영어를 제대로 못 하는 것은 동엽 옆자리의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권자였지만 라틴 커뮤니티에서만 자라나 딱히 영어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대화가 통하지 않는 두 남자의 경기 직관이 시작됐다.
“마운드에 디아고 헤밍턴이 올라오는군. 어서 그 망원경으로 보라고. 자네 운이 참 좋은 거야. 월드 시리즈 1차전에 등판하는 디아고 모습을 직관하다니. 나중에 두고두고 자랑해도 괜찮을 거야. 뭐 나야 내 자랑은 아니지만, 디아고와는 나름대로 인연이 좀 있지. 사실 우리 아버지의 사촌 형의 동네에서 함께 컸던 첫사랑이 저 녀석 외할머니였다고 하더군. 뭐 자네도 다저스 팬이라면 당연히 알겠지만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내가 클레이튼 커쇼도 직접 봤지만 아마 이대로만 간다면 이 녀석도 거기 뒤지지 않는 선수로 남을 거야.”
“디아고 헤밍턴이네요. 성민 선배가 아주 칭찬을 칭찬을 어마어마하게 했는데. 뭐 영상으로 봤을 때도 대단해 보이기는 했는데, 어디 한 번 볼까요?”
“아, 김성민. 하긴 한국인이면 김성민을 응원할 수도 있겠군. 그 녀석도 디아고 헤밍턴만큼은 아니지만 아주 대단하지. 보스턴으로 그렇게 보낸 게 아쉬울 뿐이야. 어쨌거나 오늘 경기는 정말 박진감 넘치는 투수전이 될 거라고.”
제롬 스튜버츠가 타석에 섰다.
보스턴 타자들은 시즌 초반 디아고 헤밍턴을 한 번 상대해본 적이 있었다. 제롬 스튜버츠 역시 그때 디아고 헤밍턴을 상대했었다.
분명 당시의 그는 대단한 투수였다.
하지만 그 후로 한 시즌.
제롬 스튜버츠는 자신할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당시의 그보다 더 대단한 타자라는 것을.
굳이 칠 필요는 없다. 어떻게든 살아나가기만 하면 된다. 선두 타자의 역할이란 그런 것이다. 그의 뒤에는 매튜 쿠퍼라는 든든한 타자와 랄로 가야르도라는 괴물이 버티고 있다.
마운드의 디아고 헤밍턴이 공을 움켜쥐었다.
기이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마운드에 선 투수의 투쟁심이 18.44미터 떨어진 타석까지 전해졌다.
아니. 그럴 리 없다.
제롬 스튜버츠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건 그냥 착각일 것이다. 이건 월드 시리즈라는 큰 무대와 선두 타자라는 위치가 만들어 낸 착각이다.
초구.
95.4마일의 속구.
-부웅!!
“스트라잌!!”
방망이를 휘두르는 순간 느꼈다.
공이 떠올랐다.
라이징 패스트볼?
그럴 리가.
세상에 떠오르는 공 따위는 없다. 모든 공은 가라앉는다. 예외는 어느 95마일짜리 공을 던지는 언더핸드 투수가 던졌다는 업슛뿐이다.
이건 그냥 회전이 너무 좋아서 착시를 일으킨 것뿐이다. 뭐, 그렇게 이해를 한다고 해도 정말이지 대단한 수직무브먼트다. 생각했던 것보다 반개, 아니 3/4개는 더 높은 지점을 노려야겠다.
두 번째.
0.17초의 판단.
빠지는 공이다.
제롬 스튜버츠가 방망이를 멈춰 세웠다.
-뻐엉!!
하지만 심판의 판단은 달랐다.
“스트라잌!!”
공을 받아 낸 에드 맥밀란이 웃었다. 분명 그는 수비, 특히 프레이밍에서 에두아르도 크루즈에게 크게 미치지 못한다. 당연하다. 에두아르도 크루즈 그 괴물은 연평균 45점씩을 막아낸다. WAR로 따지자면 거의 5에 가깝다. 프레이밍 하나로 올스타급 활약을 보인다는 뜻이다. 하지만 에드 맥밀란 역시 평균 이상의 프레이밍을 보여준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의 끊임없는 향상욕. 그리고 작년 성민의 너클볼을 제대로 받기 위해 했던 노력들이 그의 미트질을 한 차원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준 덕분이다.
2034시즌 다저스 투수진의 압도적인 활약에는 분명 에드 맥밀란이 있었다.
‘생각보다 존을 더 넓게 봐야겠네.’
안 그래도 까다로운 투수인데 더 까다로워졌다. 제롬 스튜버츠가 미간을 찌푸린 채 타석에서 세 번째 공을 기다렸다.
일단 적당히 커트해내며 버텨보자. 다시 말하지만, 굳이 칠 필요 없다. 1루로 나가는 방법은 안타만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세 번째.
존을 공략하는 94.2마일의 빠른 공.
제롬 스튜버츠가 어떻게든 공을 걷어내겠다는 마음으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실수였다.
마법처럼 움직인 야구공이 배트의 얇은 부분을 가격했다.
뚝 부러진 배트. 그리고 페어 지역을 힘없이 구르는 공.
손목의 통증을 무시하고 제롬 스튜버츠가 빠르게 1루를 향해 달렸다. 하지만 디아고 헤밍턴의 커버가 조금 더 빨랐다.
-뻐엉!!“아웃!!”
공 3개 만에 아웃.
대기 타석에서 걸어오는 매튜 쿠퍼를 향해 제롬 스튜버츠가 몇 가지 조언을 건넸다. 매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아도 디아고 헤밍턴의 무서움 정도는 알고 있다.
제롬 스튜버츠야 시즌 초반 인터 리그에서 그를 상대해본 것이 전부다. 하지만 매튜 쿠퍼는 아니었다.
그는 지난 올스타전을 기억했다.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그날 역시 감히 자기 공에 스치는 것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포스를 자랑했었다.
‘하지만 그래놓고 홈런 처맞았었지. 그것도 다 늙은 영감님한테.’
물론 매튜 쿠퍼 본인이 폭풍 삼진으로 물러난 기억은 굳이 되살리지 않았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듣고 좋은 것만 기억하기에도 짧은 게 인생이다. 그런 슬픈 추억을 굳이 되새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마운드의 투수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매튜 쿠퍼에게 강제로라도 지난 올스타전의 추억을 되살려 주겠다는 기세로 공을 뿌렸다.
초구 빠른 공 파울.
그리고 두 번째
-부웅!!
“스트라잌!!”
체인지업에 완전히 타이밍을 뺏겼다. 매튜 쿠퍼가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장갑을 동여맸다. 0-2의 카운트가 신경 쓰였지만, 남자라면 짜잘하게 볼카운트 같은 거 신경 쓰는 거 아니다. 스트라이크 많이 넣었다고 홈런 안 처맞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홈런이면 0-2 터지는 홈런이 더 시원한 법이다.
세 번째.
디아고 헤밍턴이 특유의 역동적인 폼으로 공을 뿌렸다. 마지막까지 등 뒤에 가리고 있던 손이 놀라운 속도로 귀 뒤에서 뽑혀나왔다.
공을 판단할 0.2초의 시간?
그거야 정상적인 투구폼과 타이밍을 가진 투수의 이야기고, 저런 더러운 디셉션을 가진 투수는 그거보다 훨씬 까다롭다.
하지만 그런 거 꼼꼼하게 따지는 건 제롬 스튜버츠 같은 쫌생이나 하는 짓이다. 대충 어디로 오는지 알았으면 남자답게 시원하게 한 방!!
매튜 쿠퍼의 방망이가 힘차게 움직였다. 그것은 제대로 맞기만 한다면 무조건 담장 밖을 보장하는 강력한 힘이 실린 스윙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0.1초 뒤.
아, 망했다.
이상함을 깨달았지만, 너무 늦었다. 매튜 쿠퍼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가 던진 공이 너무 강력했던 것뿐이다. 어마어마한 터널링 구간. 마치 속구처럼 날아오던 디아고 헤밍턴의 공이 방향을 튼 것은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홈플레이트 코앞이었다.
-부웅!!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90마일짜리 예리한 슬라이더에 시원한 헛스윙.
삼구삼진.
다저 스타디움이 끓어올랐다.
특히 동엽이 경기를 지켜보던 4층. 그나마 비교적 싼 푯값 덕분에 야구를 좋아하는 라티노들이 가득한 그곳은 그야말로 시장바닥처럼 시끄럽게 달아올랐다. 특히 동엽의 옆자리에 있던 아저씨는 삼구삼진 하나에 마치 경기에서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동엽은 멍하니 디아고 헤밍턴의 피칭을 바라봤다.
사실 영상으로 보는 것과 큰 차이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영상 쪽이 더 생생했다. 거리가 좀 멀어야 뭐 현장감이 느껴지지 이건 정말 망원렌즈라도 동원해서 봐야 할 거리였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저 위대한 투수의 비장함이 그의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같은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솔직히 부러웠다.
저 자리에 서고 싶다.
욕심이 스멀스멀 뱃속에서 기어 나왔다.
그리고 타석에 보스턴의 3번 타자.
자타가 공인한 천재. 랄로 가야르도가 올라왔다.
매튜 쿠퍼와 마찬가지로 그의 얼굴에서 긴장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달랐다.
‘녀석이라면.’
매튜 쿠퍼의 그것이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마인드 컨트롤로 만들어 낸 평안이라면 랄로 가야르도의 그것은 그야말로 타고난 재능 그 자체였으니까.
아니, 애초에 매튜 쿠퍼의 모습은 그가 태어나 목격한 가장 뛰어난 재능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했다.
방망이를 쥐고 자연스럽게 타석에 섰다.
수많은 연습으로 만들어 낸 자신의 스윙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은 순수함. 그리고 그 스윙을 시즌 내내 지켜나갈 수 있는 철두철미함.
마운드의 투수가 와인드업했다.
초구.
94.3마일 빠른 공.
지켜보고 어쩌고도 없었다.
랄로 가야르도의 방망이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빠르고 강하고 아름답게.
-딱!!
커터, 그것도 매우 잘 던진 커터였다. 제대로 얻어맞지는 않았다. 빗맞은 타구. 하지만 젊은 천재의 탄력 넘치는 근육이 만들어 낸 힘은 어마어마했다. 그야말로 쏜살같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타구가 날아갔다.
마운드의 디아고 헤밍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보스턴 덕아웃의 선수들이 안타를 직감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현실을 부정했다.
만약 타구의 방향이 오른쪽이었다면 이건 무조건 안타였을 것이다. 하지만 타구가 향한 곳은 2루와 3루 사이. 그리고 그곳에는 종종 필드 위에서 마법을 부리는 유격수 페데리코 수가 서 있었다.
성큼성큼 왼쪽 대각선 뒤편으로 세 걸음. 왼팔을 길게 뻗은 채 몸을 날렸다. 바닥을 한번 찍고 살짝 튀어 오르는 공을 향해 정확하게 글러브의 높이를 맞춘다. 3차원으로 움직이는 세상이 그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뻐엉!!
쭉 뻗은 글러브에 공이 정확하게 틀어박혔다. 랄로 가야르도는 이미 1루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일어서서 공을 던진다면 늦는다. 하지만 그와 호흡을 맞추는 콤비는 그가 종종 마법 같은 플레이를 한다는 것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정확한 위치.
페데리코 수의 글러브 낀 왼쪽 손목이 강하게 튕겼다. 글러브에서 아직 회전이 다 사라지지 않은 공이 떠올랐다. 하지만 페데리코 수 만큼은 아니더라도 마르타 블랑코 역시 어디 가서 수비로 뒤지는 남자는 아니다. 슬쩍 떠오른 공을 맨손으로 강하게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뻐엉!!
“아웃!!”
그 대단한 수비에 경기를 지켜보던 많은 보스턴 팬들이 안타까움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저 스타디움의 4층.
“이런 미친?”
마법 따위 모르는 정직한 유격수 박동엽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 최강의 팀(3) > 끝
ⓒ 묘엽
작가의 말
이름 : 박동엽
포지션 : 유격수(물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