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38화 (239/287)

< 벌어 맞는 매가 더 아프다(4) >

“네?”

“뭘 그리 놀래? 어차피 이럴 때 쓰려고 만들어 둔 뒷계정이라며. 일 끝나면 어차피 폐기할 계정이고.”

“그렇긴 하지만, 어렵게 키운 계정인데 좀 확실하게 써먹는 게 낫지 않겠어요? 차라리 보스가 인종차별 단어를 들었던 걸 까죠. 양키스 내부 불화설보다 인종차별 쪽이 임팩트가 훨씬 크잖아요. 솔직히 이런 루머는 그냥 아무 계정으로나 떠들어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루머? 누가 루머래? 게다가 이게 더 효과적이야.”

토니 이시카와가 고개를 갸웃했다.

“루머가 아니라고요? 게다가 더 효과적이라뇨?”

“양키스 놈들 매일 자기들을 가리켜 제국이라고 그러잖아?”

악의 제국.

이제는 자랑스럽게 사용되는 이 별명의 시작은 사실 2002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사장인 래리 루치노가 뉴욕 양키스를 비꼬기 위해 사용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양키스는 이 ‘악의 제국’이라는 단어를 매우 마음에 들어 했고, 실제로 2013년 상표권 분쟁까지 치러가며 야구에서 ‘악의 제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얻어내기까지 했다.

“뭐, 이블 엠파이어라니. 확실히 멋진 별명이긴 하죠.”

“그래, 제국이지. 그래서 재밌는 거야. 대부분 제국을 멸망시켰던 건 외세가 아닌 내흉이었거든.”

[이번 시리즈 뉴욕 양키스의 처참한 패배는 예고되어 있었다?]

[뉴욕 양키스!! 팀 내 심각한 불화. 삐걱대는 클럽하우스. 과연 남은 일정은 괜찮을까?]

[팀 내 불화의 원인으로는 팀보다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선수 A가 지목된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우리 양키스에 팀 내 불화는 무슨 팀 내 불화가 있다고 그러는 거야.-

-내가 보기엔 이거 실력으로 져놓고 핑계 대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ㅋㅋㅋ 양키스 놈들 졸렬하게 영혼까지 털리고 핑계 대는 꼴 보소? ㅋㅋㅋ-

-근데 이거 최초 멘션이 MLBaftertalk07이라고 꽤 공신력 있는 사람임.-

-그게 누구인데?-

-어? 걔 트레이드 소식도 그렇고 메이저리그 이야기 꽤 많이 맞춘 애 아님? 소문으로는 주변에 메이저리그 관계자가 있든지, 아니면 본인이 관계자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러면 진짜 양키스에 불화가 있다는 소리인가? 대체 왜? 걔들 지구 1위잖아.-

-이번에 보스턴한테 털리면서 1위 뺏길 각이라 그런가?-

-아니, 선후가 반대인데? 불화가 있어서 털린 거라잖아.-

-그거야 MLBaftertalk07인가 하는 걔도 양키스 빠인가보지. 양키스가 아무 이유 없이 저렇게 영혼까지 털릴 리 없다. 뭐 그렇게 믿는 거 아니겠어?-

-근데 그러면 저기서 지금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선수 a는 대체 누구임?-

여기까지도 토니 이시카와는 대체 왜 성민이 직접적인 저격이 아닌 양키스의 불화설만을 제기한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인터넷 여론의 흐름은 양키스의 불화가 사실이다, 아니다. 이 멘션을 남긴 MLBaftertalk07의 정체가 양키스 팬이다. 아니다. 같은 사소한 이야기로 불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러던 와중에 제롬 스튜버츠가 자신의 SNS에 사진을 하나 다시 올렸다. 그것은 재키 로빈슨 데이에 42번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을 찾았던 성민의 사진이었다.

그는 그리 많은 사람이 찾는 선수는 아니었다. 원래 그의 SNS 팔로워는 20만도 채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그 숫자는 30만에 가깝게 늘어있었고 그 새롭게 합류한 약 10만 명의 사람들은 이번 이슈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었다.

-거봐, 진짜 뭐 있다니까?-

-제이크 스컬리는 본인 입으로 아니라고 했잖아.-

-맞아. 게다가 인종차별로 다섯 경기 정지는 너무 적지.-

-그러면 제이크 스컬리는 별개고 양키스에 다른 놈이었나 보지.-

-어? 잠깐만. 그러면 이거 지금 떠도는 소문이 말 되지 않아?-

-뭐가?-

-정작 인종차별 발언은 다른 놈이 했는데 징계는 제이크 스컬리가 제일 쎄게 맞은 거잖아. 그러면 제이크 스컬리가 지금 저렇게 뿔난 것도 말이 되지 않냐?-

-하긴 개인적으로 제이크 스컬리면 리암 루카스에 이어서 차기 양키스의 캡틴으로 점찍은 선수잖아. 팀에 충성심도 엄청 높고. 그런 선수가 팀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하려면 최소한 저런 수준의 이야기는 돼야 말이 되는 거 아니겠어?-

실시간으로 변해가는 인터넷 여론의 흐름에 토니 이시카와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어떻게 이렇게?”

필 니크로 역시 감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는 토니 이시카와와는 다르게 성민을 강하게 믿고 있었다. 어쨌거나 이런 종류의 일에서 성민의 선택이 틀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형태는 상상도 못 했다.

-아니, 대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거냐?

“그야 간단하죠.”

-아무리 생각해도 간단할 것 같진 않지만. 그래 일단 한 번 들어나 보자꾸나.-

“생각해보세요. 제롬은 분명 제가 인종차별적 단어를 들었다는 걸 강하게 암시했어요.”

-그래, 그랬지.

“그리고 제이크 스컬리는 자기가 안 했다고 강하게 부정했고요.”

-그래, 그것도 그랬지.

“한 사람은 했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가 안 했다고 주장하면 결론은 하나죠. ‘그놈 말고 다른 놈이 했구나.’ 물론 바로 그렇게 생각하기는 힘들죠. 누군가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니까요. 하지만 여기에 불화설을 하나 끼얹어주면? 짜잔!!”

-아니, 잠깐만. 그러니까 대체 그 불화설 하나에 어떻게 저런 식으로 유도가 되는 건지 난 여전히 이해가 잘 안 되는구나.

“그거야 제이크 스컬리 녀석 이미지가 좋잖아요.”

-응? 그게 뭐······. 아!!

“애초에 사람들은 제이크 스컬리가 그랬다고는 생각하기 싫어해요. 그리고 대부분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기 마련이죠. 뭐 그렇게 되면 이것도 수용되고 저것도 수용되고 거기다가 그걸 그럴싸하게 설득해줄 정황까지 있는 걸 믿는 수밖에 없죠.”

듣고 보니 간단한 것 같기도 한데······.

그럴 리가. 필 니크로는 새삼 자신과 함께 하는 녀석의 대단함을 느꼈다. 이 녀석은 발상이 다르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복잡하게 갈 필요는 또 뭐냐? 그냥 제이크 스컬리의 이야기만 하면 될 것을.

“사람이 코앞의 일에만 급급하면 쓰겠습니까. 좀 먼 훗날을 내다봐야죠.”

-먼 훗날?

“게다가 제이크 스컬리가 그랬다고 터트려봤자 믿을 놈은 믿고 안 믿을 놈은 안 믿습니다. 어차피 일방의 주장이니까요. 그리고 양키스의 선수들도 자기 동료인데 어지간하면 녀석을 감싸주겠죠? 그러면 뭐 별일 없이 흐지부지 끝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럼 네 말은?

“제이크 스컬리가 그랬다는 걸 사람들이 믿게 하려면 우리 애들 말고, 저쪽 애들이 증언해야죠. 그래야 설득력이 있죠.”

-맙소사. 그러니까 너 지금?

“뭐, 이대로 인터넷 여론이 진행되면 참 볼만할 겁니다.”

제롬 스튜버츠는 그 사진 한 장 이후로 침묵했다.

보스턴 레드삭스 선수 가운데는 제롬 스튜버츠가 아니더라도 SNS 중독에 가까운 녀석들도 많았지만, 선수 대부분이 그 침묵에 동참했다. 물론 자의는 아니었다.

“이제 우승이 가시권이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가십거리 만들 생각 하지 말고 딱 2주. 2주만 죽어라. 야구에 집중하자.”

물론 고작 감독의 이런 말 한마디에 모든 선수가 단합한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12기통짜리 페라리나 하나 사볼까?”

“역시 고액 연봉자. 무슨 남의 연봉보다 비싼 걸 인터넷 쇼핑하듯이 말을 해버리네······.”

“아, 아냐. 아냐. 그냥 우승 보너스로 뭘 살까 해서. 연봉이야 앞으로 인생을 대비해야 하는 돈이니까 대부분 재투자하고 있는데, 그래도 우승 보너스는 내가 올 한해를 제대로 보낸 보너스잖아. 그건 나를 위해서 쓰고 싶더라고.”

“우승 보너스?”

“어, 작년에 아마 55만 달러쯤 됐지? 작년에 받았던 건 전부 고향에 작게 재단을 하나 만드는 데 썼거든. 기업이랑 협약 맺고 내 기록에 따라서 그쪽에서 추가로 기부하는 형식으로 해서 말이야.”

“자, 잠깐만. 보너스가 55만 달러였다고?”

성민이 그 돈을 어떻게 썼는지는 딱히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55만 달러라는 거액이었으니까.

보스턴 레드삭스의 선수단은 젊었다. 실력으로는 나무랄 곳이 없었지만 애초에 야구는 드래프트라는 제도를 통해 운영된다. 연차가 짧은 선수는 설사 MVP급 활약을 하더라도 최저연봉이다. 그리고 55만 달러라는 금액은 그들의 연봉에 필적하는 거금이다.

이번 시즌 보스턴 선수단 1군에서 단 며칠이라도 뛰었던 선수 37명 가운데 연봉 55만 달러를 넘는 선수는 고작 12명에 불과했다.

우승.

오직 우승.

본래도 이기는 것을 좋아하지만, 현실적인 보너스까지 달린 상황이다. 우승이 더 간절해졌다. 보스턴 선수들이 SNS를 완벽하게 끊어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인터넷 여론은 점점 더 성민의 예상처럼 흘러갔다. 제롬 스튜버츠 이후로 선수들의 공식 계정 모두가 침묵하는 것은 마치 42번 유니폼을 입은 성민의 사진 한 장이 보스턴 선수단 전원의 의지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오랜 시간 뉴욕 양키스를 응원해온 팬이지만 이건 정말 실망이야. 아니, 인종차별이라니. 그리고 그걸 이런 식으로 쉬쉬하다니. 이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야.-

-양키스 팬 코스프레 오지고요. 아닌 말로 인종차별 했다는 증거도 증인도 없는데 대체 뭘 보고 그런 걸 주장하는 거야? 제롬 스튜버츠가 42번 유니폼 입은 성민 사진 한 장 올렸다고?-

-아니면 아니라고 주장을 할 텐데 지금 침묵하고 있잖아. 그게 정황 증거 아닌가? 게다가 법정에 세울 수만 있으면 증인들은 널렸지. 양키스 선수 아무나 하나 붙잡고 물어보면 바로 나올걸?-

-아니, 뭐 이런 일에 법정까지 들먹이고 그래?-

-이런 일? 지금 인종차별이 작은 일 같아? 장담하는데 위증죄만 적용되는 장소면 양키스 선수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무조건 나오게 돼 있어.-

-난 개인적으로 제이크 스컬리가 양심 고백을 해줬으면 좋겠다.-

-양심 고백은 무슨 양심 고백? 제이크 스컬리가 인종차별 발언 안 한 건 거의 사실 아닌가?-

-그러니까. 같은 팀 선수라고 감싸지 말고 솔직히 말해줬으면 좋겠어. 차기 양키스의 캡틴으로써 팀원들을 아끼는 건 잘 알지만 그래도 잘라낼 건 잘라내고 가야지. 설사 몇 경기 정지를 당하더라도 말이야.-

-나도 그 말에는 동의한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사무국에서도 대충은 눈치를 챘어. 아마 보스턴에서 항의를 했겠지. 근데 증거도 없고 양키스에서는 딱 잡아떼니까 괘씸죄로 제이크 스컬리한테 다섯 경기나 먹인 거 아니겠어? 어떻게 보면 제이크 스컬리도 피해자라고.-

-아니, 그렇게 복잡하게 갈 것 없이 보스턴에서 성민이 직접 명확하게 말해주면 되잖아.-

-그게 될 것 같았으면 더 일찍 했겠지. 사무국에 말했는데 안 먹혔으니 저러고 있는 거잖아. 이건 양키스에서 용감하게 누군가 나서줘야 해.-

-그렇다고 동료를 버리라고? 그건 너무 비겁하잖아.-

-나쁜 짓을 보고 침묵하는 게 더 비겁하지.-

인터넷을 떠도는 이러한 이야기들에 토니 이시카와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고작 그거 몇 마디 올렸을 뿐인데 양키스에서 억울한 건 제이크 스컬리뿐이고, 다른 누군가가 비겁하게 숨어 있는 그림이 됐다고?

성민이 말했다.

불화설은 루머가 아니라고.

결과론적으로 보면 이제는 맞는 말이 됐을 것이다. 저런 상황에서 불화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으니까.

< 벌어 맞는 매가 더 아프다(4)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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