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33화 (234/287)

< 대승을 위하여?(1) >

제이크 스컬리가 덕아웃 뒤편에 놓인 추잉검 통을 강하게 걷어찼다. 하지만 그걸로도 분이 다 풀리지 않았다.

2타석 연속 헛스윙 삼진.

그래 뭐 그럴 수도 있다.

비록 제이크 스컬리가 3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된 유격수이자 훈훈한 외모와 깔끔한 매너, 그리고 양키스의 적통이라는 의미에서 장차 Mr. 양키스 리암 루카스의 뒤를 이어 양키스의 얼굴이 될 선수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그래도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지난 경기부터 하면 무려 6타석 연속 무안타. 그중 삼진만 다섯 개다. 이 정도면 아주 단단히 호구를 잡혔다고 봐도 무방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이크 스컬리 본인이 그렇게 느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묘하게 긴장이 되고 신경이 쓰인다.

‘젠장.’

제이크 스컬리가 그 난리를 피웠음에도 팀원들은 아무도 그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냥 저 자식이 또 짜증을 내는구나, 혹은 그래도 카메라 돌아가는 곳에서는 항상 젠틀한 척하더니 진짜 빡쳤나보네? 정도의 감상이 끝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외적으로 훈훈한 외모와 깔끔한 매너를 갖췄다고 평가받는 제이크 스컬리였지만, 실제 성격은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작(jock)의 전형적인 성격에 가까웠다.

자기중심적이고, 잘난척하며 무례하고 호전적이다.

그것만 따지자면 사실 운동선수로는 크게 나쁘지 않았다. 다만, 그 무례함에 인종차별적인 마인드가 포함돼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무엇보다 그 인종차별적인 마인드의 대상에 상대 팀만이 아닌 팀의 동료까지도 포함된다는 점은 최악이라고 볼 수 있었다.

덕분에 모든 사람이 리그 최강. 환상의 리드 오프 콤비라고 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에노모토 코이치와 제이크 스컬리 콤비는 사실 개인적으로는 연락 한 번 주고받지 않는 사이였다.

그나마 제이크 스컬리에게 관심을 쏟아주는 리암 루카스는 오늘 4번 타자로 출장한 덕분에 대기 타석에 나가 있는 상황이었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제이크 스컬리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라운드를 노려봤다.

3번 타자인 보이드 머피가 타석에서 성민의 공을 두들겼다.

-딱!!

내야수의 키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는 타구.

루시 알베리가 뛰어봤지만 약간 부족했다. 동료의 안타에 제이크 스컬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팀 동료가 안타를 쳤음에도 기뻐하기는커녕, 자기가 더 못나 보일까 봐 걱정하는 인성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젠장 저게 만약 나였다면은.’

만약 루시 알베리의 자리에 자신이 서 있었다면 저건 무조건 아웃이었다.

원아웃 주자 1루.

타석에 리암 루카스가 올라갔다.

현재 점수는 1:0

앞선 보스턴의 공격, 랄로 가야르도가 솔로 홈런을 하나 쏘아 올리며 자신의 클래스를 증명했다.

리암 루카스가 가볍게 경기장을 둘러봤다. 그리고 경기장에 가득 찬 관중들과 그 관중들 사이에서도 주눅 들지 않은 상대 팀의 에이스. 그리고 보스턴 레드삭스의 선수들을 바라봤다.

젊다.

11년 전. 2023년의 이른 가을이 떠오른다.

그래 딱 11년 전 그 당시의 양키스가 저랬었다. 당시 보스턴은 황혼기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최강의 팀이었다. 2018년 메츠가 보스턴을 꺾고 기적 같은 우승을 차지한 이후 4년 동안 보스턴은 그것을 되갚기라도 하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무려 두 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다.

그 당시의 펜웨이파크의 관중석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미친놈들로 가득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은퇴해버린 리암 루카스의 동료들은 그 상황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었다. 물론 그들은 결국 그 해에 보스턴 레드삭스를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 해가 양키스가 보스턴 레드삭스에게 지구 1위를 내준 마지막 해였다. 그 이후로 작년까지 10년. 양키스는 무려 8번이나 지구 1위를 차지했고 그것은 올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지만 내년에는? 그리고 후년에는?

리암 루카스의 시선이 양키스의 덕아웃으로 향했다. 홈 경기, 1:0으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는 녀석은 제이크 스컬리가 유일하다.

물론 그도 알고 있다.

저 자식은 성격이 글러 먹었다. 많은 사람이 저 녀석이 리암 루카스 자신의 뒤를 이어 양키스의 기둥이 돼주리라 생각하지만 천만에. 저 녀석은 팀을 향한 충성심 따윈 쥐뿔도 없는 놈이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다른 팀이었다면 연봉 조금 더 부르는 팀으로 쫄래쫄래 사라질 놈이지만, 양키스는 돈이 많고 뉴욕은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다. 녀석은 아마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 충성심 넘치는 선수를 연기할 것이다.

‘제대로 된 놈이 하나만 있었더라면.’

아쉽다.

인성이 바른 녀석은 실력이 부족했거나 기회를 받지 못했다. 당장 자리가 없어서 마이너에서 연차만 채우다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돼서 터진 선수가 한둘이 아니다.

마운드의 성민이 타석에서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는 리암 루카스를 바라봤다.

-부웅!!

“스트라잌!!”

88.9마일. 성민이 지금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속구에 리암 루카스의 스윙이 늦었다.

잠시 손을 들어 타석에서 물러났던 리암 루카스가 고개를 휘휘 젓고 다시 타석에 섰다. 성민이 웃었다.

한번 떨어진 집중을 끌어올리는 게 그렇게 쉬울 리가 있나.

두 번째 60.1마일의 느린 너클볼에 리암 루카스의 방망이가 따라 나왔다.

-딱!!

안 그래도 존을 슬쩍 벗어나는 너클볼이었다. 배트의 영 좋지 않은 부분으로 두들긴 타구가 낮게 깔린 채 날았다.

과거 성민은 공을 던진 직후 지금처럼 여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너클볼을 손에 넣고 이제 4년 차. 그의 투구폼은 처음 필 니크로를 만났을 때와는 매우 크게 달라져 있었다. 물론 여전히 너클볼 투수치고는 역동적이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아, 저 녀석 너클볼 투수구나 하고 알 수 있을 정도의 범위에는 들어왔다.

그리고 너클볼 투수의 미덕이란 본래 캐치볼이라도 하듯 설렁설렁한 폼으로 던지는 공 주제에 치기는 더럽게 까다로워서 타자의 멘탈을 파괴하는 데 있는 법이다.

아, 공 날아오네?

화들짝 놀라지도 않는다. 그대로 팔을 쭉 뻗어 낮게 깔린 채 날아오는 타구를 잡아냈다. 살짝 위태로운 자세였지만 놀라운 균형감각과 유연성으로 자세를 바로잡는다. 그 과정에서 힐끔 살핀 그의 시선이 주자의 상황을 파악했다.

일루에 서 있던 보이드 머피는 이미 이루를 향해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 빠르지는 않았다. 일루를 향해 달리는 리암 루카스 역시 마찬가지다.

선택은 너무 당연하다. 2루 베이스로 가 있는 제롬 스튜버츠에게 가볍게 송구를.

-뻐엉!!

“아웃!!”

벤트 레그 슬라이딩을 하는 보이드 머피의 다리가 살짝 높았다. 어떻게든 리암 루카스는 살려보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오늘 이루를 지키는 제롬 스튜버츠는 상당히 썩은 빠따를 그라운드의 플레이로 보충하는 리그 최고 수준의 내야수였다. 공을 받아낸 그가 자세를 무너트리지 않은 채 멋지게 몸을 띄워 일루로 송구했다.

송구 역시 매우 정확하다. 랄로 가야르도가 미트를 크게 옮길 필요도 없이 그의 미트에 공이 정확히 틀어박혔다.

-뻐엉!!

“아웃!!”

더블 플레이.

성민이 가볍게 양키스의 타선을 요리했다.

***

욘 마르틴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

선발 투수가 양키 스타디움에서 6이닝 동안 2실점을 했다면 그를 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야구는 내가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상대방보다 ‘더’ 잘하는 것이다.

21번째 아웃 카운트를 루킹 삼진으로 잡아낸 성민이 마치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가볍게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오늘 경기 세 번째 타석에서 깔끔한 루킹 삼진. 3타수 무안타 3삼진.

지난 경기까지 따지면 7타수 무안타 6삼진.

제이크 스컬리가 얼굴이 벌게진 채로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공수 교대를 해야 하는 탓에 지랄할 시간도 없었다.

7이닝 1실점.

오늘도 성민은 양키스의 팬들에게 깊은 절망을 선사했다.

아, 2:1 고작 1점 차이인데 그게 어떻게 깊은 절망이냐고? 전광판의 점수는 2:1이 아니었다. 욘 마르틴은 6이닝 2실점으로 마운드를 내려갔고 오늘 경기는 양키스의 홈 경기, 즉 양키스의 후공이었다.

7회 초. 보스턴은 욘 마르틴을 대신해 올라온 양키스의 불펜들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양키스는 7회에만 총 세 명의 불펜을 투입했고 보스턴은 7회에 타자를 일순시키며 총 7점을 추가했다.

9:1

마운드에서 내려온 성민에게 보스턴의 감독인 엔리케 로만이 다가가 악수를 한 채 한쪽 어깨를 꼭 안아주었다.

-이 녀석도 참······.

‘뭐, 나쁠 건 없잖아요.’

딱히 성민과 엔리케 로만이 진짜로 이런 스킨십을 할 만큼 친해서가 아니었다.

얼마 전에 한국 쪽과 인터뷰를 할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 평소 성민을 마운드에서 내릴 때 가볍게 스킨십 하는 모습들이 한국에서는 제법 호응을 얻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직후 접촉의 정도가 조금 더 강해졌다.

성민의 경우 현재 보스턴 레드삭스의 팬덤에서도 랄로 가야르도와 함께 가장 인기 있는 선수 중 하나이며, 보스턴 레드삭스 팬덤을 넘어서 전반적인 인지도로 따졌을 때는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이건 대충 봐도 성민과 친해 보이는 모습을 자주 노출시켜서 자신에게 나쁠 것이 없다는 속셈이 빤했다.

물론 성민의 말처럼 성민으로도 나쁠 것은 없었다. 아무리 바지 감독이라고 해도 일단 감독은 감독이다. 그런 감독이 존중하는 선수는 그만한 권위가 생기는 법이다.

성민이 먼저 라커룸으로 돌아갔다.

조금 아슬아슬한 경기였다면 어깨에 아이스팩을 감은 채 경기를 조금 지켜봤겠지만, 오늘은 경기가 뒤집히기에 너무 멀리 왔다. 남은 2이닝 동안 저렇게 풀이 죽은 양키스가 경기를 뒤집을 수 있다고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글쎄, 과연 그럴까?

‘시즌 초랑은 다릅니다. 우리 불펜진도 많이 보강됐고 애들 오늘 빠따 돌리는 것도 심상치 않고요.’

성민이 설렁설렁 공을 던지는 것 같지만 그래도 89마일에 육박하는 속구와 73마일의 너클볼을 던진다. 9월의 제법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언더셔츠는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시원한 물로 샤워를 하고 코치에게 어깨를 맡겼다. 차가운 아이스팩이 오른쪽 어깨를 감싼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나는 데 걸린 시간은 약 20분.

경기장으로 돌아온 성민의 눈에 보인 것은 무려 13:2까지 벌어진 점수 차였다.

-뻐엉!!

9회 초, 보스턴의 공격.

경기를 수습하기 위해 올라온 양키스의 불펜 투수가 볼 질을 시작했다.

원볼, 투볼, 쓰리볼.

루시 알베리가 침착하게 공을 지켜봤다.

그리고 네 번째.

98.1마일의 빠른 공.

-딱!!

루시 알베리의 배트가 강하게 돌아갔다. 스트레이트 볼넷을 피하기 위해서였을까? 대놓고 존의 복판으로 들어온 속구였다. 살짝 높은 코스였지만 상관없었다. 루시 알베리가 메이저에서 죽을 쑤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도 나름대로 속구를 상대하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남자였으니까.

28.7도.

타구 속도는 102마일.

그야말로 이상적인 배럴타구.

그것은 루시 알베리의 메이저리그 1호 홈런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망할.”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인상을 찌푸렸다.

< 대승을 위하여?(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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