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메리칸 리그의 패자(4) >
제이크 스컬리가 멍청한 사람이었다면 성민에게 감사했을 것이다. 인종차별은 큰 문제다. 양키스의 새로운 얼굴을 노리고 있는 제이크 스컬리에게는 더더욱. 성민은 외통수에 몰린 그를 구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혹은 똑똑한 사람이라면 감사하지는 않겠지만 성민을 적으로 두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인종차별이라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음에도, 굳이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는 위험한 상대를 적으로 둘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이크 스컬리는 멍청하지도 똑똑하지도 않은 보통 사람이었다. 게다가 속은 또 상당히 좁은 편에 속했다. 그렇기에 제이크 스컬리의 속은 웃는 얼굴과 달리 울화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리고 필 니크로는 그것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은 평범한 사람들의 눈과는 달랐으니까.
‘저 녀석 저거 아직 정신 못 차렸네요.’
-응? 너도 그게 보이냐?
‘얼굴만 웃으면 뭐 합니까. 아주 이를 부득부득 가는 게 여기까지 느껴지는데.’
-흐음, 그런 것 치고는 꽤 자연스러운 미소 같다만.
성민의 이야기에 필 니크로가 눈을 비비고 다시 살펴봐도 제이크 스컬리의 얼굴에는 여전히 상쾌하고 멋진 미소가 맺혀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생각했다. 이 녀석의 너클볼이 완벽의 경지에 가까운 수준이라면 인간을 파악하고 관계를 맺는 기술은 완벽을 넘어 이능에 가까운 어딘가에 도달한 것이 분명하다고.
제이크 스컬리가 타석에서 성민의 공을 기다렸다.
‘저 망할 새끼.’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벤치 클리어링 당시 먼저 도발을 감행한 것은 성민 쪽이었다는 것을. 억울함과 분노가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저 멍청한 앤드루 브라운 자식은 자신이 직접 사과까지 했음에도 천지 구분도 못 하고 날뛰고 있다. 녀석은 그저 제이크 스컬리의 인기를 부러워하는 열등감 덩어리에 불과하다.
아니, 제 놈도 눈이 있다면 거울을 보면 어째서 같은 플레이를 해도 사람들의 반응이 다른지를 알 수 있을 텐데 참으로 한심한 인간이다.
긴 휴식이 빛을 발한 탓일까?
초구.
1회 초임에도 90.1마일의 빠른 공이 존의 안쪽을 공략했다. 지난 9월 이후 성민이 던진 모든 공 가운데 가장 빠른 공이었다.
생각지 못했던 기습적인 속구에 제이크 스컬리의 방망이가 멈칫했다.
-뻐엉!!
“스트라잌!!”
그 엉거주춤함에 덕아웃의 선수가 몰래 웃었다. 보스턴이 아닌 양키스의 덕아웃. 앤드루 브라운이었다.
꼴 좋다.
자신의 타석이 돌아오지 않을지 모른다는 걱정보다 제이크 스컬리 녀석이 망신을 당하는 것이 더 기쁘다. 어쩌면 팀의 승리보다 제이크 스컬리가 제대로 활약하지 못하는 것이 더 기쁠지도 몰랐다.
마운드의 성민이 두 번째 공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제이크 스컬리의 시선이 성민의 얼굴을 포착했다. 입가에 걸린 미미한 미소. 그 순간 그가 직감했다. 이 새끼 이거 혹시?
돌이켜보면 모든 일의 시작은 그 빌어먹을 이퓨스였다. 그 공에 당한 이후로 뭔가 되는 일이 없었다. 방금 공은 성민이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속구였다. 그리고 본래 성공을 경험한 사람은 그 성공의 패턴을 반복하려 하는 법이다. 저 무의식적인 웃음이 의미하는 건 그게 분명하다.
높게 날아오는 느린 공.
제이크 스컬리의 방망이가 대비만 된다면 무조건 담장 밖으로 날려버릴 공을 준비했다. 그리고 두 번째.
-뻐엉!!
“스트라잌!!”
바깥쪽 높은 코스. 지금 성민이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공.
[2구 연속 루킹 스트라이크!!]
[김성민 선수 오늘 공이 참 좋은데요? 속구에 힘이 있습니다. 지금 구속이 90.7마일이 나왔어요.]
[시즌 막판으로 갈수록 90마일 이상의 공을 보기 힘들었는데 오늘은 1회 초부터 공이 상당히 빠르네요.]
[물론 메이저리그를 기준으로 하면 그리 빠른 공은 아니지만, 김성민 선수의 경우 빠른 공과 느린 공의 구속 차이가 상당하단 말이죠. 지금도 제이크 스컬리 선수가 느린 공을 기다리다가 당한 거거든요.]
“저, 저 병신같은 새끼. 아주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인종차별밖에 없지?”
“망할 자식이 대체 뭘 하는 거야!! 너클볼 투수가 속구를 던져주는데 그걸 못 받아먹는다고?”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양키스의 팬들이 분노했다.
반면 경기장에서 직관 중인 보스턴 팬들은 그야말로 축제가 따로 없었다. 그들이 느끼기에 이건 일종의 정의 구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 번째.
-부웅!!
“스트라잌!! 아웃!!”
그들을 진정으로 광란에 빠트릴만한 장면이 나왔다.
““와!!!!!””
45.3마일의 이퓨스.
준비할 땐 속구로 농락하고 요행을 버리고 커트를 해내겠다고 작정하자 들어온 그 이퓨스가 제이크 스컬리의 멘탈을 깨트렸다.
시뻘게진 얼굴.
타석에 들어설 때와는 사뭇 다른 그 얼굴에 필 니크로가 기어코 한 마디를 내뱉었다.
-역시 호구로구만.
덕아웃에 앉아있던 앤드루 브라운은 그 시뻘건 얼굴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대기 타석의 리암 루카스가 제이크 스컬리의 어깨를 툭 두들겼다.
“괜찮아. 아직 1회 초야.”
“네.”
하지만 제이크 스컬리에게 이야기한 것과 달리 리암 루카스의 본능이 소리쳤다.
‘이거 위험하다.’
성민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다. 무엇보다 저 녀석은 저런 기세를 타고 올라가면 무서운 줄 모르고 쭉쭉 치고 나가는 투수다. 보통은 부담감 때문에라도 좀 주춤하는 구간이 있기 마련인데 녀석은 그게 없다.
한 번 끊어줄 필요가 있다.
리암 루카스가 방망이를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가능할까?’
그의 마음이 대답했다.
‘가능하다.’
그래 그는 Mr. 양키스 리암 루카스였다. 그의 커리어에는 지금 성민 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대단한 투수들이 있었다. 언젠가는 패배했고 또 언젠가는 승리했다. 그리고 그렇게 15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
사람들은 리암 루카스를 위기의 순간에 항상 무언가를 해결해주는 양키스의 심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 아직은 힘이 남았다.
지난 올스타전. 가장 압도적인 피칭을 보이던 디아고 헤밍턴의 공을 담장 밖으로 넘겼던 것처럼.
여기서 무언가를 해결해줄 사람은 오직 나. 리암 루카스뿐이다.
필 니크로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성민에게는 잔소리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고요했다.
이제 절정기의 중심에 서 있는. 그렇기에 누구보다 강력한 이 사냥꾼은 가장 위험한 사냥감이 무엇인지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지킬 것이 있는 노련한 늙은 맹수.
발톱은 무뎌지고 이빨은 듬성듬성했지만, 아직 그 힘만은 남아있는 그 맹수를 향하여 사냥꾼이 자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를 내던졌다.
82.2마일.
빠른 너클볼.
필 니크로가 보기에 그것은 에노모토 코이치를 상대로 던졌던 그 완벽함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평소보다 확실히 공이 좋았다. 어쩌면 시즌을 치르면서 쌓인 경험과 긴 휴식으로 회복된 몸의 시너지 효과일 것이다.
리암 루카스의 방망이가 성민의 공을 건드렸다.
-딱!!
파울라인을 넘어가는 타구. 리암 루카스가 잠시 손을 들었다.
배트가 부러졌다.
막판의 움직임이 생각보다 훨씬 심했던 탓이다. 배트를 잡고 있던 손이 찡했다. 배트 보이가 미리 준비해둔 예비 배트를 가져다줬다.
장갑을 다시 동여매고 두세 차례 방망이를 휘둘렀다. 업체에서 엄선하여 50개 정도 납품한 방망이 가운데 고르고 고른 다섯 개의 방망이 중 하나였다. 거의 똑같은, 하지만 지금과 같이 신경이 쓰이는 상황에서는 그 미묘한 다름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리암 루카스가 다시 타석에 섰다.
두 번째.
성민이 또다시 자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를 사용했다.
파울.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역시 파울.
리암 루카스가 다섯 번째 공을 기다렸다.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공이다. 뭐 당연한 일이다. 너클볼이라는 범주로 묶이지만 모든 공의 움직임이 다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근 10년이 넘는 세월을 메이저의 최정상에 군림했던 이 시대의 지배자는 놀라운 재능과 그 재능에 더해진 풍부한 경험으로 성민의 너클볼에 조금씩 다가서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일종의 희열을 느꼈다.
풀리지 않는 난제의 정답에 가까워지는 듯한 감각. 어쩌면 다음, 그게 아니면 다음다음. 그의 의식이 점점 더 고양됐다. 비록 몸은 전성기보다 부족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종합적인 능력만 따진다면 리암 루카스의 커리어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히는 순간일 것이다.
그의 시선이 성민을 쫓았다.
마운드의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응?
그리고 그 순간 리암 루카스는 의문에 빠졌다. 아니, 그러고 보니 저 녀석 대체 왜 지금까지 계속 같은 공만 던지는 거지? 느린 너클볼은? 속구는? 게다가 스트라이크 존 밖으로 빠지는 공을 던져도 됐을 텐데? 설마 자존심 싸움인가? 그렇다면 지금 저 고갯짓의 의미는 뭐지? 계속 같은 공을 던지겠다는 표현일까?
성민이 또 한 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약간의 시간. 마침내 성민이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속임수인가? 아니면 정말 같은 공?
리암 루카스가 성민이 어떤 녀석인지를 생각했다. 대단한 투수, 놀라운 영향력, 흔들리지 않는 멘탈, 대담함. 그리고 영리함.
리암 루카스가 판단했다.
녀석은 멍청이가 아니다. 그리고 이번 경기는 포스트시즌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 지금 이 타석의 중요성은 녀석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존 밖으로 공을 하나 빼던지, 하여간 뭔가 다른 공을 던질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마운드의 성민이 다섯 번째 공을 뿌렸다.
83.4마일의 가장 빠른 너클볼을.
-딱!!
대비를 안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아지경에 가깝게 성민의 공을 쫓던 리암 루카스는 이미 없었다.
나이를 먹으면 떨어지는 것은 근육의 성능만이 아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열량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뇌 역시 마찬가지다. 이전이었다면, 20대 후반, 30대 초반 전성기의 리암 루카스였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잡상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그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38세의 리암 루카스는 아니었다.
마운드의 성민이 다섯 걸음을 옮겨 내야 뜬공을 가볍게 잡아냈다.
“아웃!!”
1회 초. 삼자범퇴.
펜웨이파크가 달아올랐다.
***
와일드카드.
그리고 디비전시리즈 3차전.
양키스의 에이스 욘 마르틴은 정규시즌 이후 두 번의 등판을 가졌다. 성민처럼 긴 휴식을 가질 수는 없었다. 양키스는 벼랑 끝 승부를 하고 있었고 욘 마르틴은 그들이 가진 가장 믿을 수 있는 카드였으니까.
사실 양키스의 감독은 1등마에게 5등마를 붙이고 싶었다. 그가 생각할 때는 그쪽이 확률이 더 높았다. 냉정하게 말해서 지금 양키스는 보스턴을 압도하지 못한다. 아니 지금 팀 케미가 개판인 점을 생각하면 부족하다.
하지만 경기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고, 양키스의 윗선 역시 양키스가 도망가는 이미지를 갖는 것보다는 패배하는 쪽이 더 ‘수익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뭐 그런 복잡한 뒷사정이야 아무 상관 없었다.
욘 마르틴에게 중요한 것은 이곳 펜웨이 파크에서 열리는 챔피언십 시리즈 1차전 마운드가 자신에게 맡겨졌다는 것뿐이었으니까.
< 아메리칸 리그의 패자(4)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