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37화 (238/287)

< 벌어 맞는 매가 더 아프다(3) >

제이크 스컬리가 공식적으로 인터넷을 떠도는 이야기를 부인했다. 그리고 그 순간 많은 사람이 그의 그 거짓말을 믿었다. 정말 미국적인 모습이었다. 사실 우리가 보기에 많은 미국인은 생각보다 순진하고 어리석어 보인다. ‘아니, 대체 왜 저런 뻔한 거짓말을 믿는 거지? 머저리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미국인들의 진짜 무서움일 수 있다.

닉슨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이유는 도청이 아닌 그 행위를 감추기 위한 거짓말 때문이었다. 빌 클린턴이 탄핵 위기에 몰렸던 것은 불륜 때문이 아닌, 거기까진 하지 않았다는 거짓말 때문이었으며 북미 시장 점유율에서 포드를 누르고 기세를 올리며 GM까지 따라잡을 기세였던 토요타가 여전히 점유율 13%에서 헤매는 것 역시 브레이크 시스템의 결함 때문이 아닌 그 사실을 은폐했다는 ‘거짓말’ 때문이었다.

물론 조지 워싱턴의 벚나무 이야기가 전기작가가 만든 가공의 이야기임이 알려진 이후에도 꾸준히 교과서에 실린 것은 그들의 국부가 그런 사람이기를 원하는 미국인들의 ‘희망’ 때문인 것처럼 이 모든 것은 그저 미국인들이 만든 환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집단이 그런 환상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힘을 갖는다.

“제이크 스컬리 저 뻔뻔한 새끼가 이제 거짓말까지 해?”

“아니, 그 새끼, 거기서 그 이야기 하는 걸 들은 사람이 몇 명인데.”

“양심이 어디까지 뒤져야 저런 소리가 입에서 튀어나올 수 있는 거지?”

보스턴의 선수들이 제이크 스컬리의 인터뷰에 상당히 크게 분노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크게 분노한 것은 역시 제롬 스튜버츠였다.

물론 제롬 스튜버츠가 공공연하게 제이크 스컬리를 콕 집어서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음알음 사람들이 그가 제이크 스컬리를 저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결국, 제이크 스컬리의 인터뷰는 제롬 스튜버츠의 이야기가 틀렸음을 주장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 찔리는 게 있으면 조용히 닥치고 넘어가길 기다리든지 이걸 이렇게 도발을 한다고? 얘 지금 나랑 싸워보자는 거 맞죠?”

“제롬.”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부름에 제롬 스튜버츠가 고개를 저었다.

“이거 저 말리려고 하지 말아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나도 말릴 생각 없어.”

애초에 제이크 스컬리는 성민에게 인종차별적 단어를 사용하는 순간부터 선을 넘었다. 그리고 이건 선을 넘은 것을 한참 넘어 ‘이래도 참을래?’라며 도발을 감행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일단 오늘 저 빌어먹을 양키스부터 박살을 내고 시작하자고. 난 도저히 저 개자식들이 동부지구 우승을 차지하는 꼴을 봐줄 수가 없으니까.”

“그건 나도 동의. 나 오늘 홈런 네 개 칠 거니까 말리지 마라.”

“매튜, 너 어제 4타수 1안타 아니었냐?”

“그게 다 오늘 홈런 치려고 기 모아둔 거야. 랄로 넌 평균도 모르냐? 원래 평균을 맞추려면 잘 안 나오는 날도 있어야 하는 거야. 네가 나온 그 명문 사립고등학교에서는 그런 것도 안 가르치던?”

“무, 무슨 소리야!! 나도 평균 잘 알거든? 흐음, 어제 좀 못 한다 싶더니만. 어쩐지 평균 때문에 그랬군.”

랄로 가야르도와 매튜 쿠퍼의 헛소리를 뒤로하고 보스턴 선수들이 매우 강력하게 오늘 경기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네가 바랬던 게 이거냐?

‘아니, 뭐 이런 것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래도 꽤 보기 좋네요. 확실히 양키스가 엉망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팀이 단합해서 타오르는 건 더 중요하죠. 당장에 적은 양키스지만 최종 보스는 따로 있으니까요.’

-너무 멀리 보는 것 같은데?

‘글쎄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구 우승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랬었죠?’

-그건······, 끙.

보스턴 클럽하우스의 분위기가 그렇게 타오르던 그때.

양키스 클럽하우스는 그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침묵.

혹은 수군거림.

제이크 스컬리가 감독과의 면담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양키스의 선수들은 기본적으로는 제이크 스컬리의 편이었다. 비록 그 녀석이 조금 재수 없는 녀석이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야구는 팀 스포츠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료였으니까.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이번 건 좀 선을 넘은 것 같은데?’

‘인터뷰 요청 들어오면 뭐라고 하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잖아.’

‘기억이 안 난다고 해야 하나?’

‘망할 자식, 그냥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야지. 여기서 대체 왜 섣불리 주둥이를 놀리는 거야.’

이건 분위기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다. 동료의 거짓말에 동참해야 할까? 적극적으로? 아니면 소극적으로? 그것도 아니면 부정을 해야 하나?

인종차별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성민의 경우 정말 뜨거운 스타다. 섣불리 입을 놀렸다가는 그 여파가 어떤 식으로 밀려올지 모른다.

현재까지 시리즈 스코어 2:0

보스턴은 가벼운 마음으로 경기에 충분히 집중해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는 오늘 양키스를 영혼까지 털어주겠노라 불타올랐고, 양키스는 이걸 어쩌나 심란함으로 가득한 마음이다.

1회 초.

양키스의 중견수 찰스 워드가 어이없는 실책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회에만 무려 두 개의 에러와 6개의 안타. 1개의 볼넷.

선발 투수는 총 47개의 공을 던지고 강판당했고 보스턴의 타순은 한 바퀴를 돌았다.

8:0

양키 스타디움을 찾은 관중들이 그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것은 Mr. 양키스라고 불리는 리암 루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자신의 할 일을 잊지 않았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나는 팀의 중심이다. 리암 루카스가 자신을 북돋웠다.

“다들 정신 차려. 이제 고작 1회 초가 끝났을 뿐이야. 아직 우리는 한 번도 공격하지 않았어. 보스턴 녀석들이 했다면 우리 양키스가 못 할 이유는 없지.”

입을 열어 동료들에게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거는 최면에 가까웠다. 그래, 어떻게든 해낼 수 있어. 경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고 8점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보스턴의 마운드에 브라이언 보일이 섰다.

그의 시선이 덕아웃에 앉아있던 라만 그레고리에게 향했다. 어제의 라만 그레고리는 환상적이었다. 그것은 브라이언 보일이 애송이이던 시절 아직 아무 데도 다치지 않았던 탬파베이 레이스의 에이스 라만 그레고리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왕이면 탬파베이 레이스에서 선배와 함께 원투 펀치로 던지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이룰 수 없는 꿈.

비록 몸에 걸친 것은 탬파베이 레이스의 푸른 유니폼이 아닌 보스턴의 붉은 유니폼이었지만 이렇게라도 전성기의 역량을 보여준 라만 그레고리의 뒤를 이어 던진다는 것은 기꺼웠다.

최고 96마일을 던진 우완 투수의 등판일이 지나고, 바로 다음 날 마운드에 오른 최고 97마일짜리 공을 뿌리는 좌완 투수.

6-1의 비교적 작은 사이즈. 하지만 딴딴한 몸에서 나오는 강속구가 불을 뿜는다.

-랜디와 커트 같군.

‘네? 랜디 존슨이랑 커트 실링이요?’

-그래.

‘에이, 그건 아니죠. 랜디 존슨은 좌완에 속구랑 슬라이더 투 피치를 던지는 거인이었고 속구에 스플리터가 주무기였잖아요. 비슷한 점이라고는 키 차이 정도? 그나마도 랜디 존슨이 워낙 커서 그렇지 커트 실링도 거의 195는 되는 장신이었고요.’

-반대다.

‘반대요?’

-강속구에 떨어지는 공이 주특기인 좌완 투수. 그리고 강속구에 슬라이더가 주특기인 우완 투수. 던지는 손은 반대지만 레퍼토리는 비슷하지 않더냐? 심지어 이쪽은 키가 크고 비쩍 마른 쪽이 떨어지는 공이 주특기이니 오히려 더 효과적일 수도 있지.

분명한 것은 양키스의 타자들은 최선을 다했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점수를 내지 못했던 것은 그저 실력과 상황의 문제였다.

1회 말 그들의 공격이 끝났을 때

대기 타석에서 자신의 타격을 준비하던 리암 루카스는 차마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KKK.

그야말로 압도적인 피칭.

지난 탬파베이 시절.

라만 그레고리는 브라이언 보일에게 이런 말을 했던 적이 있었다.

‘너는 할 수 있어. 네 슬라이더는 특별해. 그 슬라이더를 믿어보라고. 그게 어느 타자건, 설사 저 양키스의 리암 루카스 같은 타자라도 넌 그 공을 믿고 던지면 돼.’

과거 그 슬라이더가 긁혔던 날.

브라이언 보일은 당시 보스턴의 타선을 거의 완벽하게 막아냈었다. 홀로 괴물 같은 타격감을 뽐내며 MVP급 활약을 하고 있던 랄로 가야르도가 아니었다면, 그는 보스턴의 타선을 상대로도 단 1점도 내주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리고 오늘 아쉽게도 양키스의 타선에는 랄로 가야르도와 같은 남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때의 리암 루카스는 그만큼, 어쩌면 그보다 대단한 타자였지만 37세의 리암 루카스는 그렇지 못했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의 3차전.

브라이언 보일이 양키스의 타선을 힘으로 내리눌렀다.

“저 괴물 같은 새끼. 하여간 슬라이더 하나는 귀신이라니까.”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본 맥스 슈피겐만이 또다시 의욕을 불태웠다.

[뉴욕 양키스!! 충격의 스윕패!!]

[보스턴 레드삭스-뉴욕 양키스 3차전. 17:1 압도적 승리!!]

[혼란으로 치닫는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1위 뉴욕 양키스와 2위 보스턴 레드삭스는 이제 고작 한 경기 차이!! 과연 양키스는 지구 우승을 수성할 수 있을까?]

[브라이언 보일 8이닝 무실점 4피안타 완벽투!!]

[완벽한 선발 야구!! 3명의 투수가 22이닝 1실점!! 1, 2, 3차전. 뉴욕 양키스를 압도한 보스턴 레드삭스의 투수진을 알아보자!!]

-보스턴 레드삭스 선발 쓸만한 사람이라고는 성민이밖에 없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아니 선발 셋이서 22이닝을 먹었는데 1실점 실화?-

-심지어 그 1실점이 성민이가 내준 1점이 전부임. 우리 선발진 왜 이럼?-

-난 앞으로 존 맥도웰이 유망주를 팔아 똥을 싸 온다고 해도 빨아줄 생각이다.-

-탬파베이 지금 피눈물 흘릴 듯.-

-이거 이렇게 되면 진짜 우승 각임. 양키스 완전 영혼까지 털렸는데 다음 경기들 괜찮겠어?-

-괜찮겠냐? 보스턴 이 기세 그대로 우승까지 가즈아!!-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압도적인 승리.

그것도 그들의 가장 큰 적수인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한 승리였다. 심지어 단순히 한 경기만이 아닌 시리즈 전체를 압도했다.

비행기를 타고 귀환한 보스턴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그 덕분이었을까?

1차전에 있었던 벤치 클리어링, 그리고 제이크 스컬리의 인종차별 발언에 대한 이슈. 제롬 스튜버츠의 의미심장했던 멘션과 그것을 정면으로 반박했던 제이크 스컬리의 인터뷰까지.

그 모든 것들은 언제 타올랐었냐는 것처럼 사그라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필 니크로가 고개를 저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는 건 나에게 좋은 일일 때만이다.

엿을 먹고 싶다고 소리치며 똥을 던지는 놈에게는 엿을 먹여주는 것이 사람의 도리다.

성민의 SNS 담당자 토니 이시카와가 오랜 시간 조금씩 가꿔왔던 계정이 포문을 열었다.

< 벌어 맞는 매가 더 아프다(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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