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35화 (236/287)

< 벌어 맞는 매가 더 아프다(1) >

“빌어먹을 사무국 놈들. 양키스한테 돈이라도 받은 거야 뭐야? 꼴랑 다섯 경기라고? 성민 정말, 이 정도로 괜찮겠어? 인종차별은 큰 문제라고.”

괜찮을 리가.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도발하기는 했지만, 예상을 했다고 짜증이 안 날 수는 없었다. 사실 확 공론화시키고 크게 엿을 먹이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베스트다.

성민은 아이콘이 되고 싶었다. 그것은 오직 사람들의 동경과 선망만으로 가능한 영역이다. 하지만 이곳 미국에서 아시안은 명백히 약자다. 차별받는다고 주장하는 흑인보다도 더 약하다. 남자로 한정을 지으면 더하다.

그렇기에 성민은 인종이라는 규격에 갇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동정이 아닌 동경이었으니까.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인종이라는 자기가 가지고 태어난 것 말고는 자랑할 게 없는 저열한 녀석의 장단에 맞춰주는 건 취향이 아니라서.”

“어? 방금 성민이 뭔가 어려운 말을 했어.”

“랄로, 성민은 원래 평소에도 어려운 말을 많이 쓴다고. 그래서 너보다는 나와 말이 좀 더 통하지.”

“웃기시네. 어차피 대학 못 나온 건 똑같으면서?”

“이봐, 난 그래도 알아주는 명문 사립 고등학교 출신이라고.”

“애초에 체육 특기생으로 들어갔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랄로 가야르도와 매튜 쿠퍼가 쓸데없는 티격태격을 시전했다.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성민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언론을 타게 되면 제이크 스컬리는 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애초에 지금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니 고작 다섯 경기 정지 정도로 끝이지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생각할 때 이건 최소 열다섯 경기는 정지를 먹어야 할 사건이다.

“후, 네 마음도 알겠지만 난 이번 사무국의 결정이 영 마음에 안 들어. 어떻게든 사건을 축소시키려는 의도가 빤히 보이잖아.”

“양키스잖아. 게다가 양키스에서 앞으로 자기 얼굴로 키우는 선수였고. 나름대로 전국구 선수인데 흠집 내기 싫다 이거겠지. 게다가 사건이 과해지면 그 흠집이 그 녀석만 나는 게 아니라 나한테도 나게 될 거니까. 다섯 경기 정도면 벤치 클리어링 중에 일어난 사건 정도로 볼 수도 있지만, 그걸 넘어가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게 되잖아. 그보다 난 니가 더 걱정인데? 세 경기나 출장 정지를 받았는데 괜찮겠어?”

“후안도 제법 괜찮아. 너야 이번 시즌 내내 내가 받았지만 그래도 다른 투수들이랑은 몇 번씩은 호흡을 맞춰봤고. 세 경기 정도야 괜찮을 거야. 게다가 네 말을 듣다 보니 열이 확 오르더라고.”

성민이 에두아르도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사실 양심의 가책이 조금 느껴지기는 했다. 옆에서 그를 슬쩍 찌른 것이 성민 본인이기 때문이었다. 뭐 평소 에두아르도가 보여주던 모습을 생각하면 적당히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성민의 이야기가 훨씬 잘 먹힌 것 같았다. 하긴, 돌이켜보면 제롬 스튜버츠가 잘 피했기에 망정이지 헤드샷은 정말 선수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짓거리다.

“그러고 보니 루이스 알렉산더 녀석은 출장 정지를 안 먹은 것도 또 화나네.”

“의도적인 빈볼은 아니었다고 판단한 거겠지.”

어찌 됐건 양키스의 핵심 선수 중 하나인 제이크 스컬리를 남은 시리즈에서 삭제시켰다. 게다가 벤치 클리어링에서도 사실상 승리했고 경기는 영혼까지 털어주었다.

‘이만큼이나 했는데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아니, 보통은 이렇게까지도 안 하거든?

***

2차전.

경기가 성민의 생각처럼 흘러갔다.

성민에게야 제이크 스컬리는 단단히 호구 잡힌 머저리였지만 그는 무려 올스타 유격수였다. 양키스라는 메가 마켓 구단의 인기를 등에 업었기에 올스타가 가능했다는 비난도 물론 있긴 했지만, 애초에 그런 구단에서 주전 유격수를 맡는다는 것 자체가 그의 기량을 증명했다.

실제로 작년 그의 WAR는 무려 5.1

팬 그래프식 분류에 따르자면 4-5구간의 선수가 올스타급. 5-6구간의 선수는 무려 ‘슈퍼 스타’다. 진지하게 MVP를 노릴 수준의 선수는 아니지만 한 팀의 중심 선수가 될만한 성적이다.

이번 시즌 역시 현재까지 146경기가 진행된 상황에서 4.9의 WAR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 기세대로라면 작년보다 더 좋은 성적을 기록할 것은 뻔하다.

팀에 1년에 평균 5승을 더해주는 선수. 단순히 짱깨식으로만 계산해도 그가 참가할 경우 팀이 승리할 확률이 3푼 정도 올라가는 셈이다.

게다가 이번 사건으로 양키스의 팀 분위기 역시 정말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다. 단순히 벤치 클리어링만 했다면 이렇게까지 나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이번 벤치 클리어링 때린 놈들은 보스턴이고 맞은 놈들은 양키스다. 게다가 그렇게 두들겨 맞고 분노의 힘으로 경기라도 좀 어떻게 잘 풀었으면 모르겠는데 매튜 놈이 안타를 치더니 랄로 가야르도가 대뜸 홈런으로 추가점을 만들어버렸다.

사기가 살아나려야 살아날 수가 없다.

무엇보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라만 그레고리가 미쳤다.

오늘 그는 마치 3년 전의 라만 그레고리 같았다. 당시 그는 메이저의 모든 팀이 침을 질질 흘리면서 갖고 싶어 했던 빅리그 3년 차의 슈퍼 에이스였다.

[와우, 라만 그레고리 벌써 경기 일곱 번째 삼진입니다.]

[오늘 전반적으로 구속이 참 잘 나오고 있어요. 방금도 96.3마일까지 나왔죠?]

[이번 시즌 라만 그레고리 선수의 최고 구속과 0.1마일 차이 나는 공이었어요. 심지어 그 96.4마일도 이전 이닝에서 나왔죠. 물론 3년 전에 최고 97.8마일까지 던지던 것에 비하면 조금 부족하긴 합니다만 확실히 구속이 95마일 이상에서 노느냐, 그 이하에서 노느냐는 상당히 차이가 납니다.]

무슨 요인 때문인지는 라만 그레고리 본인도 잘 몰랐다.

에이스라는 부담감을 내려놓아서? 아니면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팀이라서? 아니면 탬파베이 시절보다 더 적절한 휴식 때문에? 혹은 단순히 보스턴의 마사지사가 더 솜씨가 좋아서일지도 몰랐다.

그 알 수 없는 수많은 이유 중 무언가가, 혹은 그 모든 이유로. 라만 그레고리의 몸은 지난 몇 년 중에서 가장 개운한 상태였다. 197센티의 커다란 키. 완벽한 오버핸드로 뿌리는 속구와 체인지업 그리고 커브까지.

물론 이번 시즌 매우 좋은 활약을 펼쳤던 양키스의 2선발 조 달튼 역시 나쁘지 않은 피칭을 선보였다. 하지만 3년 전 부상 없이 풀로 시즌을 치렀던 라만 그레고리는 사이 영 위너였다. 그리고 오늘 마운드에 선 투수는 당시의 포스를 거의 그대로 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무려 7이닝이나.

게다가 보스턴의 타선들 역시 어제의 컨디션을 그대로 이어갔다.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빈자리를 대신한 후안 다니엘의 타격은 조금 아쉬웠지만, 괜찮았다. 다른 선수들이 그 이상을 해냈으니까. 무엇보다 루시 알베리의 활약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딱!!

[쳤습니다!! 루시 알베리!! 오늘 경기 두 번째 안타!!]

[루시 알베리 선수, 오늘 컨디션이 정말 좋은 것 같은데요? 3타수 2안타. 게다가 타구 질 역시 모두 좋습니다. 앞서 중견수에게 잡혔던 타구도 정말 아쉬운 타구였어요.]

사람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괜찮은 수비까지였다. 타격은 어차피 후안 칼초도 엉망이었다. ‘부디 2할만 넘겨라. 그러면 네 수비가 그 녀석보다는 나으니까.’ 딱 그 정도가 사람들이 루시 알베리에게 바라는 기준점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3타수 2안타는 모든 팬에게 아주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존 단장이 하여간 일은 잘해.”

“너 지난번에 바그너 가이탄 주고 라만 그레고리랑 브라이언 보일 데리고 왔을 때는 미쳤다고 욕에 욕에 욕을 아주 어마어마하게 했었잖아. 게다가 루시 알베리가 올라올 땐 뭐 저딴 녀석을 올리냐고 또 엄청 욕했었고.”

“아니, 그거야 그때는 라만 그레고리가 이렇게 잘 던질 줄 몰랐으니까. 게다가 마이너에서 바그너 가이탄을 대신할 유격수가 이렇게 잘 크고 있는 줄 누가 알았겠어? 루시 알베리 저 녀석 시즌 초만 하더라도 아주 엉망진창이었잖아.”

“뭐, 그건 그랬었지.”

경기를 지켜보던 보스턴의 존 맥도웰 단장 역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거 잘하면?

시리즈가 시작되기 전만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노려야 하는 건 와일드카드였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내일 경기를 승리한다면 14경기 남은 상황에서 고작 한 경기 차이가 된다.

그렇다면 가능하다.

불과 두 달 전만 하더라도 불가능하게 보였던 지구 우승이.

***

보통 사람이라면 벤치 클리어링 중에 인종차별적인 언어를 내뱉고 다섯 경기 징계로 끝난 것을, 그리고 그것이 큰 사건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을 하늘이 돌봤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다.

“씨발. 왜 나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제이크 스컬리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애초에 2034년. 메이저리그를 뛰는 선수가 입 밖으로 인종차별적 단어를 내뱉는 것 자체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게다가 이 녀석이 이렇게 억울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의 이유도 존재했다.

-아니, 벤치 클리어링 촉발한 건 에두아르도 크루즈인데 걘 세 경기고 제이크 스컬리는 다섯 경기 정지라고? 사무국 미친 거 아니야?-

-내가 아무리 벤치 클리어링 영상 돌려봐도 제이크 스컬리만 심하게 때릴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

-보스턴 놈들이 사무국에 돈 먹인 거지 뭐.-

-이건 솔직히 항의해야 함.-

제이크 스컬리가 성민에게 인종차별적인 단어를 사용한 것이 안 알려져도 너무 안 알려졌다. 사무국도 이 정도로 철저하게 외부로 유출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이런 일은 사무국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더라도 알음알음 알려지기 마련이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가. SNS를 통하여 메이저리거 개개인이 최소 십만 단위로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을 데리고 있는 시대다. 진짜 야구팬이라면 그런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공식적인 증거가 없으니 다섯 경기 정지로 처리했다고 이야기하면 딱히 나쁘지 않은 그림이다.

그렇기에 사무국은, 그리고 양키스와 보스턴의 프런트는 차마 이런 그림은 예상하지 못했다.

[뉴욕 양키스 제이크 스컬리 이번 벤치 클리어링과 출장 정지에 관하여 입을 열다.]

“이번 사태는 매우 유감입니다. 사실 벤치 클리어링 자체도 어이가 없는 일이었어요. 그날 루이스가 제구를 제대로 잡지 못했던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스트레이트 볼넷을 던진 투수가 손에서 공이 조금 더 빠져서 몸쪽 공이 들어갔는데 그걸로 벤치 클리어링이라뇨. 심지어 그걸 유발했던 에두아르도 크루즈는 고작 세 경기 출장 정지를 당했습니다.”“무엇보다 화가 났던 것은 구단에서 이번 일에 대하여 사무국에 항의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다섯 경기 출장 정지는 매우 과도한 징계이고 구단에서는 앞장서서 항소를 해줬어야 했습니다.”

하늘에 대고 이 정도로 끝났음에 감사해야 하는 놈이 불만 섞인 인터뷰를 내뱉는 그림을 말이다.

-이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멍청한 방식으로 미친놈인데?

‘이거 재밌네요.’

< 벌어 맞는 매가 더 아프다(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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