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54화 (255/287)

< 최강의 팀(2) >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도 괜찮은데. 내가 듣기로는 막 이런 큰 경기 앞둔 투수는 하루 전부터 컨디션 관리하고 그런다던데. 어차피 어머님이랑은 예전에 인사도 한 번 했고 그냥 나 혼자 나가도 괜찮아.”

“걱정하지 마. 나는 이런 게 다 컨디션 관리니까. 데이터는 쉬는 동안 아주 인이 박일 만큼 머릿속에 집어넣었고, 이대로 집에서 혼자 앉아서 청승맞게 내일 경기 생각하느니 이렇게 누구 만나는 게 훨씬 좋아. 게다가 어차피 내일 경기 있다고 오늘 저녁밥 안 먹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현재 윌슨 감독과 권 여사는 미국에서 있을 결혼식을 준비 중이었다. 미국과 한국. 양국의 결혼식 문화는 매우 달랐지만 같은 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 준비가 매우 고되다는 점, 그리고 신부가 해야 할 일이 아주 많다는 점이었다. 특히나 미국의 경우 권 여사는 딱히 지인이라고 할 사람도 없는 신세였다. 프레스톤 윌슨이 이래저래 더 많이 신경 써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평생 야구만 해온 남자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고마워.”

“알면 잘하시던가. 라고 하기에는 이미 너무 잘 하고 있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잘 해줘야 해. 잡힌 물고기라고 방심하지 말고.”

“잡힌 건 인정하는 거야?”

“원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아니, 나한테 잡힌 게 문제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필 니크로가 흐뭇한 미소로 두 커플의 티격태격을 바라봤다. 누군가에게는 조금 드센 여자겠지만 성민이 녀석에게는 딱 들어맞는 좋은 짝이다.

게다가 마음 씀씀이 역시 훌륭했다. 권 여사가 미국에서도 결혼식을 올린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녀는 메이드 오브 아너를 자청했다. 그것은 아들인 성민이나 피앙세인 윌슨 감독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메이드 오브 아너란 신부 들러리 가운데 우두머리 정도 되는 역할이다. 미국의 결혼식에서 메이드 오브 아너가 해야 하는 일은 정말 많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한국에서 웨딩플래너가 하는 일들 대부분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아직 젊은 나이였지만,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사교계에서 몇 년간 활동했던 그녀는 정말 놀라운 안목과 인맥으로 권 여사의 결혼 준비를 도왔다.

물론 그만큼 청구서에 적힌 숫자는 매우 놀라운 숫자였지만, 보통 사람이 아닌 권 여사는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애초에 프레스톤 윌슨이라는 남자는 매일 저지에 야구모자나 쓰고 다니는 행색과 달리 전설적인 커리어를 쌓은 전직 프로선수이자 대단한 부호였다. 그의 결혼식에 걸맞은 ‘격’을 생각한다면 그녀의 기준에서 0이 하나나 둘 정도 더 붙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밴드도 훌륭하고, 무엇보다 음식이 정말 대단해요. 처음 먹어보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물론 지금 여기 요리도 훌륭하지만 정말 기대해도 좋을거에요.”

“그 요리사 허버트가 소개해준 사람인데, 요즘 정말 잘나가는 사람이거든요. 운이 좋았어요. 본래는 이런 식으로 출장은 잘 안 하는데 최근에 자기 가게 개업하려고 건물 리모델링 중이라서 부탁할 수 있었어요.”

두 여자의 수다에 윌슨 감독과 성민이 그저 어색하게 시선만을 나누며 침묵했다. 물론 굳이 이야기 끼려면 얼마든지 낄 수는 있었다. 성민은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남자였으니까.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대화에는 굳이 끼어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참, 윌슨 감독님. 베스트 맨으로 강진호 선수 부르신다면서요.”

“선수는 무슨. 진작에 은퇴해서 이제는 그냥 동네 백수지. 백수 주제에 뭐가 그리 바쁜지 매일 비행기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나 하고 말이야. 내 결혼식 준비나 진득하니 하면 될 것을. 다리도 불편해서 지팡이 짚고 간신히 걸어 다니는 주제에 하여간.”

“덕분에 제3 세계랑 인도, 동남아 쪽에도 야구 인기가 조금씩 늘고 있잖습니까. 듣기로는 잘하면 다음 올림픽에 야구가 포함될 수도 있다고 하던데요.”

“뭐, 인도 인구가 워낙 깡패니까. 게다가 걔들은 원래 크리켓이라고 야구랑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공놀이 하던 애들이잖아. 뭐 내가 보기엔 럭비랑 미식축구 이상으로 크게 차이가 나는 것 같지만 말이야.”

“두 스포츠를 통합하긴 힘들겠지만, 그래도 거부감 없이 시청할 수는 있으니까요. 게다가 크리켓은 야구보다 훨씬 느긋한 스포츠라서 그 사람들은 야구를 박진감 넘치는 크리켓 정도로 생각한다니까 지금 같은 방식의 홍보가 나쁠 건 없죠.”

평생 야구만 해온 남자들이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결혼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결국 야구로 흘러갔다.

“호세, 그 멍청한 자식은 글쎄 나를 따라오겠다고 헛소리를 하지 뭔가. 평소에는 매일 똥차가 물러가야 자기 자리가 생긴다고 떠들던 녀석이 말이지.”

“그만큼 감독님을 좋아하는 거겠죠.”

“좋기는. 정작 메츠 감독 자리를 앞두니까 쫄은 게지. 선수 시절에도 항상 그랬어. 데이빗이 있을 때는 자기가 캡틴을 해야 하느니 뭐니, 헛소리만 하던 녀석이 정작 데이빗이 부상으로 빠르게 은퇴하니까 아주 사색이 돼서는······.”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메츠 감독 자리가 무서우면 따라와도 괜찮다고 이야기했지. 대신 데이빗을 넘을 기회를 다시는 얻지 못할 거라고.”

“조금 삐지셨겠는데요?”

“조금 삐지다니. 아주 단단히 삐졌어.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더니 내 결혼식에도 안 올 거라고 큰소리 빵빵치고 사라졌어.”

“호세 코치님이면 감독님이 마지막까지 고민했던 베스트맨 후보 아닙니까? 그룸스맨이 결혼식을 안 올 거라고 했다고요?”

“아냐, 한 20분 있다가 슬그머니 나타나서는 이번에 새로 생긴 여자친구 자리까지 두 자리 달라고 이야기하고 갔어. 그 시절 애송이 녀석들이랑 같은 테이블로 해달라고하더군.”

성민이 웃었다.

저 정도면 나이를 떠나 정말 좋은 친구다. 뭐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하다. 선수 커리어 가운데 근 15년을 함께 했고, 은퇴하고는 감독과 선수로, 그리고 감독과 코치로 또 10년을 함께 했다.

야구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두 남자를 바라보며 권 여사가 웃었다. 그리고 조이를 향해 말했다.

“아마 나중에 성민이도 저럴 거예요. 그 때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에이, 섭섭하기는요. 저야 좋죠. 결혼식 제 마음대로 하는 건데요.”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며느릿감······, 아니 성민의 배필로 딱 좋은 여자다.

월드 시리즈 1차전.

2034시즌의 사이 영이 확실시되는 두 투수의 맞대결까지 남은 시간은 약 19시간. 오래간만에 보내는 가족 간의 저녁 식사가 그렇게 흘러갔다.

그리고 LA 공항.

한국에서 중국 선양으로. 그리고 거기서 중국남방항공 미주노선을 타고 다시 LA로. 급박한 와중에도 인터넷 최저가를 알뜰하게 활용해서 마침내 박동엽이 미국 땅을 밟았다.

“이곳이 미국인가?”

외국이라고는 일본과 대만. 그것도 스프링트레이닝의 목적 때문에 단체로 밟아본 적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엽은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몸 속에서 용솟음 치는 것을 느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미국과 왠지 잘 맞는 느낌이다.

그리고 정확히 1시간 40분 뒤.

동엽은 느낌은 그냥 느낌일 뿐,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며 아무리 찾아도 발견할 수 없는 미리 예약해둔 숙소를 찾아 하염없이 헤매고 또 헤맸다.

***

최근 몇 년.

LA 시민에게 월드 시리즈는 거의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2034시즌. 월드 시리즈를 앞둔 LA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승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갈망.

물론 모든 팀은 우승에 대한 갈망이 있다. 하지만 작년의 우승팀이자 지난 몇 년 동안 꾸준히 우승 후보로 손꼽혀온 다저스가 이토록 강한 갈망을 가진 데는 이유가 있었다.

본래 시험에 떨어질 때도 아예 엄두도 안 나는 점수로 떨어지면 아쉽지도 않다. 하지만 0.1점 차이로 떨어진다면? 그 아쉬움은 두고두고 남는다. 지난 몇 년, 다저스는 꾸준히 월드 시리즈에 진출했지만, 번번이 우승에는 실패했다.

아쉬움이 진하게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번만큼은 다르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강하다.

올해야 말로!!

이제는 기대보다는 ‘이번에도 또 그러겠지.’ 하는 체념이 깃들려는 찰나. 마침내 작년 그들은 우승을 차지했다.

‘꾸준한 우승 후보.’

‘모든 우승한 팀이 다저스를 만난 것은 아니지만, 다저스를 만난 모든 팀은 우승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 조롱들을 뒤집기에 그리고 그 길었던 갈증을 채우기에 한 번은 너무 적었다.

그리하여 올해. 다저스는 작년보다 더 대단한 페이스로 정규시즌 우승을 차지했으며 디비전과 챔피언십 시리즈를 격파했다.

푸른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다저 스타디움으로 들어왔다.

-여기도 오래간만이군.

‘올해 초에 한 번 왔었으니 반년쯤 됐네요.’

시즌 초.

다저스와의 인터리그 경기에서 성민은 8이닝 무자책 3실점을 기록하며 패배했었다. 그리 유쾌한 기억은 아니었다.

연패를 거듭하던 팀.

0:0 상황.

그 상황에서 성민은 투수임에도 불구하고 그 에이스 디아고 헤밍턴을 상대로 1타점 적시타를 기록했었다.

솔직히 당시에는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은 물론이거니와 필 니크로도. 그리고 공을 던지던 성민도 오늘 경기는 이기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당시 보스턴의 야수진은 만만치 않았다. 그들은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에러들로 성민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를 겁니다.’

-달라야지.

20대 초반의 재능 넘치는 선수들에게 1년은 매우 긴 시간이다.

보스턴의 야수들은 성장했다.

“다저 스타디움이라니까.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아니, 그건 니가 잘 못 본 거고 다저스 스타디움이라고.”

“어휴, 매튜 이 멍청한 새끼가?”

“멍청한 건 랄로 너지. 야, LA 다저스의 경기장인데 다저 스타디움이 말이 되냐? 당연히 다저스 스타디움이지. 그러면 어? 양키스 경기장은 양키스 스타디움이 아니라 양키 스타디움이게?”

“어? 잠깐만. 양키스 경기장 이름이 양키 스타디움이었나?”

아마도 성장했을 것이다.

***

디아고 헤밍턴이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모두가 블루투스 이어폰을 쓰는 시대. 그렇기에 굳이 유선으로 된 이런 종류의 이어폰은 오히려 사치품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렸다. 손목시계가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에서 패션을 위한 일종의 예술품이 돼버린 것처럼.

월드 시리즈는 언제나 긴장되는 무대였다.

긴장으로 딱딱해지는 몸을 풀기 위하여 작년 생애 첫 우승을 차지하던 순간의 감동을 되새겼다.

디아고 헤밍턴이 리그에서 손꼽히는 에이스가 된 시점과 다저스가 월드 시리즈에만 오면 터져나가는 팀이 된 시점은 일치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분명 디아고 헤밍턴의 탓도 있었다. 그는 월드 시리즈에서도 여전히 훌륭한 투수였지만 정규시즌의 그 압도적인 투수까지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작년, 다저스가 몇 년만의 우승을 차지했던 시점에도 마찬가지였다.

인정한다.

월드시리즈까지 가는 과정에서는 성민보다 디아고의 공로가 더 컸다. 하지만 월드시리즈만 한정 짓는다면 다저스가 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성민 덕분이다. 그가 월드시리즈 MVP라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렇기에 작년 우승 반지를 손에 넣었음에도 여전히 괴물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갈증은 더 커졌는지도 몰랐다.

월드시리즈 1차전.

마운드 위로 메이저리그 최고의 투수가 올라왔다.

< 최강의 팀(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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