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어 맞는 매가 더 아프다(6) >
승리는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마법 봉과도 같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화장과 조명 그리고 필터와도 같다고 해야 할까? 그것은 그야말로 흔녀가 미녀가 되고 흔남이 훈남이 되는 마법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 마법이 걸리는 순간보다 그 마법이 사라지는 순간은 더 극적이다. 사람들이 괜히 업그레이드는 체감하지 못해도 다운그레이드는 확 실감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랄까?
[뉴욕 양키스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8:6 아쉬운 패배!!]
[보스턴 레드삭스 마침내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공동 1위로 올라서다!! 탬파베이 레이스를 상대로 9:3 승리!!]
뉴욕 양키스가 볼티모어 오리올스에게 패배했을 때, 보스턴 레드삭스가 탬파베이 레이스를 상대로 승리를 했다.
마침내 단독 지구 1위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양키스 팀 내 분위기만 따지자면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다. 어쨌든 제이크 스컬리는 사과했다. 그리고 그들의 승률은 여전히 훌륭했고 이제 공동 1위가 됐을 뿐, 아직 뒤처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보스턴 레드삭스 팬들은 이번 공동 1위를 마치 축제처럼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뉴욕 양키스 팬들은 달랐다.
공동 1위라도 밑에서 추격한 것과 따라 잡힌 것은 느낌이 다르다. 양키스는 시즌 내내 지구 1위를 놓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팬들이 받은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다.
“망할 놈들 같으니. 이제 고작 일곱 경기 남았는데 이걸 결국 따라잡히네.”
“지난번 시리즈 스윕 당하는 순간부터 예고된 거였지 뭐. 클럽하우스 분위기가 콩가루라는데 어디 경기라고 제대로 할 수 있겠어?”
“그래도 제이크 스컬리 복귀하고 분위기 괜찮았잖아.”
“아무리 그 친구가 대인배라고 해도 그렇게 옴팡 뒤집어썼는데 마냥 괜찮을 리가 있겠어? 게다가 팀 분위기를 개판으로 만든 놈은 여전히 잘 뛰고 있잖아.”
“팀 분위기를 개판으로 만든 놈? 그거 누군지 나왔어?”
“공식적으로 말이 나온 건 아닌데, 정황상 뻔하지. 문제아 녀석 아니겠어? 그 녀석 딱 봐도 남부 꼴통이잖아.”
“하긴 그 녀석이면 인종차별도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할 인상이기는 하지.”
대부분 사람은 그렇다.
“일정 이상의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걸 꼭 누군가에게, 그것도 편한 상대에게 전가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죠.”
-그건 또 무슨 헛소리냐?
“뭔가 문제가 생기면 자기가 생각할 때 합리적인 원인을 찾는다는 겁니다. 양키스는 시즌 내내 단독으로 1위를 달려왔죠. 결국, 공동 1위를 허용한 것은 보스턴이 강해서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양키스 내부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그들에게는 더 편한 일이라 이겁니다.”
성민의 이야기처럼 양키스의 팬들은 이번 패배를 팀 내부에 분란을 일으키는 누군가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그 대상은 앤드루 브라운을 비롯한 몇몇 인기 없는 선수들이었다.
처음에는 참았다. 그는 이미 서비스 타임을 다 채우고 FA를 통해 양키스에 온 베테랑이다. 그가 양키스를 선택한 것은 물론 첫째는 많은 돈이지만, 두 번째는 반지 때문이다. 그는 제이크 스컬리 같은 애송이와 똑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망할 새끼야.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하고, 사과를 못 하겠으면 사퇴를 해야지!!-
-오늘 공 놓치는 거 잘 봤다. 아주 2, 3루 간이 프리패스더라?-
-너 때문에 제이크가 고생하는 거 안쓰럽지도 않냐?-
-돼지 새끼 살이나 좀 빼라.-
-인종차별 단어 부끄럽다. 그냥 인정하고 사과를 해라.-
SNS라는 것이 그렇다.
분명 들어가 보면 욕이 가득할 게 뻔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읽고 싶어진다. 그리고 분노와 후회에 휩싸인다. 아니, 대체 내가 뭘 잘못 했다는 거지? 그리고 제이크 스컬리가 고생이라니. 애초에 그 공은 그 녀석이 잡아야 공이었는데? 게다가 살을 빼라니. 골격이 좀 굵을 뿐이지 이래 봬도 체지방률 15%에 근육 덩어리다.
억울한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다행히 집에는 예전에 사둔 맥주가 몇 캔 남아있었다. 그래 맥주는 술도 아니다. 그냥 음료수일 뿐이다. 속도 타들어 가는 데 시원한 맥주라도 몇 캔 마셔야겠다.
어? 근데 생각보다 양이 너무 적네? 이거 입가심도 안 된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브랜디가 좀 남은 게 있었는데 딱 한 잔만 마실까?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앤드루 브라운의 스마트폰은 이미 난리가 나 있었다.
-그래,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하고, 사과를 못 하겠으면 사퇴를 해야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넌 인생을 좀 사퇴해주는 게 어떻겠냐?-
-야구를 니 감으로만 보지 말고 가서 스탯캐스트로 제공하는 숫자나 좀 읽고 와라. 고등학교만 졸업했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가득하니까. 아, 쏴리. 생각해보니 네깟 놈이 고등학교나 제대로 나왔을 리가 만무하겠구나.-
-그러는 네 놈은 너 때문에 너희 부모님이 고생하는 거 안쓰럽지도 않냐?-
-응, 넌 거울이나 좀 보고 남한테 살을 빼라 말아라. 떠들고.-
-지금 사과해야 할 새끼는 내가 아니라 제이크 스컬리 새끼고.-
소싯적에 인터넷에서 부계정으로 댓글 좀 달아주던 실력이 튀어나와 버렸다. 무엇보다 심각했던 점은 이번에 그렇게 댓글을 단 계정이 부계정이 아닌 앤드루 브라운의 공식계정이었다는 점이었다.
“해킹을 당했다고 하죠.”
“지금 그런 말을 대체 누가 믿겠습니까.”
“믿건 안 믿건 일단 지금을 넘기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어휴, 사무국에서도 지금 난리입니다. 이런 식으로 자꾸 터지면 더 막아줄 수 없다고요.”
양키스 프런트 직원들의 갑론을박에 현장 스텝을 대표하여 회의에 참석 중이던 감독이 입을 열었다.
“지금 이대로는 분위기가 악화만 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여론이 팀 내 문제의 원흉으로 엉뚱한 선수를 지목하고 있고 그 선수들은 팀에서 나서서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점에 굉장히 큰 불만을 갖고 있어요.”
“아니, 팀에서 나서서 보호하지 않는다니요. 우리 홍보팀도 홍보팀 나름대로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발끈하고 일어서는 홍보팀장을 양키스의 단장이 막아섰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자리는 이번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빠르게 결정하는 자리에요.”
“그냥 해킹으로 몰고 가죠.”
“그게 말이 안 된다니까요. 그런 핑계에는 지나가던 강아지도 웃을 겁니다. 그보다는 앤드루 브라운에게 징계를 내리는 게 효과적이에요. 제 생각에는 감봉 정도면 적절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면 팀 내 분위기는 더 엉망이 될 겁니다. 누가 봐도 지금 상황에서 문제의 원인은 제이크 스컬리입니다.”
“아니, 감독님. 그렇다고 지금 제이크 스컬리에게 뭔가 액션을 취할 수도 없잖습니까. 그렇게 되면 그 녀석이 인종차별 단어를 사용한 걸 인정하게 되는 꼴이에요.”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해서라도 팀 분위기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감독의 완강한 이야기에 단장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 시즌 제이크 스컬리의 성적을 잘 아시잖습니까. 당장 그 녀석이 없어지면 팀 타격이 얼마나 떨어지는지는 불 보듯 뻔하고요. 게다가 여기서 추가로 징계를 받게 될 경우 포스트시즌 출장도 불투명해집니다.”
“하지만!!”
“우선 앤드루 브라운 선수가 잘못한 건 확실하니 그 부분은 약한 벌금 정도 때리도록 하죠. 선수들 불화 문제는 감독님이 좀 잘 달래주세요.”
그들이 생각할 때는 분명 합리적인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단체의 합리라는 것은 가끔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한 번, 두 번이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희생당하는 누군가가 이미 몇 차례나 그것을 감수했을 때. 그것은 누적된 불평등이 되고 그 누적된 불평등은 결국 터질 수밖에 없다.
“벌금이라고요?”
“워워, 앤드루 진정해. 그래 봐야 고작 3천 달러야.”
2천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선수에게 벌금 3천 달러는 가볍다.
하지만 지금 앤드루 브라운에게 중요한 것은 금액의 크기가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이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아시잖아요. 지금 저한테 달리는 악플이 얼마나 엿 같은지. 그리고 그게 누구 때문에 일어난 일인지도요. 애초에 제이크 그 자식이 언론에다가 지랄했을 때는 아무 말도 없더니 제가 술 마시고 SNS에 실수 좀 했다고 감봉이요?”
“그게 지금 팀 상황이······.”
“전 승복 못 합니다.”
앤드루 브라운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사실 그것까지만 하더라도 아직은 괜찮았다. 하지만 그 괜찮음이 괜찮지 않음이 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까발리자.”
“네?”
“이대로는 기분 엿 같아서 못 해 먹지. 이걸로 지랄하면 언해피 띄우고 트레이드 요구하면 그만이야. 내가 어디 갈 곳이 없겠냐?”
“뭐, 그건 그렇죠. 하지만 굳이 이런 트러블 만들어서 좋을 건 또 없잖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이번에 단단히 교훈을 얻었어. 계속 참으면 호구밖에 안 돼. 내가 지금까지 어디 한두 번 참았어? 그런데 뭐? 벌금? 솔직히 내가 SNS에 쓴 글이랑 제이크 자식이 언론에다가 떠든 거랑 뭐가 더 팀에 손해냐.”
“그야 당연히 제이크 자식이 떠든 거죠.”
“그러니까. 게다가 지금 이거 터트리면 난 팀을 위해서 억울하게 당하기만 하다가 도저히 못 참은 사람으로 포장도 가능해.”
“하지만 팀에서 입지나 올해 성적은······.”
“팀에서 입지는 이미 글러 먹은 거고. 팀이 나를 조금이라도 생각했으면 나한테 벌금을 때렸겠어? 그리고 성적은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도저히 저 뻔뻔한 제이크 자식이 엿 먹는 꼴을 안 보고는 배알이 꿇려서 뛸 수가 없어. 이대로 뛰면 괜히 내 개인 성적만 깎아 먹는 꼴이 날 것 같아.”
에이전시에서는 앤드루 브라운을 말렸지만 어쨌거나 선수와 에이전시의 관계는 선수 쪽이 갑이다. 게다가 서비스 타임 당시 그만한 성적을 거뒀음에도 28세부터 34세 시즌이라는 선수 생활의 황금기를 7년 1억 4천만의 싼값에 계약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앤드루 브라운과 계약을 맺고 있는 에이전시는 능력 있는 대형 에이전시도 아니었다. 수입의 5할 이상이 앤드루 브라운에게서 나오는 이상 그들로서는 앤드루 브라운의 의지를 막을 수가 없었다.
[뉴욕 양키스, 앤드루 브라운에게 3천 달러 벌금 부과!!]
[앤드루 브라운 반발!!]
[앤드루 브라운 ‘팀의 벌금 부과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처사다. 현재 클럽 하우스의 진짜 문제는 내가 아니라 다른 녀석이고 이번 벌금은 그것을 가리기 위한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하다. 팀이 진정으로 미래를 생각한다면 녀석을 그저 우쭈쭈 할 것이 아니라 단호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앤드루 브라운 뭐야? 꼴랑 벌금 3천 달러가 아까워서 지금 이러는 거야? 연봉으로 2천만 달러나 받아가는 새끼가?-
-하는 짓도 없이 돈만 잔뜩 받아 가면서 3천 달러 벌금도 못 내겠다니. 진짜 인성 노답이네. ㅉㅉㅉ-
-근데 앤드루 브라운 인터뷰 보면 뭔가 좀 의미심장한데?-
-맞아. 솔직히 2천만 달러나 받는 선수한테 3천 달러는 껌값이잖아. 진짜로 억울해서 저러는 거 아님?-
-걔 SNS에 쓴 글들이나 보고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해라. 저거 해외토픽으로도 떴어. 양키스 망신은 아주 혼자 다 시킴.-
-그러니까, 해외토픽으로 뜰 정도로 큰 이슈인데 고작 벌금 3천 달러라는 거 좀 이상하지 않아?-
“그래, 이상하지. 당연히 이상할 거야.”
< 벌어 맞는 매가 더 아프다(6)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