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46화 (247/287)

< 아메리칸 리그의 패자(3) >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챔피언십 시리즈 첫 번째 경기. 여기는 펜웨이 파크입니다.]

[마운드에 지금 우리 김성민 선수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지난 디비전시리즈에서는 8이닝 1실점이라는 선발 투수가 해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해주고도 패전 투수가 됐었죠? 하지만 오늘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오늘 상대는 양키스이기 때문이죠. 김성민 선수. 이번 시즌 정말 최고의 활약을 보였는데요. 그중에서도 지구 라이벌인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는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어요.]

양키스의 1번 타자 에노모토 코이치가 자신의 타석을 준비했다.

최근 양키스에서 벌어진 일종의 싸움에서 그는 일종의 부외자였다.

‘김성민······.’

그는 본래 제이크 스컬리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팀 동료인 그에게 대놓고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 않더라도 그 행동에서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기색이라는 것이 있다. 그가 제이크 스컬리를 처음 본 것이 벌써 4년 전 일이다. 녀석이 멍청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그것을 정말 입 밖으로 낼 줄이야.

덕분에 팀은 엉망이 됐다. 게다가 사안이 사안이었던 만큼 에노모토 코이치에게 모두 쩔쩔매기 시작했는데 그는 그것조차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성민에게 동정심이 생긴다든지 동질감을 느낀다든지 하는 것은 또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성민의 인터뷰를 보고 그 넓은 마음에 감탄할 때 그가 들은 생각은 ‘저 자식 지금 자기가 잘났다는 이야기를 엄청 돌려서 하고 있네?’ 였으니까.

그렇기에 지금 타석에 선 그가 생각하는 것은 이번 시즌을 끝으로 새로 얻을 FA 자격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리암 루카스가 사라질 양키스는 영 망조가 드는 것 같고, 돈이야 평생 쓰고도 남을 만큼 충분하다. 게다가 이제 나이도 30대 중반. 슬슬 은퇴 이후의 커리어까지 생각한다면 역시 반지를 노려보는 게 현명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저스가 베스트인데 거기에는 내 자리가 없을 것 같단 말이지.’

그렇다면 보스턴은 어떨까?

젊은 선수단. 양키스나 다저스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손에 꼽히게 큰 마켓 규모. 최소한 그가 자신의 은퇴 시기로 생각하는 3년 후 정도까지는 걱정이 없을 팀으로 보인다.

에노모토 코이치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 일단은 오늘 제대로 된 플레이를 보여주는 게 우선이겠지.’

자신은 있었다. 아마 리그에서 성민을 가장 많이 상대해본 타자를 꼽으라면 에노모토 코이치 본인일 것이다. 생소한 투수와 타자의 싸움에서 유리한 것은 투수다. 심지어 성민이 던지는 너클볼은 제대로 된 투수가 나온 것이 벌써 15년 전이다. 성민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기 전. 현역 타자 가운데 제대로 된 너클볼을 상대해본 타자는 없었다.

그렇기에 세상의 모든 타자 가운데 그를 가장 잘 상대할 수 있는 타자는 에노모토 코이치 자신이다. 포스트시즌에 들어섰음에도 야구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 하는 양키스의 다른 머저리들과 그는 다르다.

21세기 NPB가 배출한 최고의 천재 타자가 타석에 올라갔다.

[타석에 1번 타자. 에노모토 코이치 선수가 올라옵니다. 6년 전 NPB를 폭파시키고 제2의 스즈키 이치로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포스팅피 포함 6년 1억3천만의 천문학적인 금액에 계약을 했던 선수입니다. 4년 차까지는 금액에 비해서 조금 아쉽다는 평가가 많았습니다만 작년과 올해. 그 아쉬움을 모두 지울 만큼 대단한 활약을 보이며 결국 자신의 몸값 이상의 활약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올해로 32세. 아직 장기 계약 한 번은 충분히 더 끌어낼 수 있는 나이죠. 게다가 최근 2년의 성적이 워낙 좋았던 터라 올겨울 FA 시장 최대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포수 뒤편 관중석에는 조이 제임슨이 성민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바쁜 촬영 일정 가운데도 하루 시간을 내서 굳이 찾아와주었다. 심지어 워낙에 바쁜 터라 성민과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수도 없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자기 몫의 촬영이 있는 터라 경기가 끝나기 무섭게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또한, 펜웨이파크를 가득 메운 열광적인 보스턴의 팬들이 성민을 응원했다. 이게 대체 얼마만의 포스트시즌이던가. 심지어 상대는 뉴욕 양키스에 오늘 마운드에 오른 성민은 양키스 킬러다.

성민 역시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기대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좋으냐?

‘당연하죠.’

-이런 부담감을 즐기다니. 하여간 마린스가 애를 완전 변태로 만들어놨다니까.

필 니크로의 투덜거림에 성민이 입꼬리가 올라갔다. 함께 한 4년의 세월 동안 필 니크로가 성민을 파악한 만큼 성민 역시도 필 니크로를 파악했다. 이 투덜거림이야 말로 필 니크로가 성민에게 보낼 수 있는 가장 큰 칭찬이다.

‘현재 양키스에서 가장 컨디션이 좋은 타자다. 게다가 네가 원하는 기선제압을 위해서는 선두 타자가 가장 중요한 거 잘 알지?’

-끄응. 이 녀석이?

언제나처럼 이어질 필 니크로의 잔소리를 성민이 대신했다. 자신을 놀리는 말이었지만 필 니크로는 그것조차도 마음에 들었다. 언제까지나 잔소리가 필요할 것 같던 애송이가 이제는 제 몫을 확실히 하는 선수로 성장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난 디비전시리즈 1차전 등판 이후 8일 만의 등판이다.

게다가 정규시즌 막판 포스트시즌 등판 일정 조율을 위해 등판을 한 번 건너뛰기까지 했다. 물론 풀시즌을 치른 피로가 그것을 모두 씻겨 내려간 것은 아니었지만 현재 성민의 몸 상태는 9월 이후 가장 좋은 상태였다.

초구.

너클볼이 어디로 향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공을 받는 에두아르도 크루즈도 그 공을 기다리는 에노모토 코이치도. 옆에서 지켜보는 필 니크로도. 그리고 그 공을 던지는 성민 자신 조차도.

그렇기에 공을 던지는 순간 성민이 신경 써야 할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었다.

스트라이크 존을 향하여.

자신이 던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공을.

-아!!

필 니크로가 나지막하게 감탄했다. 이전에 그가 본인의 입으로 이야기했듯이 그는 사람의 몸을 CT나 MRI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이능이 있었다. 아니, 사실은 감히 그런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단한 능력이다. 여러 가지 부분에서 제한과 왜곡이 있는 그것들과 달리 필 니크로의 눈은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알 수 있었다.

이 공은 완벽하다.

아니, 아니지.

그건 너무 거만한 이야기다. 세상은 항상 상대적이고 완벽해 보이는 것은 더 완벽해 보이는 것에 깨지기 마련이니까.

그래, 다시 이야기하자면 이 공은 지금 성민의 몸으로 던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너클볼에 한없이 가깝다. 옛날 성민의 몸으로 필 니크로가 직접 시연을 보였던 그 너클볼만큼이나.

-아니, 이건 그 이상이겠구나.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3년 전과 비교하여 성민의 몸은 과장을 조금 보태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물론 30대에 접어든 나이답게 같은 상태를 유지한다면 매년 신체 능력은 1퍼센트 정도씩 감소한다. 하지만 단련의 정도가 다르다. 필 니크로가 만 3년에 걸쳐 ‘만들어 낸’ 성민의 몸은 그가 타고난 한계치까지 완성된 상태였다. 물론 지금보다 더 강한 힘을 내는 몸이 될 수도 있고, 지금보다 더 유연해질 수도 있으며 지금보다 더 빨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너클볼 투수’ 김성민에게 가장 완벽한 몸은 바로 지금, 이 상태다.

그렇기에 지금 성민이 던진 공은 필 니크로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너클볼이었다. 이 전설적인. 아니, 어쩌면 너클볼 그 자체인 투수조차도 젊어서는 기술적인 문제로, 나이가 들어서는 신체적인 문제로 던지지 못했던 그런 공 말이다.

-딱!!

에노모토 코이치의 방망이가 성민의 공을 건드렸다.

분명 방망이를 휘두르기 전까지는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방망이를 휘두르는 그 순간에는 오히려 확신했다. 쳐낼 수 있다고. 정타는 힘들겠지만 일단 쳐내면 일루까지 달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방망이가 공을 건드리기 직전. 성민의 너클볼이 다시 한번 움직였다. 마치 방망이의 움직임을 피하기라도 하듯이.

빗맞은 타구가 유격수 정면으로 향했다.

“좋았어!!”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동엽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상 최악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한 덕분에 모그룹의 높은 분들이 ‘그건 선수들의 정신상태 문제다!!’ 라고 하며 풀시즌을 뛴 주전 선수들을 대상으로 기획했던 지옥의 마무리 캠프는 현 사장인 송원경이 그나마 정신이 제대로 박힌 덕분에 극적으로 무산됐다.

덕분에 동엽은 생방송으로 성민의 경기를 챙겨보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그래!! 그렇지. 유격수가 그런 기본적인 공도 처리 못 하면 유격수 접어야지.”

동엽이 누군가, 그러니까 예컨대 필 니크로라던가 필 니크로 같은 사람이 듣는다면 ‘지금 유격수 은퇴하겠다는 소리냐?’라고 반문할만한 소리를 태연하게 내뱉었다.

다행스럽게도 TV 속의 루시 알베리는 은퇴할 생각 따윈 전혀 없었는지 가볍게 공을 받아 일루를 향해 던졌다. 쉬운 수비, 그리고 가벼운 동작이었지만 같은 유격수의 눈으로 보니 그 기량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 녀석 삐쩍 말라 보이는데도 어깨는 굉장하네. 게다가 글러브에서 공 뽑는 것도 무슨 공이 저절로 튀어나오는 느낌인데? 역시 메이저리거다 이건가. 만약 나라면 한걸음 내디디고 던졌으려나?”

동엽이 자신도 모르게 루시 알베리와 자신의 플레이를 비교했다. 압도적인 꼴찌 팀에서 뛰었음에도 유격수 골든글러브 후보인 동엽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루시 알베리와 비교하니 여전히 부족했다.

“저 녀석 이제 1년 차 애송이일 텐데. 게다가 저런 수비로도 시즌 초에는 빅리그 뛸 기량 안된다고 마이너 내려갔다고? 에휴. 메이저리그 진짜 수준 더럽게 높네.”

그리고 성민은 그 더럽게 수준 높은 메이저리그에서 저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새삼스럽게 자신과 함께 뛰었던 그의 실력에 체감됐다. 동시에 메이저리그의 높은 벽 역시도.

하지만 동엽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은 루시 알베리와 그의 나이 차이는 고작 두 살이라는 점. 그리고 시즌 초 마이너에 떨어졌던 루시 알베리와 지금의 루시 알베리가 보여주는 수비는 천지 차이라는 점이었다.

박동엽이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그래. 어차피 나 포스팅만 하려고 해도 앞으로 몇 년이 남았는데 무슨 메이저리거랑 플레이를 비교하고 그러냐.”

하지만 그런 혼잣말과 달리 그의 시선은 여전히 루시 알베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방송국 카메라만 30대 이상.

각종 언론의 카메라와 스마트폰 카메라들까지 하면 이번 월드시리즈에 사각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타석에 들어선 제이크 스컬리가 거울을 보고 수도 없이 연습한 미소를 지었다.

완벽했다.

그리고 그 완벽한 미소에 필 니크로가 반응했다.

-호구가 왔군.

< 아메리칸 리그의 패자(3) > 끝

ⓒ 묘엽

작가의 말

조금 안좋은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른손 약지를 다쳤는데 병원을 갔더니 골절이라고 깁스를 해주더군요...

당분간은 주말에는 푹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주 6일 연재에서 주5일 연재로 변경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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