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32화 (233/287)

< 프랜차이즈(8) >

스마트폰 너머 프레스톤 윌슨이 말을 이어갔다.

“아무래도 마린스에 관해서는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서 말이야. 떠나온 지 2년이 됐다지만 그래도 10년이나 마린스에서 뛰었으니까.”

“당연하죠. 마린스에 관해서라면은 저 이상 가는 전문가도 없을 겁니다. 그런데 마린스 이야기를 듣겠다고 하시는 걸 보니까 마린스의 감독 자리에 관심이 있으신가 봐요?”

“글쎄, 사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어. 야구는 할 만큼 한 것 같고, 이제는 내 인생을 살아봐야겠다는 생각뿐이었지. 한국행을 택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 하지만······.”

“하지만?”

잠시 한숨을 내쉰 프레스톤 윌슨이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평생 야구밖에 모르고 살아온 내가 한국으로 훌쩍 떠나가서 대체 뭐를 할 수 있을까? 미영이 일을 하러 나가고, 그러면 난 그냥 아무것도 할 일 없이 멍하니 숨만 쉬는 게 정말 괜찮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물론 야구 감독을 한다면 바빠지겠지. 하지만 내가 따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KBO는 팀 간에 이동 거리도 굉장히 짧고 일정도 MLB처럼 빡빡하지가 않다고 하더라고. 그러니 조금은 쉬어가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일할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어.”

필 니크로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마린스의 감독을 조금은 쉬어가는 마음으로 느긋하게라니. 단언하건대 그건 마치 뜨끈해서 온천욕 하기 좋은 초열지옥이라 든지, 서늘해서 산책하기 좋은 홍련지옥과 같은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아니, 무슨 야구팀 감독을 묘사하는 데 그런 디테일한 지옥 이름까지 나옵니까.’

-마린스라면 그런 존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존······중?’

성민이 답했다.

“솔직하시네요.”

“네 말처럼 이제 우리는 곧 가족이잖아.”

“그렇죠. 가족이죠.”

“아무튼, 또 한 편으로는 어쨌든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한번 원정을 나가면 2박 3일은 집에 못 들어가는 거고, 더군다나 마린스는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진 팀이라고 하니까······. 게다가 아무리 메이저리그가 아니라고 해도 야구를 그런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것도 미안하기도 하고 말이야.”

많은 용병이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KBO를 찾는다. 그리고 크게 엿을 먹는다. 물론 그들은 기껏해야 AAA급에서 미니멈 사이즈의 선수들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들 역시 어느 정도의 성적은 거둔다. 다만 그들은 어느 정도의 성적을 거두는 것으로 만족해선 곤란한 위치다. 사람들이 용병에게 기대하는 성적은 항상 1, 2선발급 투수. 혹은 중심타자급 활약이고 실제로 그들은 그만한 돈을 받아 간다.

“혹시 마이너에서 감독하던 시절 기억나세요? 처음 메츠의 감독을 맡았을 때는요?”

“마이너에서 감독하던 시절이 어제처럼 생생하다면 이제 거짓말이지.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니까. 나쁘지 않았어. 다만 아쉬웠던 점은 마이너의 가장 큰 목적은 좋은 선수를 키워내는 부분이었기에 우승을 위해 애쓰지 못했다는 점? 그리고 메츠에 처음 감독으로 왔을 때는 한숨이 나왔었지. 대체 이걸 어떻게 되살리나 싶을 만큼 엉망이었거든. 그나마 호세 녀석이 있어서 다행이었지. 한 2년 녀석이랑 같이 으쌰으쌰하고, 녀석 은퇴하자마자 놀겠다는 녀석을 강제로 코치로 앉혀놓고 3년 더 으쌰으쌰 한 결과 우승까지 했지. 그때 기분은 글쎄? 선수 시절까지 모두 통틀어도 손에 꼽힐 만큼 뿌듯한 순간이었다고 기억되는군.”

프레스톤 윌슨의 긴 이야기에 성민이 입을 열었다.

“제가 감히 단언하건대 감독님께 마린스의 감독 자리는 독이 든 싸구려 와인잔입니다.”

“독이 든 싸구려 와인잔? 그게 무슨······? 독이 든 성배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어도 싸구려 와인잔이라니?”

“독이 든 성배는 그 독을 이겨냈을 때 어마어마한 걸 얻을 수라도 있죠. 충분히 독을 감수해볼 만합니다. 하지만 마린스 감독은 글쎄요······.”

“그래,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나도 알아. 이미 빅리그에서 커미셔너 컵을 들어 올려 본 감독으로써 KBO의 감독을 맡아서 우승한다고 해도 그리 커다란 영광이 더해지지는 않는다는 이야기겠지. 하지만 그걸 독이 들었다고 표현하기에는 조금 그렇지 않나? 지금 자네는 마치 내가 마린스의 감독을 맡으면 굉장히 힘들어 할거라고 단언하는 것 같은데?”

필 니크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암, 단언할 만하지.

성민이 프레스톤 윌슨의 말에 웃으며 답했다.

“감독님. 마이너에서 감독하던 시절을 떠올려 보세요. 빅리그에서 감독하던 때보다 특별히 더 쉬웠습니까? 물론 선수 프레스톤 윌슨이 KBO로 간다면 리그를 폭격할 수 있겠죠. 하지만 감독은 선수들의 기량을 최대한 끌어내는 게 전부입니다. 절대적인 선수의 기량은 감독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죠.”

“아, 그 부분은 자네가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 마린스가 나에게 주겠다고 한 시간은 짧지 않아. 나도 KBO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아봤다네. 선수 간의 수준차가 매우 크고, 4년 단위로 FA 계약이 되지. 그리고 MLB와 마찬가지로 페이롤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바로 그 FA 선수들이더군. 그에 더해 용병에 대한 의존도가 굉장히 높지. 마린스에서는 나에게 최소 3년의 계약 기간을 줄 생각이라고 하더군. 그리고 그에 어울리는 권한도 넘기겠다고 했어. 선수에 대한 영입을 전적으로 맡기고 그건 용병 역시 마찬가지라고 했다네. 이건 뭐, 단순한 감독이 아니라 거의 단장에 가까운 권한이더군. 그런 조건이라면 난 충분히 팀을 리빌딩 할 수 있다고 확신하네.”

“글쎄요. 그거 제가 듣기로는 책임을 모두 감독님한테 미루겠다는 말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데요?”

“책임을?”

“지금 마린스 상황은 최악입니다. 거의 메츠를 되살리던 시절 이상일 거예요. 심지어 메츠를 되살릴 때는 그래도 팀의 정신적 지주가 돼줄 수 있는 호세 레예스 코치님이 계셨지만 마린스는 아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이름값 높은 감독님을 이용해서 어떻게든 면피를 해보겠다는 속셈일 겁니다.”

프레스톤 윌슨이 작게 신음했다.

“몸담았던 팀에 대한 평가가 아주 박하군.”

“조만간 가족이 될 분을 위한 솔직한 조언이죠.”

“그렇다면 자네 조언은 오퍼를 거절하라는 쪽이로군.”

“네, 위대한 경력을 쌓아 올린 야구인 프레스톤 윌슨 감독님께 드릴 수 있는 조언은 이쪽이죠.”

“그건 너무 거창한 이야기로군. 그런데 이쪽이 있다는 말은 다른 쪽도 있다는 이야기로 들리는 것 같군.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쪽이 오히려 본론인 것 같단 말이지. 끌려가는 건 조금 싫어하지만 그래도 일단 들어는 봐야 할 것 같은데?”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건 우리 엄마인 권미영 여사님과 결혼하는 미래의 가족을 위한 이야기죠.”

“갑자기 흥미가 확 돋는군.”

“우리 엄마 마린스 팬입니다.”

“어?”

“윌슨 감독님 부모님도 메츠 팬이셨죠?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이 10년이나 마린스에서 뛰었는데, 원수 아니면 팬 둘 중 하나가 되는 게 당연하죠.”

“아니, 우리 아버지는 메츠 선수였으니 경우가 좀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설득력은 있군.”

“게다가 외국인 감독님이 갑자기 마린스에 나타나서 팀을 휘어잡으려면 그게 아무리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선수이자 감독이라고 해도 쉽지는 않을 겁니다. 코치 선임권을 얼마나 내줄지는 모르겠지만, 예산을 생각하면 메이저급 코치를 데리고 가기도 힘들 테고요. 하지만 김성민의 ‘가족’이라면 이야기가 좀 다르죠.”

프레스톤 윌슨이 납득했다.

홈팀의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하나의 가족이라면 배타적인 분위기의 집단에 끼어들기 유리할 것이 분명하긴 했다. 당장 자신도 메츠에서 쉽게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메츠의 뛰어난 선수였던 아버지 무키 윌슨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성민의 의도는 그쪽은 아니었지만.

“저한테 마린스 선수의 공략집이 있습니다.”

“응? 잠깐만. 그게 무슨 소리인가? 선수들의 세부적인 기록은 어차피 감독이 되면 다 들어오는 자료일 텐데? 그보다 더 세밀한 자료가 있다는 이야기인가?”

“생각하시는 자료와는 조금 다른 자료죠. 아 그리고 프런트 직원들의 공략집, 코치진의 공략집도 있습니다.”

“응?”

“3년까지도 필요 없을 겁니다. 1년. 1년이면 충분합니다.”

필 니크로가 잠시 눈을 감고 상상했다.

김성민이 절대권력을 갖고 마린스의 감독으로 부임하는 광경을. 이제 사라져 존재하지 않는 입모근이 강하게 수축하는 느낌이 들었다. 소름이 돋았다는 의미다.

이건 어쩌면 2년 전, 김성민이라는 KBO 역대 최고 수준의 투수가 선수로 뛰던 시절보다 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니 확신이 들었다.

장담할 수 있다.

선수로서 김성민이 초일류라면, 마린스를 다루는 부분에서 김성민은 올 타임 넘버원이다.

***

“후, 대충 일단락이 됐네요.”

-프레스톤 윌슨 감독이 마린스 감독 자리를 수락할 것 같으냐?

“글쎄요.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잖아요.”

-응? 그게 무슨 소리냐?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니?

지금까지 프레스톤 윌슨 감독을 마린스의 감독으로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추진해와 놓고 갑자기 그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니?

필 니크로가 잠시 당황했다.

“에이, 벌써 잊어버리셨어요? 지금 내가 왜 이런 귀찮은 짓을 했는지?”

-왜 이런 귀찮은 짓을 했냐니? 그게 그러니까······.

맙소사.

기억났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은 프레스톤 윌슨 감독의 은퇴설. 그가 욕먹는 게 보기 싫다는 권 여사의 부탁. 그 와중에 프레스톤 감독의 이미지를 챙기면서 권 여사에게 악플이 달리지 않게 하겠다는 성민의 의도였다.

“자, 생각해보세요. 이제 마린스에서는 언플 시작할 겁니다. 내년 시즌에는 팀의 쇄신을 위해서 외국인 감독을 모셔오겠다고요.”

-그렇겠지.

“마린스는 외국인 감독에 대한 향수가 강하니까 반응은 폭발적일 겁니다. 하지만 그들도 설마 프레스톤 윌슨 감독까지는 감히 생각하지 못하겠죠.”

-당연하지 메이저 우승 커리어를 가진 현역 감독이니까.

“거기에 마린스의 팬들은 처음에 소식이 터졌을 때는 꽤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기는 할 건데, 아직 시즌도 안 끝났고 뭐 이대로면 100패 찍는 건 확실하죠. 그렇게 100패를 딱 찍는 순간?”

-프레스톤 윌슨이라는 이름이 흘러나온다?

“그렇죠. 그러면 이제 상황은 온통 혼란으로 가득할 겁니다. 미국에서는 대체 KBO의 마린스는 어떤 팀인가? 할 거고, 그 와중에 프레스톤 윌슨 감독의 미담들이 계속 쏟아질 겁니다. 덤으로 한 20년쯤 연애 제대로 못 한 이야기도 나오겠죠.”

-그렇겠지?

필 니크로는 대체 이 모든 일이 어떻게 그런 목적으로 이어지는지를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근데 그게 너희 어머니 악플과 대체 무슨 상관이냐?

“그렇게 온통 호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결혼 상대가 밝혀지는 거죠.”

-그래봤자 프레스톤 윌슨 감독을 은퇴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계속될 건데?

“한국행, 마린스. 그리고 김성민의 어머니. 보스턴과 김성민의 공식적인 잔여 계약은 1년.”

-맙소사.

“프레스톤 윌슨의 은퇴 기사가 더 클까요? 아니면 위기에 빠진 소중한 고향 팀을 구하기 위해 돌아가는 새아버지. 그리고 현재 사이 영 위너가 확실시되는 계약 기간 1년 남은 에이스 투수의 스토리가 더 클까요?”

-하지만 프레스톤 윌슨이 감독을 받아들일지는 모르는 일이고, 너도 발표만 안 했을 뿐 이미 계약 자체는 끝냈는······. 맙소사. 발표를 안 했으니 괜찮다 이거구나.

***

양키 스타디움. 양키스의 덕아웃.

성민이 공식적으로 정의내린 호구 제이크 스컬리가 방망이를 집어던졌다.

< 프랜차이즈(8)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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