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49화 (250/287)

< 아메리칸 리그의 패자(6) >

-역시 좋은 투수다. 그것도 대단히.

필 니크로가 욘 마르틴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그 감탄에 성민이 시큰둥하게 답했다.

‘아니, 지금 이 경기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 하나 없는 이야기를 뭐 그리 새삼스럽게 강조를 하고 그러십니까.’

필 니크로가 질문했다.

-너 솔개의 이야기라고 혹시 알고 있느냐?

‘네?’

성민의 반문을 부정으로 받아들인 필 니크로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솔개는 70년을 살 수 있다고 하지. 하지만 40년을 산 솔개는 늙어 부리와 발톱이 굽고 낡고 무거운 깃털에 갇혀버린다. 그렇게 대부분 솔개는 40년만에 생을 마감하지.

‘잠깐만, 잠깐만요. 지금 설마 그 이야기를 하시려고요? 그중에 극히 일부의 솔개만이 다시 날기 위해 바위를 쪼아 부리를 깨고, 새로운 부리로 발톱을 뽑고, 새로운 발톱으로 깃털을 모조리 뽑아버리고 오직 그렇게 고통을 감내한 솔개만이 남은 30년의 생을 살아갈 자격을 얻는다는 그 이야기요?’

-역시 너도 알고 있는 이야기로구나.

‘그거 아주 유명한 개뻥이잖습니까. 애초에 솔개 수명은 30년도 안 된다고요.’

어?

하지만 성민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필 니크로가 당황하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에 당황하기에 그가 지난 4년간 성민과 함께하며 쌓인 경험은 녹록지 않았다.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요?’

-진짜 중요한 건 그 이야기의 사실 여부가 아니다. 우리가 그 이야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느냐지.

‘아니, 이야기 자체가 순 개뻥인데 교훈을 얻긴 뭘 얻습니까.’

-동화나 소설, 영화나 만화가 꾸며낸 이야기라고 해도 우린 거기서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중요한 건 사실의 여부가 아닌, 그 이야기를 통해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인 법이다.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마르틴 선수가 그 이야기 속의 솔개처럼 뼈를 깎는 노력으로 자신을 바꾼 사람이다. 뭐 그런 말씀이신 거네요.’

-그래, 바로 그거지. 성민아, 너도 나중에는 꼭 저런 선수가 돼야 한다. 지금의 성공에 만족 하는 순간 퇴보는 시작되는 법이니까.

‘어휴, 제가 그럴 것 같으면 그냥 그때 가서 말씀하셔도 안 늦거든요. 어차피 제가 그럴 낌새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참지 않고 잔소리하실 분이 뭘 새삼스레.’

-뭐, 듣고 보니 그건 또 그렇구나.

성민이 씨익 웃었다. 아무리 봐도 저 솔개 이야기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지만, 뭐 어르신들이 인터넷에 그럴싸한 그림과 함께 띄워진 글에 속아 넘어가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굳이 그걸 들춰내서 부끄럽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 똑똑한 권 여사도 속아 넘어가는 것이 요즘 인터넷의 정보들인데, 하물며 필 니크로는 인터넷? 아니. 컬러 TV는커녕 흑백 TV조차 대도시 한정으로 방송이 송출되던 시절에 태어난 사람이다.

성민이 필 니크로를 기꺼이 이해했다.

-흐음, 뭔가 눈빛이 상당히 불손한 것 같은데?

‘자자, 다음 타자 올라오네요. 이제 경기에 집중하죠.’

‘좋은 수비 뒤에는 좋은 공격이 나온다.’ 양키스의 일루수인 보이드 머피가 그 오래된 말을 되뇌며 타석에 섰다.

펜웨이파크의 마운드.

마운드에 선 투수에게 긴장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이곳은 성민의 홈그라운드였고 그는 리그 최고의 투수였다. 지금 긴장해야 하는 쪽은 마운드에 선 성민이 아닌 그를 어떻게든 뚫어내야 하는 양키스의 타자들이었다.

초구.

가벼운 투구 자세.

하지만 그 손에서 나오는 공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이 보이드 머피의 눈을 현혹했다.

-부웅!!

“스트라잌!!”

시원한 헛스윙.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로 움직인 공이 보이드 머피의 방망이를 피해갔다.

두 번째. 마찬가지로 너클볼.

-딱!!

파울라인을 벗어나 크게 떠오른 타구.

랄로 가야르도가 빠르게 달렸다. 하지만 충분하지 못했다. 아쉽게도 신은 그에게 빠른 발까지는 내려주지 않았다.

괜찮다. 볼카운트는 0-2. 타자가 긴장한 것이 여기까지 전해진다. 성민이 세 번째 공을 준비했다.

보이드 머피를 한 번 살피고. 가장 적절한 공을 준비한다.

존에서 상당히 빠져나가는 89.8마일의 빠른 공.

그 유혹은 치명적이었다.

존에서 빠지는 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참는 것은 무리였다.

역대 최고의 너클볼 투수가 던진 그 속구의 유혹에 보이드 머피의 방망이가 따라 나왔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헛스윙 삼진.

좋은 선택이다.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지는 5번 타자 역시 허무하게 초구 내야 땅볼로 물러났다.

[루시 알베리 선수. 좋은 수비입니다. 이 선수 시즌 초에 처음 콜업 됐을 때는 참 아쉬운 점이 많았는데, 마이너에 내려갔다 온 이후로는 환골탈태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많이 좋아졌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바그너 가이탄이라는 사실상 메이저 진입을 막고 있던 강력한 경쟁자가 사라져서 부담감이 많이 없어진 덕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찌됐건 보스턴에서는 앞길이 없던 상황에서 극적으로 상황이 변한 거거든요.]

[뭐, 그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군요. 어쨌거나 이유야 어찌 됐건 이제 타격만 조금 보완을 해주면 확실히 보스턴의 내야를 책임져줄 선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가 됩니다.]

그리하여 투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 6번 타자 양키스의 삼루수 앤드루 브라운이 들어왔다.

최근 제이크 스컬리와 심하게 척을 지고 있는 그는 1회 초 제이크 스컬리의 이퓨스 헛스윙 삼진이 매우 보기 좋았다. 하지만 좋은 것도 딱 거기까지. 이후 이어진 1회 말 제이크 스컬리의 수비가 그의 기분을 망쳐놓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건 하이라이트 필름에 올려도 어색하지 않을 호수비였다. 그리고 그게 바로 문제다. 거듭 이야기 하지만 제이크 스컬리의 평소 수비는 수준 이하다. 특히 수비 범위에서.

하지만 라이트한 팬들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이미지 속에서 제이크 스컬리는 수비를 잘하는 선수고, 덕분에 유격수와 삼루수 사이로 빠지는 공에 대해서는 앤드루 브라운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후.’

지금까지 출루에 성공한 타자는 0명.

여기서 한 방 보여주기만 한다면!!

초구.

61.3마일 느린 너클볼.

-부웅!!

“스트라잌!!”

시원한 헛스윙.

하지만 스윙에 실린 힘 하나 만큼은 진짜배기였다. 어설프게 맞춰내느니 어떻게든 한 방 강하게 때려내겠다. 설사 빗맞는다고 해도 장타를 만들겠다는 단단한 각오가 엿보이는 스윙이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치겠다고 나오는 타자를 두려워해서야 욘 마르틴에게 뺏어 온 아메리칸리그 최고의 투수라는 칭호가 아깝다.

또 한번.

61.1마일의 느린 너클볼.

-부웅

“스트라잌!!!”

이번에도 역시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앤드루 브라운의 방망이가 허공을 저었다. 볼카운트 0-2.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이번에도 공을 하나 빼자고 요청했다. 앤드루 브라운의 넘실거리는 저 타격 욕심은 포수 마스크를 뒤집어쓴 그에게도 전해졌다. 이건 흘러나가는 공을 던져도 무조건 방망이를 휘두를 녀석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맞았다.

-딱!!

하지만 공을 향한 그 집념은 예상을 조금 벗어났다. 존에서 밖으로 상당히 빠진 공을 앤드루 브라운이 어떻게든 걷어냈다.

볼카운트는 여전히 0-2.

앤드루 브라운의 머릿 속에 경기 직전 전력분석 팀원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김성민 선수는 파워 피처입니다.”

“엥? 그 녀석이 파워 피처라고? 그 녀석 전형적인 피네스 피처 아니야?”

“맞아. 세상에 그렇게 슬렁슬렁 공을 던지는 파워 피처가 어딨어. 게다가 그 자식 커맨드 완전 미쳤다고.”

“무엇보다 그 뺀질거리는 느낌을 생각해봐.”

선수들의 반문에 그 프런트 직원은 이렇게 답했다.

“물론 김성민 선수가 95마일 이상의 속구를 뻥뻥 던지는 건 아니죠. 속구 평균 구속만 따지자면 확실히 평균 미만, 아니 88.9마일에 불과하니 정확히 말하자면 선발 중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죠. 하지만 김성민 선수의 PFR은 1.11이나 됩니다.”

“PFR?”

“아, 나 그거 알아. 삼진이랑 볼넷 더해서 이닝으로 나눈 거. 성민이 그게 그렇게 높단 말이야?”

“네, 물론 볼넷은 평균보다 많아서라기보다는 삼진이 많아서이긴 합니다만. 어쨌거나 김성민 선수는 결정적인 순간에 맞춰 잡기보다는 삼진을 잡는 걸 선호하는 투수라는 겁니다.”

“작년에는 조금 다르지 않았어? 분명 작년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그때 자료 분석을 담당했던 직원의 잘못입니다. 그 자식, KBO 시절의 자료를 소홀히 했더라고요. 메이저 진출 첫 해인 다저스에서는 PFR이 일시적으로 떨어졌었습니다만 커리어 전체를 보면 김성민 선수는 PFR이 굉장히 높은 선수이고 이건 선수의 성향이라고 봐야할겁니다.”

“그렇단 말이지?”

무엇보다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에게서 느껴지는 기백.

책상에 앉아 숫자로 야구를 하는 머저리들은 그게 대체 뭐냐고 이야기하겠지만, 현장에서 직접 공을 치고 달리는 선수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그 감각이 이야기한다.

지금 저 투수는 삼진을 잡으러 들어온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지금 그가 선택할 공은 한 가지.

이번 타석에서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고속 너클볼뿐이리라.

앤드루 브라운이 성민의 네 번째 공을 기다렸다.

와인드업.

그리고 성민의 손에서 야구공이 날아올랐다.

‘어?’

0.2초.

그 짧은 시간 만에 알 수 있었다. 예상이 틀렸다. 성민이 선택한 결정구는 느린 너클볼이었다.

젠장, 앞서 두 번이나 스트라이크를 잡으며 재미를 봤다 이건가?

하지만 실수다.

두 번이나 방망이를 헛돌렸지만, 대신 연속으로 들어온 느린 너클볼의 타이밍은 몸에 익었다. 조금 멈칫하긴 했지만, 여전히 막대한 힘을 품고 있는 방망이가 성민의 느린 너클볼을 향해 움직였다.

‘어?’

그리고 또 틀렸다.

-부웅!!

존 밖으로 완벽하게 빠져나가는 느린 너클볼이 앤드루 브라운의 헛스윙을 끌어냈다.

“스트라잌!! 아웃!!”

양키스 전력분석팀 직원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결과만 놓고 봤을 때 부산 마린스 그리고 보스턴 레드삭스의 김성민은 삼진을 잡는 것을 선호하는 투수였다.

하지만 그것은 성민이 삼진을 선호하는 투수라기보다는 부산 마린스와 보스턴 레드삭스가 성민에게 삼진을 강요했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그 두 팀은 ‘내가 이겨야 한다. 이 타자를 무조건 잡아야 한다. 삼진으로 무조건 잡아야 한다.’ 그런 생각으로 경기를 풀어나가야 하는 팀이었다.

또한, 앤드루 브라운이 느낀 ‘기백’이라는 정체불명의 무언가 역시 틀리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가 사이 영보다는 오스카에 더 어울리는 재능을 타고난 남자였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 성민은 치겠다고 광고를 하는 타자를 상대로 꿋꿋하게 정면승부를 고집하는 어디 소년 만화에 나올법한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그런 녀석들을 머저리라고 비웃는 쪽에 더 가깝다.

2회 초 성민이 삼진 두 개 포함. 또다시 삼자범퇴를 끌어냈다.

그리고 이어진 한마디 칭찬.

-잘했다.

그것은 이번 이닝. 승부가 시작된 이후 필 니크로가 꺼낸 유일한 말이었다.

< 아메리칸 리그의 패자(6)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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