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44화 (245/287)

< 아메리칸 리그의 패자(1) >

이번 시즌을 살펴보면 아메리칸리그 중부지구는 말 그대로 동네북이었다. 지구 1위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승리는 동부지구 지구 3위인 토론토 블루제이스보다 1승이 적고 서부 지구 2위인 시애틀 매리너스보다 4승이나 적었다.

디비전시리즈는 지구 1위 팀 중 승률 1위 팀과 와일드카드 승리 팀이. 그리고 승률 2위 팀과 3위 팀이 맞붙는다. 와일드카드로 출장한 2개 팀이 중부지구 1위 팀보다 승률이 높다. 시즌 막판 서부지구 1위 팀인 텍사스 레인저스가 분발해준 덕분에 보스턴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라는 꿀을 빨게 됐다.

힘들게 승률 1위를 기록한 텍사스 레인저스는 와일드카드를 이기고 올라온 뉴욕 양키스를 상대하게 됐는데 그나마 다행이라면 양키스가 1선발인 욘 마르틴을 이미 소모했다는 정도였다.

“젠장.”

하지만 살다 보면 가끔 그런 날이 있다. 꿀물인 줄 알고 시원하게 들이켰는데 짜디짠 소금물인 그런 날. 앞만 보고 열심히 걷다 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그런 재수 없는 순간. 물론 듣는 돌부리로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명백히 그런 돌부리였다.

디비전시리즈 1차전.

성민은 사람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치에 걸맞은 훌륭한 활약을 선보였다.

8이닝 1실점. 7회에 허용했던 행운의 홈런 한 방을 제외한다면 나무랄 것이 피칭이었다. 선발 투수로써 자신의 몫을 충분 이상으로 해낸 셈이다. 문제는 타선이었다.

-아니지, 이건 보스턴 타선을 탓하기도 애매하군.

“그러게요.”

이번 시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그리 강한 팀이 아니었다. 아마 동부지구나 서부지구에 있었다면 3위를 하기도 벅찬 전력이었을 것이다. 특별히 어딘가가 구멍이라서가 아니다. 페이롤 9,200만 달러의 이 팀은 그 페이롤에 걸맞게 전체적인 수준 자체가 낮았다. 보통 이런 팀이 포스트시즌에 나가거나 우승을 노리려면 서비스 타임을 수행 중인 유망주 가운데 누군가가 폭발을 해야 하는데 딱히 그런 것도 없었다. 중부지구 1위 팀임에도 불구하고 올스타에 선발된 선수는 딱 하나. 오늘 선발로 출장한 롭 카민스키 뿐이었다.

올해 나이 31세. 작년에 연평균 1,200만 달러로 5년을 계약한 그는 이번 시즌 딱 그 연봉에 걸맞은 활약을 보였다. 현재 보스턴의 3선발인 브라이언 보일과 비슷한 수준의 성적을 거뒀다는 뜻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장담하건대 오늘 그가 보여준 피칭은 이번 시즌, 아니 그의 커리어 모든 피칭을 통틀어 가장 훌륭했다. 그는 보스턴의 핵 타선을 7이닝 무실점으로 막아냈다.

물론 그것이 순전히 그의 피칭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물론 볼넷을 하나도 주지 않은 것은 대단했지만, 그가 7이닝 동안 잡아낸 삼진은 고작 세 개뿐이었다. 잘 맞은 타구는 야수 정면으로 향했고, 어찌어찌 출루에 성공하면 병살이 이어졌다. 7이닝 동안 병살만 무려 네 개. 그야말로 하늘이 작정하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돕는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 경기였다.

[디비전시리즈 1차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보스턴 레드삭스를 2:0으로 격파!!]

분위기가 달라졌다.

사실 보스턴의 선수들은 디비전시리즈는 상당히 낙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보스턴의 기세는 너무 좋았다. 그 양키스를 누르고 지구 우승을 차지했는데 기세가 좋지 않다면 이상하다. 선수들의 마음에는 자신감이 가득했었다.

그리고 1차전 패배가 그 자신감을 깨트렸다.

-이건 영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젊은 애들인 만큼 빠르게 달아오르지만, 또 그만큼 빠르게 식어버려.

‘뭐, 절대 지지 않을 거라고 믿던 에이스 카드를 내고 패배했으니 충격을 받을 만도 하죠.’

-네 입으로 너 자신을 절대 패배하지 않을 것 같은 에이스라고 하는 거 부끄럽지 않냐?

‘사실인데 부끄러울 게 뭐가 있습니까.’

딱히 지금 상황의 해결책을 묻지는 않았다.

녀석에게는 항상 방법은 있었으니까.

-탕!!

오른 어깨에 아이스팩을 칭칭 감은 성민이 왼손으로 자신의 라커를 두들겼다.

“자자, 다들 여기 좀 보라고. 왜 그렇게 울상이야.”

“응?”

“성민?”

분명 성민은 에이스였고, 종종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긴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공개적으로 모두의 주목을 끄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연패를 이어가던 순간에도, 그 연패를 끊었던 날에도, 역사적인 기록을 망친 날에도, 위대한 기록을 세운 날에도. 성민은 항상 조용히 자신의 플레이로 이야기하던 그런 남자였다.

“매튜, 지난번에 네가 했던 홈런 이야기 기억나? 그 평균 말이야.”

“어? 홈런? 평균?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바보야. 그때 네가 오늘 홈런 치려고 어제 좀 못 쳤던 거라는 이야기했었잖아.”

“아, 맞다. 그랬었지.”

랄로 가야르도의 핀잔에 매튜 쿠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교를 정상적으로 나온 사람이라면 매튜의 저 이야기가 얼마나 헛소리인지는 다들 잘 알 거요. 매튜와 랄로도 우리 웃으라고 한 이야기였을 테니까.”

“정말? 내가 생각할 땐 저 둘은 진짜 진지했던 것 같은데.”

“이봐, 맥스. 진짜 바보한테는 바보라고 놀리면 못 써. 듣는 진짜 바보들이 상처받는다고.”

“루카스, 내가 듣기엔 네가 더 악당 같은데?”

맥스 슈피겐과 루카스 버튼이 성민의 말에 한마디씩을 보탰다. 랄로 가야르도와 매튜 쿠퍼의 얼굴이 조금 달아오르기는 했지만, 그 대신 축축하게 처져가던 분위기가 조금은 괜찮아졌다.

성민이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 보자면 매튜와 랄로의 이야기에서도 배울 구석은 있어.”

“맙소사. 성민. 너 설마 바보 병이 옮은 거야?”

“그거 약도 없는 병인데.”

성민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 일단 좀 들어보라고. 어떤 부분에서 둘의 이야기에서 배울 구석이 있는지 말이야. 다들 잘 알고 있을 거야. 타율이 2할 5푼이라고 3타석 연속 못 쳤으니 다음 타석에서 무조건 친다는 건 어림도 없는 생각이라는 거. 독립시행이 과거의 영향을 받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그렇지.”

“하지만 동시에 다들 잘 알고 있을 거야. 한번 슬럼프에 빠지면 그게 한, 두 경기로 끝나지 않는다는 거. 또한, 좋은 컨디션 역시 한, 두 경기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열 번 중 세 번을 치는 타자라도 일곱 타석 연속으로 삼진을 당하고 세 번을 몰아칠 수 있잖아. 매튜와 랄로의 이야기에서 배울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야.”

“그 부분?”

“긍정. 오늘의 실패에 굴하지 않고 그걸 도약을 위한 도움닫기로 생각하는 저 긍정적인 마음 말이야. 세계 최고의 타자라도 열 번의 기회에서 다섯 번을 이길 수 없고, 야구는 원래 세 번의 싸움에서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지고. 나머지 한 번으로 승부가 결정되는 스포츠야. 우리는 누구보다 승리를 갈구하지만, 누구보다 패배를 자주 접하는 사람들이야. 그렇기에 가장 훌륭한 야구 선수는 가장 훌륭한 패배의 관리자여야만 해.”

매튜 쿠퍼와 랄로 가야르도가 어깨를 으쓱했다.

‘야, 지금 성민이 뭐라고 하는 거냐?’

‘그냥 좋은 말 하고 있잖아. 너랑 내 칭찬이야.’

‘확실해?’

‘어, 확실하니까 조금 더 잘난척해도 될 거야.’

성민이 선수들을 돌아봤다. 성민을 제외한 스물네 명의 선수들. 그들과 짧게나마 일일이 시선을 마주했다.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성민을 바라보며 엄지를 들어 올렸다. 이 분위기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우리는 가장 격렬했던 동부지구를 제압했어. 우리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 뻗어나갈 수 있다는 건 정규시즌에 충분히 증명했어. 그리고 이제 우리는 패배를 관리할 수 있는지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 앞에 섰어. 그리고 내가 생각할 때 아메리칸리그에서 가장 훌륭한 팀은 우리 보스턴이라고 생각하는데. 너희들 생각은 어때? 아메리칸리그에서 가장 훌륭한 팀은 누구지?”

선수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보스턴, 보스턴, 보스턴. 보스턴!!””

“패배를 가장 능숙하게 관리할 수 있는 팀은 누굴까?”

““보스턴, 보스턴, 보스턴. 보스턴!!””

“그렇다면 아메리칸리그를 대표할 수 있는, 그리고 저 마지막 커미셔너 컵을 들어 올리기 가장 어울리는 팀은 누구지?”

““보스턴, 보스턴, 보스턴. 보스턴!!””

이성을 갖고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논리는 엉망이고 근거는 빈약하며 온통 주장에 주장뿐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엄밀하고 정교한 논리가 아니다. 그것은 가슴을 쿵쿵 뛰게 만드는 감정의 호소다.

지난 시간 동안 성민이 쌓아 온 모든 것이 그의 이야기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부여했다.

오늘의 패배는 더 이상 그들의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두 번을 더 패배하면 올해의 야구가 끝난다는 생각 역시 사라졌다.

그들은 양키스를 이긴 동부지구의 패자이며 아메리칸리그를 대표할 수 있는 유일한 팀이었다.

성민이 슬쩍 시선을 돌려 내일의 선발로 예고된 라만 그레고리를 바라봤다. 얼굴이 살짝 상기된 그가 슬쩍 손을 들어 감사를 표시했다. 이제 FA를 앞둔 경험 많은 선발 투수조차도 성민의 이야기에 흥분했다. 그 옆에 선 브라이언 보일은 매튜나 랄로 같은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보스턴을 연호하고 있었다.

‘애송이들이라서 빠르게 식어버리는 게 뭐 어떻다고요?’

분위기를 타고 빠르게 식는 게 문제라면 다시 빠르게 달아오르게 해주면 그만이다. 라는 저 뻔뻔한 태도에 필 니크로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건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아니, 방금 패배로 축 처진 팀을 순식간에 이런 열광적인 분위기로 바꿔버리다니. 하지만 이 성민이라는 녀석이 지금까지 세 치 혀로 벌인 수많은 일에 비하자면 이건 사실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100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괴벨스와 좋은 경쟁자가 됐을지도······.

2차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1차전의 승리를 통해 기세를 몰아 시리즈에 승리하겠다는 자세로 전력을 다해 덤벼왔다. 객관적인 전력은 분명 보스턴 쪽이 우위였다.

하지만 10번을 싸워 3번을 이길 수 있는 팀도 3번을 몰아받는다면 승리할 수 있는 게 단기전이다. 게다가 기세라는 것이 있다. 5전 3선승제에서 2차전까지 잡을 수 있다면 팔부능선은 넘은 것이나 다름없다.

확실히 어제보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타자들의 기세는 매서웠다.

라만 그레고리는 좋은 투수였지만 7이닝 동안 3실점으로 막아낸 것도 충분히 호투했다고 평가할만한 수준이었다. 어제의 결과가 2:0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7이닝 동안 3점은 상당히 괜찮은 득점이었다.

하지만 두 가지 조건이 달랐다.

오늘 클리블랜드의 선발은 인생 최고의 피칭을 펼친 롭 카민스키가 아니었다는 점. 그리고 보스턴의 대포들은 어제보다 훨씬 더 매서웠다는 점이었다.

무려 14:3 대승리.

그리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홈으로 옮겨 벌어진 3차전과 4차전.

보스턴은 패배하지 않았다.

[보스턴 레드삭스, 디비전시리즈 3:1 승리!! 이제 반지까지 남은 승리는 오직 여덟 번!!]

< 아메리칸 리그의 패자(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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