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메리칸 리그의 패자(5) >
1943년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가 주장했던 욕구 위계 이론에 따르자면 인간은 하위의 욕구를 충족했을 때 상위의 욕구를 갈망하게 된다.
가장 기초적인 생리부터 안정의 물질적인 욕구와 인지적, 심미적인 결핍 욕구. 소속감 및 존중을 바라는 낮은 수준의 성장 욕구. 그리고 자아실현과 자아 초월의 매우 높은 수준의 성장 욕구까지.
세상 대부분의 사람은 결핍 욕구조차 다 충족시키지 못하며 그것을 넘어 성장 욕구를 충족시키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한 줌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한 줌에 포함된다고 해도 결코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양키스의 에이스인 욘 마르틴이 그러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는 분명 성공한 사람이었다. 이 시대 최고의 팀 중 하나였던 양키스의 에이스였으며 커리어 가운데 몇 년은 명백한 리그 최고의 투수였다. 아직까지는 조금 아슬아슬했지만, 이대로 커리어를 잘 마무리 짓는다면 여유롭게 10 턴 이내로 명예의 전당에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메이저리그 160년의 역사에서 명예의 전당에 투표로 헌액된 선수의 총 숫자가 149명에 불과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의 커리어가 얼마나 성공적인지를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욘 마르틴을 아는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그를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욘 마르틴 스스로는 충족되지 않는 갈증에 목말라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고 그것을 모두가 인정한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모두'에 욘 마르틴 자신은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바라보는 곳은 지금 그의 높이보다 약간 더 높은 곳에 있었다. 그곳은 까치발만 들면 아른거리는 곳이었지만, 그 약간은 결코 쉽지 않았다. 개인 커리어로는 이미 사이 영이 두 개다. 누적 역시 나쁘지 않다.
그가 명예의 전당에 첫 턴으로 들어가기에 부족한 것은 시대를 지배했다는 임팩트.
그리고 포스트 시즌이란 그 임팩트를 보여주기에 가장 적절한 무대다. 특히나 투수에게는 더더욱!! 지금까지 대체 얼마나 많은 투수가 포스트 시즌의 활약으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았던가.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벽이 많았다. 성민이 얼마나 대단한 투수인지, 지금 보스턴이 얼마나 대단한 기세인지는 그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양키스의 불펜.
한때 저 마운드 위에서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났던 남자가 욘 마르틴을 바라봤다. 그는 욘 마르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현역 시절 그도 역시 욘 마르틴과 같았기 때문이다.
C.C 사바시아.
과거 양키스의 에이스이자 현재 양키스의 투수 코치.
32세 시즌. 그가 커리어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을 때, 그리고 33세 시즌. 바닥 밑에는 지하가 있음을 확인했을 때, 그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사람은 적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C.C 사바시아 본인만큼은 자신이 여기서 끝날 투수가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욘 마르틴은 C.C 사바시아보다는 형편이 나았다. 최소한 한 사람은 욘 마르틴이라는 투수를 믿어줬으니까
'욘. 이 무대에서 확실하게 보여줘라. 2034년. 양키스에는 욘 마르틴이라는 대단한 투수가 있었다는 걸.'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충족하기 위하여.
이미 증명된 성공의 방식을 답습하며 서서히 영광스럽게 죽어가는 것을 거부하고, 실낱같은 가능성을 위하여 마지막까지 진흙탕으로 뛰어드는 것을 선택한 위대한 에이스가 마운드에 올라왔다.
그의 시선이 잠시 저 보스턴의 덕아웃으로 향했다.
스타워즈가 역대 최고의 영화인 이유는 다스베이더가 존재하기 때문이고, 인피니티 사가가 최고의 마무리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타노스라는 훌륭한 빌런 덕분이다. 모든 좋은 이야기에는 최고의 고난이 있다. 주인공이 빛날 수 있는 것은 넘어서지 못 할것 같은 고난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거기에서 감동을 받는다.
인정한다.
지금 양키스는 언더독이다. 저기 저 덕아웃에서 긴장감 없이 웃는 저들이야말로 탑독이다. 시즌 마지막 여덟 경기. 그곳에서 두 팀의 위치는 바뀌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괜찮다. 사람들이 가장 환호하는 순간은 언더독이 탑독을 넘어서는 순간이다.
2020년대 중반부터 2030년대 초반까지.
아메리칸리그를 대표하는 투수 욘 마르틴이 도전자의 심정으로 공을 쥐었다. 타석에 선 보스턴의 1번 타자는 제롬 스튜버츠. 종합적인 능력으로 볼 때 양키스의 에노모토 코이치에 비하면 그리 좋은 타자는 못 됐다. 혹자는 그를 가리켜 병살타 제조머신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한 가지.
출루율.
오직 출루율만 놓고 본다면 저 병살타 제조머신은 리그 최고의 리드오프인 에노모토 코이치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특히 내야 땅볼을 안타로 만드는 능력만큼은 리그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구,
92.4마일의 빠른 공.
오늘은 포스트 시즌이다. 9이닝을 다 던지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시즌을 치르는 것과 단기전은 다르다. 1이닝, 1이닝. 공 하나하나를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제롬 스튜버츠의 방망이가 욘 마르틴의 공을 두들겼다.
-딱!!
빗맞은 타구.
보통이라면 아슬아슬하게 아웃이 될만한 타구였다. 하지만 지금 타석에 선 남자는 제롬 스튜버츠다. 1루까지 평균 3.72초. 이번 시즌 최고 기록은 3.66초까지 나왔다. 그야말로 1루까지 달리기 위해 태어난 남자다.
반면 양키스의 유격수인 제이크 스컬리는 머저리였다.
삼루수인 앤드루 브라운의 불평처럼 그의 수비 범위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양키스 최고의 인기스타였다. 타격이 좋아서? 그 멋진 외모 때문에? 그래,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이었다면 양키스의 팬들은 그를 그렇게까지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짝거림.
그의 플레이에는 오직 슈퍼스타들만이 가지고 있었던 그런 화려함이 있었다. 물론 항상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대중이 기억하는 것은 매일매일의 플레이가 아닌 하이라이트 필름에 나오는 그 반짝거리는 슈퍼 플레이였다.
마치 지금, 이 순간 처럼.
제이크 스컬리가 타구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바닥을 튕기며 날아오는 타구.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플레이가 그 아슬아슬함을 여유로움으로 바꿔놓았다.
[맙소사!!]
글러브가 아니었다.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맨손으로 튕겨오는 타구를 잡아냈다. 물론 속도가 상당히 죽은 타구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움직이는 공을 맨손으로 잡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제이크 스컬리는 제 자리에 서서도 아닌, 달려오는 자세 그대로 공을 잡아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달리던 탄력 그대로 몸을 슬쩍 띄워 반 바퀴 회전하며 일루를 향해 공을 뿌렸다.
-뻐엉!!
"아웃!!"
제롬 스튜버츠가 고개를 저었다.
펜웨이파크.
경기를 지켜보던 보스턴 팬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드는 슈퍼 플레이. 조금 전 타석에서 이퓨스에 당하던 멍청한 타자와 도저히 같은 인물이라고는 믿기 힘든 모습이었다.
욘 마르틴이 제이크 스컬리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제이크 스컬리가 잠시 모자를 벗어 특유의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뽐냈다. 재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앤드루 브라운도 트집을 잡을 수 없었다.
타석에 매튜 쿠퍼가 들어왔다.
이번 시즌 보스턴이 폭발적인 기세를 보인 데는 성민과 랄로 가야르도의 활약이 결정적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 매튜 쿠퍼의 역할 역시 무시할 수는 없었다. 보스턴의 가장 큰 득점원 중 하나는 제롬 스튜버츠의 출루와 빠른 발. 그리고 이어지는 매튜 쿠퍼의 장타였다. 무엇보다 그는 이번 시즌 무려 37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양대 리그 전체에서 그보다 많은 홈런을 기록한 타자는 고작 열한 명에 불과했다.
초구. 92.2마일 빠른 공.
-부웅!!
"스트라잌!!"
존을 슬쩍 빠져나가는 공에 매튜 쿠퍼의 방망이가 헛돌았다.
"쳇."
보통이라면 아쉬워할 공도 아니었지만, 이 녀석에게는 조금 다른 이야기였다. 실제로 이 녀석은 이런 코스의 공을 다섯 개나 담장 밖으로 넘긴 괴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어지는 두 번 째.
79.8마일의 체인지업.
-딱!!
타이밍을 완벽하게 뺏겼다. 어찌어찌 방망이를 가져다 대긴 했지만, 타구가 파울라인을 벗어났다. 욘 마르틴이 살짝 아쉬워했다. 저 괴물 같은 힘만 아니었어도 이건 무조건 내야 땅볼 아웃이었다.
그리고 세 번 째.
92.1마일의 빠른 공.
이번에도 역시 매튜 쿠퍼의 방망이는 튀어나왔다.
-딱!!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이 말해줬다. '빗맞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물론 의미 없는 일이었지만.
"아웃!!"
타석으로 오르는 랄로 가야르도에게 매튜 쿠퍼가 말했다.
"저 영감 오늘 공이 좀 이상해. 평소보다 훨씬 지저분해."
"지저분하다고?"
"어, 분명 평소처럼 휘둘렀는데 영 이상하단 말이지."
"포스트시즌이라고 힘 좀 줬나 보지."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뭐, 일단 참고는 해둘게."
랄로 가야르도.
욘 마르틴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를 보고 있자면 저 다저스의 케빈 체임벌린이나 양키스의 리암 루카스의 젊은 시절이 떠오른다. 지금은 은퇴를 앞둔 늙은 타자들이지만, 그들 역시 15년 전에는 저럴 때가 있었다. 과연 어디까지 뻗어 나갈 수 있을까를 기대하게 만드는 잠재력.
'하지만.'
수없이 많은 장래가 기대되는 젊은이들 가운데 리암 루카스나 케빈 체임벌린과 같은 높이에 오른 남자는 지난 15년 동안 오직 그 둘 뿐이다. 그런 장래성을 가진 수많은 타자가 욘 마르틴이라는 거인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엇보다.
젊은 시절의 리암 루카스나 케빈 체임벌린이라고 해도 오늘의 나는 넘어설 수 없다.
마운드의 욘 마르틴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93.1마일.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던진 오늘 그가 던진 공 가운데 가장 빠른 공이었다.
0.15초.
랄로 가야르도가 반응했다.
조금 더.
아직까지 공을 지켜 볼 시간이 남았다.
0.01초 단위. 찰나의 시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공을 살핀 그가 침착하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천재라는 표현이 딱 맞는 남자가 인이 배게 몸에 익힌 완벽한 타격 자세.
늙은 투수의 공이 강타당했다.
-딱!!
[맞았습니다!! 높게 퍼 올린 타구!! 우측!! 우측!!]
양키스의 우익수 에노모토 코이치가 빠르게 달렸다. 그린 몬스터가 버티고 선 보스턴의 좌측 외야는 좁다. 물론 그 넓이와 별개로 수비 난이도는 지옥 같지만. 반면 페스키폴이 버티고 있는 보스턴의 우측 외야는 폴대까지는 거리가 302피트(92미터)밖에 안되는 주제에 외야 자체는 380피트(115미터)로 상당히 넓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에노모토 코이치는 그 깊숙한 외야의 넓이에 감사했다.
잡을 수 있다.
21세기 NPB가 낳은 최고의 야구 선수. MLB에서는 우익수를 보고 있지만, NPB 시절 그는 최고의 중견수였다. 수비 범위 자체만 따지면 MLB의 모든 우익수 가운데 최고 수준이다. 게다가 수비 위치 역시 좋았다. 거포인 랄로 가야르도를 경계한 덕분에 상당히 뒤로 빠진 위치에서 대기 중이었다.
나지막한 우측 외야 담장을 짚은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뻐엉!!
아웃!!
아웃이었다.
1루를 향해 달리던 랄로 가야르도가 가볍게 혀를 찼다.
"쳇, 매튜 녀석 이야기를 해줄 거면 똑바로 이야기해줬어야지. 그냥 지저분한 게 아니라 커터였잖아."
마운드의 욘 마르틴이 모자를 벗어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다.
젊은 시절의 리암 루카스나 케빈 체임벌린? 젠장할. 잘못 생각했다. 저건 그 이상의 괴물이다. 빗맞은 타구를 담장 밖으로 날려 보낼 힘이라니.
하지만 그럼에도 욘 마르틴의 얼굴은 나쁘지 않았다.
'언제나 주인공을 빛나게 해주는 것은 커다란 고난이다.'
마운드에 성민이 올라왔다.
< 아메리칸 리그의 패자(5)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