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메리칸 리그의 패자(9) >
외부의 위협은 팀을 하나로 만든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Mr. 양키스 리암 루카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1차전 양키스는 에이스인 욘 마르틴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패배했다.
김성민.
부정할 수 없는 이 아메리칸리그 최강의 투수는 자신이 큰 경기에 강하다는 것을 이번에도 어김없이 증명했다.
9이닝 무실점 완봉승.
리암 루카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선발 투수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다. 그래 물론 저렇게 한 경기를 혼자 지배하는 괴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야구에서 단판 승부는 와일드카드뿐이다. 챔피언십 시리즈는 누가 한 번의 경기를 압도적으로 승리하느냐로 결정 나지 않는다. 네 번을 먼저 승리하는 쪽이 승리자다.
“라고 생각하고 있을 게 뻔하단 말이죠.”
성민이 웃었다.
그래. 맞는 말이다. 야구에서 괜히 같은 수준이면 에브리데이 플레이어, 타자 쪽을 높게 치는 게 아니다. 평균적으로 시즌을 봤을 때 전체 WAR의 6할은 타자고 투수는 4할에 불과하다.
“충분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은 종종 잊어버려요.”
-뭐를?
“돈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를요.”
2차전.
보스턴 레드삭스의 마운드에 오른 것은 탬파베이 산 에이스인 라만 그레고리였다. 보스턴은 그의 반년 렌탈을 위해 굉장한 희생을 감수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그것은 커다란 도박이었다. 하지만 현재 그 도박이 성공적이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맙소사!!]
그리고 오늘.
라만 그레고리가 그 성공을 부정하는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을 또 다시 절반으로 줄이는 놀라운 활약을 선보였다.
[라만 그레고리 선수 같은 경우 올해를 끝으로 FA 자격을 얻거든요. 처음 보스턴에 올 때만 하더라도 이 선수와 관련된 가장 큰 논쟁은 보스턴이 QO를 날리느냐 안 날리느냐였어요. 하지만 반 시즌. 그리고 이번 포스트시즌까지. 사이영 위너 라만 그레고리가 돌아왔습니다. 단언컨대 이번 겨울. 투수 FA 최대어는 이 선수가 분명합니다.]
7이닝 3피안타 1볼넷 1실점.
이번 시즌 경기당 평균 5.73점을 기록했던 양키스의 타선이 어제에 이어 오늘도 침묵했다.
[보스턴 레드삭스 파죽의 2연승!! 시리즈 스코어 2:0]
[보스턴 레드삭스 감독 엔리케 로만 ‘보스턴으로 돌아올 때 우리는 아메리칸 리그의 챔피언이 돼있을 것이다.’]
[리암 루카스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다.’]
-양키스 폭망인 듯?-
-3차전에 브라이언 보일 뛰고, 4차전에 성민이 나오면 챔피언십 시리즈 끝 아님?-
-4차전에 성민이가 나오긴 왜 나오냐. 끝장 승부도 아닌데 사흘 쉬고 나올 이유는 1도 없지.-
-맞아. 맥스 슈피겐이나 부룬디 쿠치에가 좀 무게감이 떨어지는 느낌이긴 하지만 성적만 보면 꽤 준수한 투수들이라고.-
-걔들도 다른 팀 가면 3선발은 무조건 할 애들임.-
-최근 폼은 맥스 슈피겐이 더 좋으니까 걔가 4차전 나와서 깔끔하게 막으면 될 듯. 아슬아슬하면 부룬디 쿠치에도 투입하고. 뭐 최악의 경우에는 5차전에 성민이 나와서 이기면 되긴 하는데, 어지간하면 월시 1차전에 성민이 올리는 게 좋겠지.-
-봑들 오래간만에 챔피언십 시리즈 왔다고 벌써 김칫국 마시는 것 좀 보소? 월시는 누가 보내준다냐?-
-ㅋㅋㅋ. 아니 아직까지 한국인이 양키스 팬질을 한다고? 그런 호구가?-
-보스턴에 한국인 뛴다고 응원팀을 전부 보스턴으로 바꿔야한다는거냐? 한국인이면 제발 보스턴 응원합시다냐? 국뽕 미쳤네.-
-누가 보스턴 응원하래? 양키스면 인종차별 하는 새끼 중용하는 팀이잖아. 동양인이 그런 팀 응원하고 싶냐?-
메이저리그에서 양키스에게 가장 많이 패배한 팀 보스턴.
오랜 팬들에게 양키 스타디움은 이가 갈리는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 보스턴 레드삭스를 구성하는 젊은 선수들에게는 조금 달랐다.
이번 시즌 그들은 양키스를 상대로 19경기 중에서 11경기에 승리했다. 심지어 마지막 3경기에서 그들은 스윕을 달성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시즌 막판 역전에 성공했다. 그들에게 양키 스타디움은 행운의 장소나 다름없었다.
영광의 홀.
역대 양키스의 위대한 선수들이 거대한 깃발에 새겨진 채 그들을 내려봤다.
실로 위압적인 모습.
“확실히 구장 디자인이 참 괜찮단 말이지. 솔직히 펜웨이파크는 좀 구려. 우리도 이런것도 좀 만들고 하면 좋을 텐데 말이지.”
“하긴, 내 얼굴이 걸릴 장소가 필요하긴 하지.”
“그래 뭐, 꿈은 크게 가질수록 좋으니까. 그런 꿈을 갖고 열심히 하면 혹시 알아? 좋은 결과가 나올지?”
“랄로, 벌써 잊었나 본데 지금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내가 너보다 안타 하나 더 쳤다. 타점도 1점 더 많고.”
“대신 출루는 내가 하나 더 했지. 게다가 넌 병살도 있고, 타점은 스튜버츠가 잘 해준 덕분인거지.”
하지만 보스턴의 선수들 가운데 위압감을 느끼는 선수는 하나도 없었다.
양키스의 과거는 위대했다. 하지만 우리도 거기 꿀릴 이유는 없다. 올해 우리가 써 내려갈 이야기가 바로 보스턴 가장 위대한 역사의 첫 페이지일 테니까.
브라이언 보일이 주먹을 꾹 쥐었다.
그가 존경하는 선배인 라만 그레고리는 지난 경기 본인의 몫을 충분히 해냈다. 마치 사이 영을 수상했던 전성기의 그를 연상케 하는 훌륭한 피칭이었다.
다행이다. 이번 겨울, 라만 그레고리는 분명 자신이 정당하게 받아야 할 몫을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웠다.
이제 라만 그레고리가 QO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0이다. 그렇다고 보스턴에서 그에게 재계약을 할 만한 여유가 있을까? 아마 높은 확률로 그는 팀을 떠날 것이다. 그렇기에 올해가 라만 그레고리와 함께하는 마지막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이 탬파베이 레이스가 아닌 보스턴 레드삭스라는 점은 여전히 아쉬웠다. 그러나 덕분에 좋은 일도 있다. 탬파베이였다면 상상도 못 했을 기념품에 도전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브라이언 보일이 그 기념품을 위하여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딱!!
물론 그는 아직 설익은 투수였고 2연패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양키스의 타자들은 절박했다. 1차전과 2차전에서 침묵하던 양키스의 방망이가 연달아 터졌다.
하지만 터진 것은 양키스의 방망이만이 아니었다.
“그래!! 새끼야!! 그거지. 어휴, 진짜. 넌 인마 이번에도 못 쳤으면 그냥 KBO에 용병으로나 왔어야 해.”
TV를 보던 박동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먹을 흔들었다.
1차전과 2차전 침묵하던 루시 알베리의 방망이가 마침내 안타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루시 알베리의 방망이조차 안타를 만들었다는 말은, 이번 경기가 정말 어마어마한 타격전이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양 팀 합계 26점.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만 무려 열한 명.
결과는 보스턴의 15:11 승리였다.
외부의 위협은 팀을 하나로 만든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극복할 수 없는 위협이었음이 밝혀졌을 때. 패배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이 확실시됐을 때. 외부의 위협은 팀을 다시 분열시킨다.
시리즈 스코어 3:0
이제 한 번의 패배가 시리즈 탈락으로 직결되는 상황.
대부분 양키스 선수들에게 이것은 극복할 수 없는 위협으로 다가왔다.
“망할. 아주 대단하시네. 이 와중에 인터뷰라니 말이야.”
“왜, 앤드루. 너도 인터뷰 하나 잡아줄까? 아 맞다. 넌 오늘 인터뷰 할 게 없지? 오늘 같은 날에 4타수 1안타. 게다가 병살타까지 쳤으니 말이야. 아,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네 인터뷰를 환영할 곳도 있겠네. 보스턴 지역 언론지.”
“뭐, 이 새끼야? 지금 팀이 이 꼴이 난 게 다 누구 때문인데.”
“누구 때문이기는. 어느 망할 자식이 팀원을 감싸주는 대신 언론에다가 이상한 이야기를 터트린 덕분이지.”
“이상한 이야기? 이 뻔뻔한 새끼가? 언론에 헛소리 먼저 한 게 누군데. 난 그래도 사실만 이야기했어.”
“어이구, 그러셨어요? 사실만 이야기하셔서 참 좋으시겠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사실을 전하고 싶으시면 야구 선수 말고 신문기자나 하지 그러셨어요? 그랬으면 그 못생긴 얼굴 TV에 안 비쳤을 테니 지금처럼 사람들 눈 괴롭게 할 일도 적었을 거잖아.”
“뭐, 이 새끼야? 지금 말 다했어?”
“다 하기는. 이제 시작이지.”
-퍼억
이죽거리는 제이크 스컬리의 면상에 앤드루 브라운의 주먹이 제대로 꽂혔다. 비록 투기 종목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단련된 프로선수의 주먹질이다. 제이크 스컬리의 몸이 휘청했다.
“야!! 말려. 말려!!”
다른 선수들이 앤드루 브라운의 몸을 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휘청거리던 제이크 스컬리가 몸을 일으켜 다른 선수들이 붙잡고 있던 앤드루 브라운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뻑!!
하지만 그 주먹이 향한 곳은 제이크 스컬리를 붙잡고 있던 에노모토 코이치의 콧잔등이었다.
주르륵.
에노모토 코이치의 코에서 코피가 흘러내렸다.
“망할 자식이? 방해하지 말고 비켜.”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들던 녀석이었다. 그래도 사람 두들겨 맞는 걸 어떻게 지켜보냐는 마음으로 나섰는데 그런 사람의 얼굴에서 코피를 뽑아내고 이런 뻔뻔한 개소리라니. 그 순간 에노모토 코이치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끊어졌다.
때리는 사람.
말리는 사람.
말리는 척하면서 때리는 사람.
평소에 마음에 안 들던 녀석을 골라서 패는 사람.
포스트시즌이라는 눈앞의 당근으로 리암 루카스가 간신히 기워놨던 양키스의 팀워크가 약속된 패배 앞에 완벽히 부서졌다.
[안되는 집안은 안되는 이유가 있다!! 뉴욕 양키스 클럽하우스에서 난투극?]
[선수 간의 사소한 의견 충돌일 뿐.]
-미쳤네. 챔피언십 시리즈 삼대빵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선수끼리 싸움질이라고?-
-빠른 ㅈㅈ가 아름답다.-
-원래 이쯤되면 빠르게 포기하고 리겜 가는 거지.-
-근데 리겜 하려면 최소 1년 기다려야 함 ㅋㅋㅋ.-
-1년? 지금 양키스 꼬락서니 보면 다음 포스트시즌 진출까지 최소 10년 본다.-
-근데 대체 왜 싸운 거임?-
-소문으로는 평소에 제이크 스컬리가 자기 인종차별을 폭로한 앤드루 브라운 존나 마음에 안 들어 했다더라. 3차전 경기에서 앤드루 브라운이 병살로 찬물 끼얹었잖아. 그래서 그걸로 비꼬다가 앤드루 브라운이 폭발했다는 듯.-
-이러면 남은 시리즈는 어떻게 하냐?-
-어떻게 하기는. 최선을 다해도 3:0 뒤집는 거 거의 불가능인데. 이렇게 되면 4차전으로 그냥 셧아웃이지. 시발 마지막 시리즈를 스윕패 하더니. 챔피언십 시리즈도 4연패로 끝나네.-
-시리즈 끝나고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제대로 징계 먹여야 한다.-
-아니, 근데 정작 인종차별 당했던 성민은 아무 말도 없는데 왜 앤드루 브라운이 지랄임?-
-제이크 스컬리 빠돌이 빠순이 새끼들이 그거 인종차별 한 새끼가 앤드루 브라운일꺼라고 걔한테 지랄해서 그런 거잖아. 하여간 어딜 가나 빠들이 문제야.-
4차전.
보스턴 레드삭스가 뉴욕 양키스를 9:0으로 제압했다.
성민의 긴 농사가 완벽한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 아메리칸 리그의 패자(9)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