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메리칸 리그의 패자(7) >
필 니크로는 알고 있었다.
성민은 부정할 수 없는 천재다.
아, 물론 야구 이야기다.
너클볼을 배운 지 만으로 3년 만에 사이 영.
물론 그 배웠다는 부분이 필 니크로가 몸에 직접 경험을 박아넣는 사기적인 방법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필 니크로가 생각하기에 최대로 잡는다면 5년치?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다면 1, 2년치의 기초를 전달하는 데 그쳤을 것이다.
어쨌거나 굳이 그 편법까지 세세하게 따지자면 성민은 본격적으로 너클볼을 배운지 고작 8년 만에 사이 영을 수상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직 수상한 것은 아니지만, 이번 시즌 사이 영을 성민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준다면 그건 기자들이 단체로 실성했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사실 필 니크로가 생각해도 환경이 좋긴 했다.
최고의 트레이너가 옆에 붙어서 시시콜콜 잔소리를 퍼부었고 무엇보다 녀석이 뛰기 딱 좋은 수준의 리그. 게다가 심리적으로 안정됐으며, 강력한 동기 역시 존재하는 ‘마린스’라는 팀에서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하지만 환경이야 어찌 됐건 그 모든 것을 흡수하여 올라설 수 있는 성장 한계치가 이만큼이나 됐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고작 만 3년 만에 이뤘다는 점은 명백한 그의 ‘재능’이었다.
-세계적인 선수인가······?
‘네? 뭐라고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마운드에 욘 마르틴이 섰다.
필 니크로는 알 수 있었다. 저 녀석이 저 두 가지 종류의 커터를 던지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재능을 타고 태어났으며 그것이 자신에게 맞는 길인지 아닌지를 번민했을지를.
-부웅!!
“스트라잌!! 아웃!!”
마운드.
2미터 3센티의 거인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생일을 지나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는 만 35세. 발톱을 갈고, 부리와 깃털을 뽑아낸 늙은 솔개가 보스턴을 막아냈다.
-딱!!
물론 그것은 97마일짜리 속구를 펑펑 던져대던 전성기의 그 압도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94마일대의 속구와 92마일대의 두 가지 종류의 커터를 섞은 교묘한 피칭. 압도적인 위압감은 없었지만, 그 정교한 피칭은 보스턴 젊은 타자들의 발목을 잡기에 충분했다.
“까다롭군.”
“맞아, 까다롭지.”
전성기의 구속을 잃어버렸음에도 어떻게든 리그에서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을 친 욘 마르틴의 변화는 대단하다. 존중할 만하다. 지금 욘 마르틴이 보여주는 모습대로라면 앞으로 몇 년은 더 리그에서 에이스급 투수로 활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잡담을 나누던 매튜와 랄로의 시선이 동시에 성민에게로 향했다.
“아무래도 차이가 있긴 하지?”
“우리야 실전에서 상대를 안 해봤으니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하나를 고르라면 역시 저 녀석이란 말이야.”
그렇게 변화에 성공한 욘 마르틴과 압도적인 페이스로 군림하던 5년 전, 전성기의 욘 마르틴을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더 대단한 투수인가를 따진다면 역시 5년 전의 욘 마르틴 쪽이다.
그리고 지금 저 자리에 앉아있는 김성민은 지금의 욘 마르틴이 아닌, 그 전성기의 욘 마르틴과 비견할만한,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대단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투수였다.
“2점이면 충분하겠지?”
“매튜 네가 안타 치고 내가 홈런 치는 건가?”
“무슨 헛소리야. 스튜버츠가 출루하고 내가 홈런으로 2점. 그리고 랄로 넌 폭풍 삼진이지.”
“그게 네 계획이라면 우리는 2점이 아니라 3점이 되겠군. 하지만 내 생각에도 2점으로 끝날 것 같은데? 스튜버츠가 출루하고 네가 폭풍 삼진. 그리고 내 홈런. 아, 아니다. 어쩌면 네가 병살을 쳐서 1점으로 끝날 수도 있겠네.”
“흥, 그런 일은 절대 없을걸.”
매튜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스튜버츠라면 내가 병살 코스로 타구를 날려도 충분히 살아나갈 놈이거든.”
“으음, 확실히 녀석이라면 그럴 수 있지. 그러면 어찌 됐건 2점은 나온다는 거네.”
“완벽한 계획이야.”
“후, 역시 우리 둘이 머리를 맞대니 답이 나오는군.”
제롬 스튜버츠의 의사는 조금도 반영하지 않은 헛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가볍게 웃었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혹은 진짜로 조금 멍청한 건지는 모를 저 콤비의 만담은 항상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좋은 녀석이에요.’
-그렇기는 하지. 아니, 잠깐만. 왜 복수가 아니라 단수냐?
‘왜 단수겠습니까. 한 녀석은 진짜 머저리니까 그런 거죠.’
-응?
경기가 이어졌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 사실 두 팀 모두 이번 시즌 공격력으로는 어느 팀에도 뒤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팀들이거든요.]
[맞습니다. 이번 시즌 경기당 5점 이상의 득점을 올린 팀이 열두 팀. 그중에서 5.5점 이상의 득점을 올린 팀은 세 팀밖에 안 되거든요.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는 각기 5.61과 5.73을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경기는 그 화끈한 공격력의 팀들답지 않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5회 말 보스턴 레드삭스의 공격이 끝난 가운데 점수는 여전히 0:0. 양 팀의 에이스들이 정말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고 있어요.]
[사실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이번 시즌 압도적인 활약을 펼치며 사이 영에 이름을 새겨놓다시피 한 김성민 선수. 그리고 지난 10년간 아메리칸리그 최고의 투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욘 마르틴 선수. 최근 조금 폼이 떨어진 감이 있지만, 이런 큰 경기에서 경험이란 절대 무시 못 할 요소거든요.]
아쉽게도 매튜 쿠퍼와 랄로 가야르도의 완벽한 계획은 초장부터 실패했다. 제롬 스튜버츠는 3회의 마지막 타자로 깔끔하게 내야 땅볼로 물러났으며 매튜 쿠퍼는 4회의 선두 타자로 안타를 쳤지만, 랄로 가야르도의 병살타로 둘이 나란히 함께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5회 말, 성공적으로 수비를 끝내고 덕아웃으로 돌아온 욘 마르틴이 모자를 벗었다. 10월의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모자는 이미 땀으로 축축했다. 오늘 그는 그야말로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그의 시선이 마운드로 향했다.
그리고 그 마운드에 성민이 올라왔다.
지금까지 그가 허용한 출루는 볼넷 하나와 행운의 안타 하나뿐.
-딱!!
성민이 양키스의 9번 타자를 고작 공 하나 만에 내야 땅볼로 잡아냈다.
“지금까지 투구수가 어떻게 되지?”
“82개입니다. 이닝당 16.4개로 딱 평균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욘 마르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 말고. 저 녀석 말이야.”
“아, 김성민 선수라면······. 66개. 아니 방금 하나를 더 던졌으니 67개네요.”
이번 시즌 메이저리그의 리그당 평균 투구 수는 16.27개. 그렇게 보면 평균보다 조금 많아 보였지만 내셔널리그가 16.11개고 아메리칸리그가 16.43개 정도 된다.
그는 지금 딱 평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지금 마운드에 선 괴물이다. 저 괴물은 무려 5.1이닝 동안 67개. 이닝당 평균 12.6개 수준이다. 이대로 9이닝까지 던진다고 해도 욘 마르틴이 6이닝을 던지는 것과 비슷한 투구 수가 나온다는 계산이다.
그는 분명 성민을 향해 경쟁심을 갖고 있었다. 아마 평범한 투수였다면 흔들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의 오랜 경험이 그것을 막았다. 조급해지는 것이 더 위험하다. 저 보스턴의 타선을 상대로 5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고 있다. 잘 하고 있다는 뜻이다. 욘 마르틴은 욘 마르틴이고 김성민은 김성민이다. 그대로 가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사이 타석에 에노모토 코이치가 올라왔다.
오늘 경기 세 번째 타석.
보통 세 번째 타석쯤 되면 슬슬 각이 나온다. 상대가 아무리 대단한 투수라고 해도 에노모토 코이치 역시 대단한 건 마찬가지다. 일단은 21세기 NPB가 낳은 최고의 야구 선수라는 칭호까지 있을 정도니까. 아, 물론 타자 한정이지만.
하지만 지금 저 마운드의 투수를 상대로는 NPB를 박살내고 자신감 가득한 상태에서 MLB에 넘어왔을 때. 진짜 MLB의 슈퍼 에이스를 상대로 느꼈던 그 막막함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젠장.’
시즌 중에 지켜봤던 공들을 머릿속으로 충분히 시뮬레이션하고 경기에 임했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이 자식······.
-부웅!!!
“스트라잌!!”
사람이라면 시즌을 풀로 치르고, 포스트시즌쯤 들어오면 더 약해지는 게 예의다. 하지만 이 자식 공은 어째 더 더러워졌다. 욕이 아니다. 칭찬이자 감탄이다.
무엇보다 이건 그냥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째 에노모토 코이치 본인에게는 유독 더 더러운 공을 던지는 느낌이다. 그래도 다른 녀석들을 상대로는 가끔 실투도 던지고 그러는 것 같은데 그에게는 그런 것도 얄짤없는 것 같다.
‘그냥 느낌이겠지?’
물론 아니었다.
-흐음, 성민아. 너 유달리 이 녀석을 상대로는 더 잘 던지는 것 같구나.
오늘 경기에서 성민이 던진 68개의 공. 그리고 그중 31개의 고속 너클볼 가운데 필 니크로가 도달했던 ‘그 영역의 공’을 던진 것은 총 여덟 번. 그 중 다섯 번이 이 에노모토 코이치를 상대로 던진 공이었다.
‘그거야 뭐. 제가 또 나고야 아시안 게임의 영웅. 일본 킬러 아니겠습니까. 100년 전 독립운동을 하셨던 조상님의 가호가 저를 지켜주시기 때문 아닐까요?’
-그건 2026년 9월 둘째 주 우먼 주간 특집 기사에서 인터뷰로 했던 대외용 멘트 아니냐?
‘기억력은 아직 잘 살아 있으시네요. 뭐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지금 양키스에서 제일 신경 써야 하는 타자니까요. 저 친구 팀에서도 좀 아싸라서 그런가? 팀 분위기가 개판 오분 전인데 혼자만 컨디션 잘 유지하고 있네요. 뭐, 사실 그거 아니더라도 기량만 따져도 올스타급 리드오프인 건 사실이고요.’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던 답이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필 니크로의 눈이라면 보자마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기에 더 가치 있는 답변이었다.
선발 투수는 9이닝 내내 전력으로 공을 던질 수 없다. 더 좋은 타자에게는 조금 더, 그렇지 못한 타자에게는 조금 덜. 완급을 조절해야 한다.
그렇다면 더 좋은 타자와 그렇지 못한 타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커리어를 살피고, 최근의 폼을 살피고, 그의 스타일을 살핀다. 그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것은 오직 분석 그리고 학습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할까?
그럴 리가.
이미 현대의 야구에서 그 분석은 선수 개인이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을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받는 책상물림들이 팀에 수두룩하다.
투수가 해야 하는 것은 그 분석 자료를 학습하는 약간의 부지런함 뿐이다.
하지만 필 니크로의 관점에서 그것은 그저 기본에 불과했다.
진짜 차이는 그 기본 이상의 어딘가에서 만들어진다.
커리어, 최근의 폼, 스타일 등이 아닌 오늘의 무언가를 눈치챌 수 있는 능력.
그렇다면 대체 어디서 그 차이가 만들어지는 것일까?
필 니크로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감각이고, 그 감각을 키우는 유일한 방법은 올바르게 학습된 경험뿐이다. 지난 3년. 성민은 필 니크로의 끊임없는 잔소리 아래 그저 분석된 자료를 외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본래라면 필요 없는 수준의 공부를 해왔다.
그리고 지금 성민이 보여주는 이 감각이야말로 그 필요 없는 공부의 결정판이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헛스윙 삼진.
에노모토 코이치가 그저 자신의 불운을 탓하며 덕아웃으로 물러났다.
< 아메리칸 리그의 패자(7) > 끝
ⓒ 묘엽
작가의 말
(7)이라 한 경기로 7화를 끄는 느낌이지만 그냥 느낌일 뿐, 사실이 아닙니다.
진짜로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