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승을 위하여?(2) >
보스턴 레드삭스의 덕아웃.
루시 알베리의 홈런에 당황한 것은 에두아르도 크루즈만이 아니었다. 덕아웃 코치의 대부분. 그리고 선수의 3할 이상이 인상을 찌푸렸다.
경기를 지켜보던 필 니크로 역시 탄식했다.
-좋지 않군.
성민 역시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물론 미국과 한국의 야구는 세부적인 부분에서 조금 다르고 명시적으로 정확히 들었던 적은 없다. 하지만 지금 솔로 홈런이 나온 상황에서 이런 반응이 나올 건 한 가지밖에 없다.
불문율.
아무래도 이런 종류의 불문율은 연차가 좀 있는 선수들을 통해 교육되기 마련인데 보스턴은 그 부분에서 상당히 미흡했다. 선수의 대부분이 순수하게 루시 알베리의 홈런에 기뻐하는 것은 그 덕분이었다.
-9회 11점이나 차이 나는 상황에서 쓰리볼에 스윙이라니.
‘도루나 번트도 아니고 스윙인데도 문제가 됩니까?’
보통 승부가 결정이 난 상황에서 도루나 번트를 하지 않는 것 정도는 상식이다. 하지만 스윙을 한 게 문제라고? 그렇다면 아예 공격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인가?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 3-0 상황에서는 스윙을 하지 않는 거지.
‘아니 대체 그게 무슨? 그거 그냥 그런 상황에서는 공이 빠져서 볼넷으로 출루할 확률이 높으니 그런 거 아니었습니까?’
실제로 작년을 기준으로 3-0 상황에서 방망이를 휘두른 비율은 전체의 4.7%에 불과했다. 성민은 그것을 당연히 스트레이트 쓰리 볼을 던진 투수라면 네 번째도 볼 질을 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타자들이 승부를 피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3-0 상황에서는 방망이를 휘두르면 안 되는 불문율이라고?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참 굉장히 좋은 불문율이네요.’
-응?
일단 0-3이 되면 대충 가운데로 집어넣어도 방망이를 안 휘두르는 게 불문율이라니. 이거 투수 입장에서는 상당히 괜찮다. 그리고 성민은 투수다.
마운드의 투수가 똥 씹은 표정으로 루시 알베리를 바라봤다. 저쪽 덕아웃의 감독과 코치들도 상당히 불쾌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한다.
선수들이 빠르게 그라운드를 돌아 덕아웃으로 돌아온 루시 알베리를 맞이했다. 덕아웃의 선수들 상당수는 이미 이게 불문율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게 뭐 어떠냐 하는 마음이었다. 애초에 룰북에도 없는 규칙이다. 게다가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어 보이는 다른 불문율들, 예컨대 과도한 세러머니나 크게 이기는 상황에서 1점에 집착하는 작전 등과 달리 이건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터무니가 없었다.
대기 타석에서 기다리던 제롬 스튜버츠가 타석에 들어갔다.
그의 시선이 날카롭다.
마운드의 투수가 힘껏 와인드업했다.
초구. 98마일의 빠른 공.
제롬 스튜버츠의 머릿속에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조심해. 지금 욕심낼 필요도 없고, 최대한 몸을 사리라고. 지금 저 자식 영점도 엉망인데 잘못하면 너 진짜 큰일 나는 수가 있어.’
보통 보복구는 허벅지나 엉덩이같이 살이 많은 부위로 향한다. 몸에 맞더라도 크게 다치지 않는 부위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가 스트레이트로 볼넷을 던질 만큼 엉망인 상황이라는 점이었다.
투수의 공이 조금 높게 형성됐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제롬 스튜버츠는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물론 그 준비는 방망이를 휘두르기 위한 준비는 아니었다. 재빨리 몸을 피하기 위한 준비였다.
98마일의 빠른 공이 제롬 스튜버츠의 어깨가 있던 위치를 지나 백스탑 광고판을 강타했다. 마운드의 투수가 재수 없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한다. 제롬 스튜버츠가 방망이를 움켜쥔 손에 힘을 더했다.
뛰어나갈까?
아니다. 참는다. 아마 맞았더라면 참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차피 이긴 경기에 먼저 빌미를 준 것도 우리다. 그냥 한번 참고······. 어? 근데 내가 참는데 너희들이 왜 그래?
“나가자.”
성민이 에두아르도 크루즈에게 속삭였다.
“엉?”
“불문율? 그래 좋아. 어차피 같은 업계 동업자들이고 그 불문율이라는 건 서로서로 좋게좋게 가자는 의미에서 있는 거니까 납득할 수 있어. 하지만!!”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불문율이란 애초에 서로서로 좋게좋게 가자는 이유로 있는 거야. 그런데 방금 저건 아니지. 오히려 저게 더 동업자 정신을 어긴 거 아닌가?”
“그건 확실히 그렇지······.”
“그러면 뭐 해? 나가야지.”
벤치 클리어링의 시작이었다.
가장 먼저 달려 나간 것은 에두아르도 크루즈였다. 설마 타자도 가만히 있는데 덕아웃에서 달려 나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양키스 선수들의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
그리고 그 한 박자로 충분했다.
-뻑!!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태클이 정확하게 들어갔다. 학창 시절 레슬링도 좀 했다고 하더니 여전히 솜씨는 죽지 않은 듯했다.
성민의 시선이 예리하게 양키스의 선수들을 훑었다.
노리는 건 딱 한 놈.
확률적으로 가장 높은 건 역시
‘저깄군.’
-너 설마?
제이크 스컬리다.
애초에 보스턴과 양키스는 그리 친한 팀이 아니다. 물론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상대 팀을 싫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팀에 소속됐다는 소속감이 감정을 만드는 법이다.
선수들의 싸움은 생각보다 격렬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제이크 스컬리와 성민이 정확히 눈을 마주쳤다. 녀석의 눈에서 분노가 엿보인다. 그럴 만도 하다.
나름대로 이미지 관리가 잘 된 녀석이지만 그래도 업계 사람이라면 알음알음 다 안다. 저 녀석은 인종차별주의자고 개 같은 녀석이다. 그런 녀석이 승부에서 번번이 손도 못 쓰고 당했으니 얼마나 쌓인 게 많겠는가.
간단한 일이었다.
제이크 스컬리를 향해 씨익 웃어주는 것만으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녀석은 성민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왔다.
-괜찮겠냐? 아, 그리고 미리 말하지만, 태권도는 안 된다. 발차기는 곤란해.
‘저도 압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이라고 다 태권도를 할 거라는 편견은 좀 버려주세요.’
제이크 스컬리가 성민을 향해 손을 뻗어왔다.
제법 힘이 실려있다. 하지만 다행이다. 이 녀석 투기 종목을 배운 녀석은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건 그것대로 방법이 있었겠지만, 이렇게 되면 더 쉬워진다. 성민이 그의 손에 멱살을 잡혀주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뭐야? 경기에서는 엄청나게 쳐 발려서 꼬리 내리고 깨갱거리더니 주먹질로라도 좀 어떻게 해보고 싶어서 달려 온 거야?’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 새끼가.”
‘야, 근데 너 데오드란트는 바르고 온 거냐? 어우, 땀내에 암내에. 양키스 팬들은 너 이런 냄새 나는 건 알고 있냐? 게다가 가까이서 보니까 피부도? 어휴.’
성민의 도발에 제이크 스컬리가 멱살을 쥔 손에 힘을 더한 채 반대쪽 손을 휘둘렀다.
-퍼억
하지만 성민이 조금 빨랐다.
좋지 못한 자세라서 힘이 많이 실리지는 못했다. 하지만 애초에 복부. 그것도 간장 쪽은 그리 강한 힘이 아니더라도 어마어마한 고통을 선사할 수 있는 부위다.
제이크 스컬리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뭐야? 싸움도 못 하면서 일단 달려들고 본 거야? 어휴, 하여간에. 꼭 이렇게 생각이 없는 애들이 있다니까.’
“이 칭키 새끼가?”
빙고.
성민이 웃었다.
***
[뉴욕 양키스-보스턴 레드삭스. 시리즈 1차전 9회 초 화끈한 벤치 클리어링]
[보스턴 레드삭스-에두아르도 크루즈, 뉴욕 양키스-제이크 스컬리, 루이스 알렉산더 퇴장!!]
[메이저리그의 불문율이란?]
[16:2. 1차전을 완벽하게 제압한 보스턴 레드삭스!!]
[벤치 클리어링도 막지 못한 홈런!! 9회 초 경기 2번째 홈런을 기록한 랄로 가야르도!!]
[김성민 선발 투수임에도 벤치 클리어링에 참가?]
[김성민 ‘아마 등판 중이었다면, 혹은 내일 등판이었다면 좀 고민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미 마운드에서 내려온 다음이었고 그 상황에는 저도 정말 크게 분노했었습니다. 물론 메이저리그의 문화는 존중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머리를 향해 공을 던지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98마일짜리 속구에 머리를 맞는다? 그건 아무리 강화플라스틱 헬멧을 썼다고 해도 정말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입니다. 저희는 꼭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원래 0스트라이크 3볼에서는 방망이 휘두르면 안 됨?-
-어, 그런 불문율이 있음.-
-그러면 루시 알베리가 잘못한 거야?-
-불문율 같은 소리 하네. 아니 프로가 경기를 대충하는 게 말이 돼? 칠 수 있으면 쳐야지.-
-난 불문율도 하나의 문화로 존중함. 그래서 루이스 알렉산더가 더 잘못했다고 생각함. 아무리 그래도 헤드샷은 좀 아니지.-
-그래도 피했잖아.-
-피하면 다냐? 애초에 노린 게 문제지.-
-글쎄, 저 자식 직전까지 공 던지던 거 보면 헤드샷 노렸다기보다는 그냥 빠졌다는 쪽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데?-
-어쨌거나 저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와서 안타 치고 또 홈런까지 쳐버리다니. 우리 타자들 진짜 미친 듯.-
-근데 벤치 클리어링 봤냐? 김성민도 투수면서 되게 살벌하게 싸우던데?-
-걔 원래 KBO 시절에도 벤치 클리어링 유일하게 제대로 했었음. 다들 뒷짐 지고 엣헴 하는데 진짜 혼자 살벌했었지.-
-근데 주먹질은 같이 했는데 왜 제이크 스컬리는 퇴장이고 김성민은 퇴장이 아님?-
-글쎄? 심판이 제대로 못 봤나?-
-근데 KBO의 선비식 벤치 클리어링 보다가 MLB꺼 보니까 진짜 장난 아니더라? 싸움을 말리는 게 아니라 진짜 죽빵을 날리던데?-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진짜배기였지. 정작 제롬 스튜버츠는 공 피하고 다시 타석 들어갈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뛰쳐나오더니 마운드로 올라가서 태클을 빡!! 그리고 마운트 자세로 들어가는데 ㅋㅋㅋ-
-그것도 그렇고 성민이 왤케 잘 싸움?-
-내가 걔 동창인데 걔 고딩 때 학교 통이었다.-
-통?-
-완전 헛소리임. 내가 진짜 동창인데 성민이 학창 시절에는 되게 조용한 모범생이었음.-
-근데 이것 때문에 에두아르도 크루즈 출장 정지 먹으면 어쩌냐? 성민이 너클볼 받을 투수 에두아르도 크루즈밖에 없잖아.-
-기껏해야 한 3경기 되려나? 어차피 성민이 등판 전에는 무적권 돌아옴. 이번 기회에 좀 쉬라고 해.-
보스턴 레드삭스의 팬들이 응원하는 팀은 보스턴 레드삭스. 그리고 뉴욕 양키스와 맞붙는 팀이다. 그들은 그 정도로 뉴욕 양키스를 싫어했다. 그렇기에 이번 벤치 클리어링에 대해 매우 크게 환호했다. 무엇보다 결과가 매우 좋았다.
인터넷에 대문짝만하게 난 사진은 대부분 양키스의 선수들이 두들겨 맞는 사진들이었다. 원래 싸움이라는 것이 그렇다. 될 수 있으면 안 하는 게 좋지만 그래도 이왕 하면 이기는 게 좋다. 이번 벤치 클리어링은 명백히 보스턴의 승리였다.
뭐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젊은 피에 체격도 더 좋았고 무엇보다 양키스의 선수들이 싸움을 말리려는 분위기였다면 보스턴의 선수들은 기분 좋게 한바탕 푸닥거리를 하려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일부러 그런 거냐?
“당연하죠.”
-벤치 클리어링 좀 했다고 분위기가 살아나서 연승하고 이러는 건 너무 희망 사항 같은데? 게다가 어차피 저쪽이 지고 있던 경기였다. 오히려 벤치 클리어링으로 단합될 수도 있었어.
“그래도 어차피 결과는 같았습니다.”
-결과가 같았다니?
“지금 상황에서는 뭐가 어떻게 되건 간에 와일드카드 진출은 거의 확정적이에요. 이번에 스윕을 하면 지구 우승을 노릴 수 있는 거고 그게 아니면 물 건너가는 겁니다. 안 그래도 기가 죽은 놈들 이걸로 기를 한 번 더 죽이느냐, 아니면 어정쩡하게 살아나느냐인데 확실하게 죽여놨잖아요.”
-게다가······.
[보스턴 레드삭스-에두아르도 크루즈 3경기, 뉴욕 양키스-제이크 스컬리 5경기 출장 정지]
< 대승을 위하여?(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