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어 맞는 매가 더 아프다(7) >
긴 시간이었다.
사실 토니 이시카와의 이야기처럼 당장 터트리려면 얼마든지 터트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성민은 부산 마린스와 LA 다저스 그리고 보스턴 레드삭스를 경험했다. 그중 부산 마린스와 LA 다저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했다. 물론 경기의 질로만 따지자면 부산 마린스와 더 유사한 건 보스턴 레드삭스 쪽이다. 그 두 팀의 공통점은 리더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물론 LA 다저스는 파벌은 존재하지만 어쨌거나 케빈 체임벌린이라는 절대적인 리더 아래 하나로 뭉친 팀이고, 부산 마린스는 박태경이라는 절대적인 리더가 자기 계파만 챙기는 개판인 팀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런 팀들의 공통점은 외부에서 찾아오는 위기에 강하다는 점이다.
양키스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그 이상이다. 양키스의 캡틴인 리암 루카스는 명예의 전당을 진작에 예약한 남자다. 모든 팀원은 그를 신뢰한다. 외부의 위협이 다가오면 그를 중심으로 똘똘 뭉칠 것이다.
물론 성민이 원하는 것이 단순히 제이크 스컬리에게 엿을 먹이는 일이었다면 굳이 이렇게 공을 들일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성민이 원하는 것은 지구 우승. 그리고 운이 따른다면 디비전 시리즈나 챔피언십 시리즈까지도 좀 편하게 가는 일이었다.
괜히 섣불리 건드렸다가 그들끼리 똘똘 뭉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야말로 최악이다.
“이제야 제가 원하는 대로 됐네요.”
앤드루 브라운이 벌금에 대해 반발하고 녀석이라는 대명사로 제이크 스컬리를 저격했던 그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의 여론은 여전히 앤드루 브라운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평소 앤드루 브라운과 제이크 스컬리에 대한 대중의 호감도가 그만큼 크게 차이 났다는 의미다.
결국, 앤드루 브라운은 하지 않으려던 할 이야기까지 입 밖에 낼 수밖에 없었다.
[앤드루 브라운 ‘지금 팀에서 징계를 내려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다. 모든 일의 원인은 제이크 스컬리.’]
문장만 본다면 앞서 이야기와 크게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 문장과 함께 올린 이미지가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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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보스턴 레드삭스의 제롬 스튜버츠가 올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재키 로빈슨 데이의 유니폼이었다. 물론 그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은 앤드루 브라운 본인이었지만 그 사진과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만큼 멍청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앤드루 브라운은 그 벤치 클리어링에서 인종차별 단어를 사용했고, 팀에 불화에 원인을 제공했던 것이 제이크 스컬리라고 주장한 것이다.
앤드루 브라운은 이걸로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사건의 시작은 제이크 스컬리의 인종차별 멘트였고 그런 주제에 언론에 그딴 인터뷰를 해서 클럽하우스 분위기를 싸하게 만든 것도 제이크 스컬리였다.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지금까지 앤드루 브라운에게 쏟아지던 모든 비난은 제이크 스컬리에게 쏟아짐이 마땅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각처럼 그렇게 합리적이지가 않지
“아뇨, 어쩌면 사람들이 진짜 합리적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걸지도 모르죠.”
-진짜 합리적이라고? 이 미친 집단의 광기가?
성민의 이야기처럼 어쩌면 이런 비합리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합리성일지도 몰랐다.
사실 생각하는 것은 피곤한 작업이다. 생각을 포기하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은 편하다. 집단이 되어 스스로 생각하는 대신 타인의 판단을 무조건적으로 믿는다. 그게 잘못된 행동이라고 해도 어차피 자신에게 돌아오는 피해는 미미하고 그 순간 누군가를 비난하는 즐거움은 크다.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 녀석 말을 어떻게 다 믿음? 자기가 몰리니까 헛소리하는 거잖아.-
-근데 정황 증거를 보면 앤드루 말이 다 맞는 것 같은데?
그렇기에 사람들은 스스로 상황을 살펴 판단하는 대신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믿었다.
-제이크 말 믿는 돌대가리들 잘 봐라. 이게 그날 벤치 클리어링 영상이다.-
-이게 뭐? 제이크는 그래도 앞장서서 싸우기라도 했지. 앤드루 저 돼지 새끼는 덩치가 아깝네.-
-눈이 있어도 보질 못하네. 3분 17초 잘 봐라. 성민이랑 제이크 스컬리 주변 사람들 반응을. 순간 다들 제이크랑 성민 쪽 보는 거 안보이냐?-
-그게 뭐 어떻다고? 둘이 제일 심하게 싸우니까 보는 거잖아.-
-멍청한 소리 좀 작작 하고. 다들 자기 싸움하는데 옆을 어떻게 신경 쓰냐? 저건 누가 봐도 저건 저기서 제이크 스컬리가 인종차별 단어 써서 다들 놀라서 보는 거잖아.-
누군가는 제이크 스컬리를, 누군가는 앤드루 브라운을. 그 싸움은 서로를 상처입혔고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더 심각한 비난으로 확대됐다.
외부의 위기는 팀을 더 단단한 하나로 만든다. 하지만 내부의 분열이라면? 만약 부산 마린스였다면 해결책은 간단했을 것이다. 그곳은 팀 내에도 두 개의 집단이 존재하는 곳이었으니까. 하나를 선택하여 내부로 만들고 하나를 외부로 돌려 내부의 단합을 꾀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효율적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별개의 문제였지만.
하지만 양키스는 그럴 수 없었다.
보스턴이 단독으로 지구 우승을 결정 짓는 데는 여덟 경기까지도 필요 없었다.
고작 네 경기.
1승 3패와 3승 1패
성민의 등판이 돌아오기도 전에 보스턴은 동부지구 우승을 ‘거의’ 확정지었다.
“자기, 축하해.”
“뭘 벌써 축하를.”
“이제 4경기 남았는데 2경기 차이고. 지금 양키스 분위기 엉망이라며. 이 정도면 우승 확정 아니야?”
조이 제임슨의 이야기에 성민이 웃었다.
“그러니까 ‘벌써’라는 거야. 그 축하는 좀 아껴 둬. 한 달 있다가 받도록 할 테니까. 너희도 드라마 시청률 8위 했다고 축하받는 건 좀 뻘쭘하잖아.”
“그게 그렇게 되는 거야?”
확실히 30개 팀 가운데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는 팀은 무려 8개 팀이니 어떻게 보면 성민의 말도 맞는 말이다.
“아, 맞다. 그리고 그 개자식이 던진 말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지금 내 주위에도 그거 묻는 애들 굉장히 많거든? 도움 필요하면 말만 해. 그 자식 아주 미국에서 고개도 못 들게 해줄 수 있으니까.”
“와, 이거 엄청 든든하네.”
단순한 호언장담이 아니었다.
그녀는 헐리웃에서도 메인스트림에 올라탄 배우다. 영화의 단독주연급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통통 튀는 로맨틱 코미디의 젊은 여자 주인공으로는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헐리웃의 이십 대 이하 젊은 여배우들로 줄을 세운다면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지 않을까?
그런 배우와 어울리는 연예인들의 수준이 어떨지는 안 봐도 뻔하다. 성민의 팔로워가 이제 2천만에 가깝다지만 그녀와 어울리는 연예인들 가운데는 팔로워만 1억을 넘긴 사람 역시 몇이나 된다. 당장 조이 제임슨 자신도 팔로워 숫자가 3천만에 가깝다.
“하지만 괜찮아. 안 그래도 이제 슬슬 인터뷰할 생각이었거든.”
“인터뷰?”
지금까지 성민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기자는 수도 없이 많았다. 아니, 성민만이 아니었다. 보스턴의 선수단 역시 굉장히 많은 요청을 받았다. 당연하다 인종차별은 예민한 문제고 뉴욕 양키스는 메이저리그, 아니 미국의 모든 스포츠팀 가운데서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기팀이다. 그런 양키스가 지금 인종차별을 했느니, 안 했느니 하는 이야기로 시끌벅적하다.
아니, 단순히 시끌벅적한 것을 넘어 이제는 팬덤 자체가 분열되어 서로를 비방하는 지경이다. 최근 성적 역시 1승 3패를 기록하며 150경기 가깝게 이어오던 지구 1등을 내어주고 막판 역전을 허용했다.
그 모든 일의 원인이 되는 사건에 대하여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어, 네 말처럼 정규시즌 우승도 거의 확정인 상황이라 팀에서도 아마 내 등판을 한 번 건너뛰고 디비전시리즈 1차전 등판을 시킬 것 같으니. 사실상 내 시즌도 끝났잖아. 그러니 이제는 이야기해도 될 것 같아서.”
“글쎄, 그냥 자기는 입 다물고 있고 주변에서 계속 떠들어주는 게 그림이 더 좋지 않아? 양키스랑 보스턴 사이도 있고, 지금 양키스 상황도 안 좋은데 괜히 자기가 나서서 한 마디 내뱉으면 양키스 팬들이 앙심만 품을 것 같은데.”
필 니크로가 고개를 저었다.
-성민아, 조이가 너를 너무 1, 3, 5, 7, 9로 보는구나.
‘1, 3, 5, 7, 9요?’
-띄엄띄엄 본다는 뜻이다.
‘아니, 대체 어디서 그런 해괴한 말들은 알아 오시는 겁니까.’
-인터넷은 정보의 보고지.
언어의 사용은 조금 이상했지만, 필 니크로야말로 성민을 제대로 봤다.
성민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네?”
성민의 이야기에 기자들이 눈을 크게 떴다.
인종차별은 아주 오랜 시간 미국 사회의 가장 큰 이슈였으며 그것은 2034년인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런데 그런 대단한 문제를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라니.
“잠시만요. 김성민 선수, 지금 그 말씀은 굉장히 위험한 발언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 그러니까 초등학교 때 즈음의 이야기입니다. 전 반에서 운동을 굉장히 잘하는 아이였습니다. 달리기만 하면 1등이었죠. 그리고 반에는 허약하게 태어나서 여자애들보다도 달리기를 못 하는 남자애가 있었습니다.”
“김성민 선수?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성민이 기자들의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아이는 정말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결국 여섯 명이 달리는 운동회 달리기에서 꼴찌를 했죠. 전 엄마에게 달려가 자랑했습니다. ‘엄마, 쟤는 그렇게 연습을 했는데도 꼴찌고, 난 별로 연습하지 않았는데도 1등이다.’ 라고요. 그랬더니 어머니가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아십니까?”
“아니, 김성민 선수. 지금 중요한 건 제이크 스컬리 선수가 그런 발언을 했는지 안 했는지, 그리고 그에 대한 김성민 선수의 생각입니다.”
마이크를 자신의 앞으로 바짝 끌어온 성민이 어설프게 그의 엄마 목소리를 흉내 냈다.
“‘성민아, 그건 조금도 자랑스러워할 게 못 된다. 사람에게 중요한 건 어떻게, 무엇을 갖고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살아가며 어떻게 무엇을 얻었느냐다. 넌 태어난 그대로 달렸을 뿐이지만, 저 아이는 자기 힘으로 몇 걸음이나 빠르게 골라인을 통과한 거야. 넌 저 아이보다 몇 걸음 뒤처진 거란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사실 그 당시에는 많이 화가 났습니다. 아니, 1등을 한 건 나인데 왜? 하지만 살다 보니 알게 되더군요. 오직 타고난 것밖에 남에게 자랑할 것이 없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요. 저희 어머니께서 저에게 해주신 말씀은 저를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의 프로리그를 거쳐 이곳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에이스로 뛰는 저는 남들보다 훨씬 많은 걸음을 걸어온 것 같군요. 저희 어머니의 말씀대로 하자면 전 모두의 부러움을 사야 하는 상황이 아닐까요?”
그것은 분명 그들이 원하던 답이 아니었다. 그런 말을 들었다는 뉘앙스는 있었지만, 양키스에서 이뤄지는 저 지루한 공방을 확실히 끝낼 수 있는 답안도 아니었다.
하지만 성민의 이야기에는 기이한 울림이 있었다. 그것은 논리적인 설득력을 넘어 그의 인터뷰를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에게 특별한 감정을 선물해주었다.
최소한 그 순간 성민의 인터뷰를 지켜본 사람들은 그가 인종차별을 당했는지 안 당했는지를 궁금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그가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이루고 있는지에 더 집중하게 됐다.
그리고 성민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성민아. 내가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는데. 사실 아니지? 어차피 원하던 대로 양키스는 엉망이 됐으니 굳이 그 자식 더 망신을 주느니 네 이미지나 챙기겠다 뭐 그런 거지?
성민의 오른쪽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보스턴 레드삭스 동부지구 우승 확정!!]
< 벌어 맞는 매가 더 아프다(7) > 끝
ⓒ 묘엽
작가의 말
어제 회차의 댓글들은 모두 잘 읽었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그만한 기세의 팀이 망가지는데는 이런 이야기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과했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생각하고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잘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