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메리칸 리그의 패자(8) >
필 니크로는 최고 수준의 투수였다.
너클볼이라는 특이성을 제외한다고 해도 그가 커리어 내내 보여준 퍼포먼스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1974년부터 1979년까지의 6년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는데 이 기간 동안 그가 적립한 WAR은 무려 47.6으로 연평균 7.93에 달한다. 그는 데드볼 시대의 터무니 없는 기록을 포함한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투수를 통틀어 역대 11번째로 높은 WAR을 쌓은 투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24년의 선수 생활 중에 단 한순간도 자신을 세계 최고의 투수라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가 아직 애송이이던 시절에는 밥 깁슨이 있었다. 또한, 그와 커리어를 함께한 투수 중에는 톰 시버와 스티브 칼튼, 게일로드 페리가 있었고, 그의 커리어 말년에는 드와이트 구든과 로저 클레멘스가 리그를 지배했다.
시대의 지배자들, 역대 최고의 단기 임팩트. 그리고 기록이 삭제되기 전까지는 역대 최고의 투수로 기억되는 약쟁이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의 차례를 준비하는 저 투수는 어떨까?
필 니크로가 단언했다.
-저 남자는 밥 깁슨과 비견할만하다.
그것은 필 니크로가 보낼 수 있는 가장 큰 찬사였다. 대부분 사람은 자신보다 앞섰던 거인을 조금 더 존중하고 우러러보기 마련이다.
필 니크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와 함께 뛰었던 톰시버나 스티브 칼튼, 게일로드 페리, 혹은 그보다 늦었던 드와이트 구든이나 로저 클레멘스. 랜디 존슨 같은 녀석들보다 그의 애송이 시절 압도적인 포스를 뽐냈던 밥 깁슨이야말로 그가 생각하는 가장 대단한 투수였다.
성민이 샐쭉한 표정으로 답했다.
‘지금 누가 봐도 더 잘 던지는 쪽은 저거든요.’
-안다. 하지만 너도 시간이 지나 보면 알게 될 게다. 1968년 메이저리그 마운드의 높이를 5인치 낮춘 밥 깁슨만큼이나 1974년의 밥 깁슨 역시 위대했다는 걸 말이다.
‘어휴, 영감님, 이야기를 하실 때는 청자가 좀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세요. 진짜 1968년이고 1974년이고 그때는 우리 권 여사도 태어나기 전 이야기거든요.’
필 니크로가 성민의 투정에 그냥 웃었다.
처음에는 입만 살아 있는 애송이의 철없음이었다. 그러나 만으로 3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한 지금은 그저 친숙한 이의 투닥거림이다.
위대하지만 단 한 번도 정상에 선 적이 없었던 투수의 찬사 속에서 분명 인생의 한순간은 ‘내가 세계 최고다.’를 외쳤던, 하지만 이제는 그 자리에서 내려왔음을 부정할 수 없는 투수가 마운드에 올랐다.
타석에 선 타자는 루시 알베리.
단언컨대 그는 이 야구장에 있는 모든 타자 가운데 최약체다. 아니, 투수 중에도 확실히 하나는 녀석보다 낫다.
“내가 봤을 때 보스턴은 저 녀석 대신 성민을 타석에 올려야 해. 지명타자가 꼭 투수를 대신하라는 법도 없잖아.”
“물론 나도 타격만 생각하면 네 생각에 십분 동의해. 하지만 투수 체력도 고려해야지. 공격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이 루시 알베리를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가뜩이나 변형 패스트볼에 약한 루시 알베리였다. 오늘 욘 마르틴은 두 종류의 컷패스트볼을 구사했는데 그것은 루시 알베리가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운 공들이었다.
세 번째 타석.
루시 알베리의 눈이 빛났다. 그것은 포기한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빅리그 데뷔 시즌에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는 행운아는 많지 않다. 게다가 루시 알베리는 시즌의 대부분을 마이너에서 보냈다. 일할 계산되는 빅리그 연봉을 고려할 때 그가 올해 수령 하는 연봉 총액은 약 13만 달러 남짓. 단순히 금전적 이익만을 보더라도 챔피언십 시리즈만 승리해도 보너스가 연봉을 넘어선다.
‘밑져야 본전이지.’
무엇보다 시즌 초의 루시 알베리와 지금의 루시 알베리는 다른 사람이었다. 시즌 초의 루시 알베리는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자는 소극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성민이 이야기해준 한국에서 전설적인 커리어를 써가고 있는 유격수 이야기를 계기로 마이너에서 보낸 그 시간들이 루시 알베리를 바꿔놓았다.
아마 언젠가는 메이저리그에서 보게 될 그 유격수를 생각하며. 아마 그였다고 해도 지금은 찬란하게 빛날 미래를 기대하며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을 것이다.
그렇게 루시 알베리의 방망이가 시원하게 허공을 갈랐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경기를 지켜보던 박동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오!! 저 멍청한 새끼가? 어? 지금같이 1점, 1점이 중요한 시점에서는 어떻게든 살아나갈 생각을 해야지. 어차피 타격도 구린 새끼가. 팀 배팅. 어? 기습번트!! 뒤에 지금 매튜 쿠퍼랑 랄로 가야르도라는 세상 든든한 타자들이 있는데!!”
경기가 계속됐다.
욘 마르틴이 잠시 모자를 벗고 옷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지독한 녀석이다.
벌써 8개째.
볼카운트는 3-2 풀카운트.
존에 애매하게 걸치는 공은 정말 미친 듯이 커트해내고 볼은 철저하게 골라낸다. 기습적으로 빠른 공을 존 안에 넣어볼까? 하는 유혹이 밀려왔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5년 전, 전성기의 욘 마르틴에게는 아주 좋은 옵션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심지어 지금까지 90개가 넘는 공을 전력으로 던져 이제는 경기 초반의 위력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겁다.
몸쪽 커터.
절묘한 코스. 움직이던 제롬 스튜버츠의 방망이가 멈춰섰다.
잠깐의 침묵.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욘 마르틴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심판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곳은 펜웨이파크. 보스턴 레드삭스의 고향이었고, 메이저리그는 여전히 심판의 AR 기기사용을 금지하는 보수적인 리그였다. 보스턴의 관중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1사 주자 1루.
“오케이. 이제야 계획대로 되고 있군.”
타석에 매튜 쿠퍼가 올라갔다.
‘괜찮아. 달라진 건 없다.’
욘 마르틴이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어차피 타자를 잡아야 하는 건 똑같다. 커터로 땅볼을 유도해서 병살을 끌어낸다. 최상의 시나리오가 그의 머릿속에 그려졌다.
가능하다.
그리고 초구.
전력을 다해 던진 커터가 그의 손을 떠났다. 93.1마일. 구속도 구위도 그리고 로케이션도 어디 하나 나무랄 곳이 없는 훌륭한 공이었다.
-딱!!
하지만 훌륭한 공이라고 절대 두들겨 맞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매튜 쿠퍼의 방망이가 욘 마르틴의 커터를 완벽하게 잡아당겼다.
펜웨이 파크 좌측 315피트 너머 11미터의 거대한 녹색 담장 위의 특별한 관객석. 그 특별한 관객석을 지키던 사람들의 고개가 서서히 올라갔다.
펜웨이 파크 외야를 훌쩍 넘어가는 장외 홈런. 그야말로 우레와 같은 함성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봤지? 내 계획대로 된 거.”
“뭐, 나쁘진 않네. 그러면 이제 내가 백투백 홈런을 칠 차례인가?”
“어차피 승부에 영향은 없을 것 같지만, 점수는 많이 나면 날수록 좋은거니까. 어디 최선을 다해보라고.”
매튜 쿠퍼와 랄로 가야르도가 가볍게 손바닥을 부딪혔다.
6회 말
2:0
아직 경기는 많이 남았다. 보편적으로 지금 상황에서 2점은 충분한 점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은 직감할 수 있었다.
‘이걸로 충분하다.’
그들의 함성에는 그런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리고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 역시 그 함성의 의미를 읽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유니폼. 챙까지 축축하게 젖어오는 모자. 90개가 넘는 공을 던진 너덜너덜한 어깨와 팔꿈치. 무엇보다 지금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공이 장외 홈런으로 연결된 현실까지.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최악의 상황에서 욘 마르틴은 그저 크게 숨을 한 번 내쉬고 모자를 벗어 땀을 쓱 닦은 뒤 다시 마운드 위에 우뚝 섰다.
그 의연함이 양키스의 선수들을 자극했다.
“일단 불펜 준비시켜.”
“네.”
물론 그렇다고 양키스의 덕아웃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방기하지는 않았다.
랄로 가야르도가 방망이를 꾹 움켜쥐고 타석에서 욘 마르틴을 바라봤다. 아직 젊다기 보다는 앳된 타자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세.
‘젊은 시절의 리암 루카스, 아니 젊은 시절의 마이크 트라웃쯤 되는 건가?’
이제는 기억도 희미한 과거.
욘 마르틴의 몸이 지금보다 훨씬 탄탄하고 훨씬 미숙했던 시절.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았던 전설적인 타자를 딱 한 번 상대한 적이 있었다. 물론 당시의 그는 은퇴를 코앞에 둔 노장이었고 그렇기에 그 연봉에 어울리지 않는 기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현재.
욘 마르틴은 어쩌면 지금이 그때의 광경과 똑 닮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상황은 정반대였지만.
‘그때 승부가 어떻게 됐더라?’
욘 마르틴이 공을 준비했다.
보통의 만화나 영화 소설 등에서 항상 악당들은 주인공의 필살기를 한 번쯤은 무너트린다. 그러면 주인공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새로운 초필살기를 꺼내 든다. 하지만 이것은 픽션이 아닌 현실이었다.
‘혹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이건 진짜 최악이겠는데? 월드 시리즈도 아닌 챔피언십 시리즈라니. 이건 최종 보스도 못 되는 거잖아.’
하지만 안타깝게도 욘 마르틴에게 그런 타이밍 좋은 초필살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구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공은 방금 홈런을 얻어맞은 1년 내내 갈고닦은 그 커터뿐이었다.
한때 세계 최고였던 사나이가 마운드 위에서 자신이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공을 던졌다.
그것은 조금 전 장외 홈런을 얻어맞았던 공보다는 아주 조금 부족한 공이었다.
타석에 선 젊은 타자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마치 공을 쪼개기라도 할 듯 강렬한 기세로.
-딱!!
높게 떠오른 타구.
광활한 외야.
아, 생각났다.
그날, 이미 앞선 타석에서 두 번의 삼진을 당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세 번째 타석. 그 전설적인 타자는 그 위대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느긋하게 타구를 감상하는 일 없이 성실하게 1루를 향해 달렸었다.
그리고 그는 그날 3타수 무안타 2삼진을 기록하며 새로운 젊은 에이스의 탄생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 아직 애송이였던 욘 마르틴은 그와 한마디 말도 섞지 못했다. 솔직히 그런 전설적인 타자도 늙으니 별 볼 일 없구나 하는 거만한 생각도 조금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성실한 달리기만큼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아마 이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나도 훗날 베테랑이 된다면 저런 사람이 돼야겠다.’
6회 말.
백투백 홈런.
3:0
그리고 늙어가는 에이스가 이어지는 두 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6이닝 3실점 투구 수는 107개.
필 니크로가 생각했다. 지금 당장은 모를 수 있다. 하지만 먼 훗날, 저 위대한 에이스의 발버둥은 성민에게도 큰 자산으로 남으리라.
마운드를 내려가는 욘 마르틴을 향해 필 니크로가 감사를 담아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물론 그것은 아무도 볼 수 없는 인사였지만.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
보스턴 레드삭스가 양키스를 7:0으로 제압했다.
***
“흐음, 이거 역시 보스턴 레드삭스가 올라오겠는데?”
“그거 별로 안 좋은 소식 아닙니까?”
“비록 시즌 막판에 뒤집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양키스도 시즌 막판까지 1위를 달리던 팀이잖아. 무시할 팀은 아니지.”
“요즘 거기 상황 개판인 거 잘 알잖아요. 그 괴물 영감님도 수습하기 힘들 만큼요.”
“뭐, 그건 그렇지. 하지만 어차피 누가 올라오건 조금 더 고생하고 덜 고생하는 차이가 있을 뿐. 결과는 똑같다는 거 잘 알잖아?”
“우, 어디 가서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십쇼. 아직 챔피언십도 안 끝나는데 그러다가 혹시라도 삐끗하면 두고두고 흑역사로 남습니다.”
팀의 어린 선발 유망주 코리 콜린스의 말에 디아고 헤밍턴이 웃으며 답했다.
“그러니까 그럴 일이 없도록 확실하게 이기러 가자고.”
[NL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 LA 다저스-애틀랜타 브레이브스. 13:4. 다저스 승리!!]
< 아메리칸 리그의 패자(8)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