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랜차이즈(7) >
9월.
프레스톤 윌슨과 권미영 여사의 애정전선이 폭풍처럼 진행되던 그 시기. 보스턴 레드삭스의 시즌은 그보다 더 폭풍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딱!!
[맙소사!! 태너 맥도날드!! 강한 타구. 우측 담장을!! 우측 담장을!!! 넘어갔습니다.]
[발사각 27도. 101마일의 빠른 타구였습니다.]
이번 확장 로스터로 콜업 된 애송이들이 생각보다 훨씬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게다가 안 그래도 점점 과열되던 맥스 슈피겐과 브라이언 보일의 경쟁은 부룬디 쿠치에가 끼어드는 순간 한층 더 뜨겁게 달아올랐는데, 놀랍게도 이것이 마이너스는커녕 완벽하게 플러스로 작용하는 기적이 발생했다.
게다가 부상에서 돌아온 매튜 쿠퍼의 벌크업 역시 성공적이었다. 비록 수비 범위는 조금 좁아졌지만, 후안 칼초가 아닌 루시 알베리가 유격수를 봐주는 것으로 그 문제는 해결이 됐고, 루시 알베리의 약간 부족한 공격력은 9월 이후 열아홉 경기에서 무려 7개의 홈런을 몰아친 매튜 쿠퍼의 방망이가 충분히 메워주었다.
결과적으로 말해 9월의 보스턴 레드삭스는 정말 미친 듯이 이기고 또 이겼다.
물론 성민의 목표처럼 지구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보스턴이 이기고 또 이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동부지구 1위를 달리는 뉴욕 양키스가 패배해야 했다. 하지만 양키스는 역시 양키스였다. 물론 좁혀지긴 좁혀졌다.
9월 초 다섯 경기의 차이는 마지막 시리즈 맞대결을 앞둔 지금 네 경기로 줄었다. 하지만 이제 남은 경기는 고작 열일곱 경기에 불과했다. 열아홉 경기를 펼치는 동안 보스턴은 최상의 경기력을 뽐냈음에도 고작 한 경기를 좁히는 데 그쳤다. 이제 짱깨식 계산법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가능해요.”
-그래.
하지만 가능하다.
이번 양키스와의 시리즈를 스윕한다면 이제 남은 것은 고작 1승 차이에 불과하다. 기세를 몰아간다면 충분히 역전할 수 있다.
[뉴욕 양키스 - 보스턴 레드삭스 시리즈 마지막 맞대결!!]
[보스턴 레드삭스는 아직 남아있는 지구 우승의 가능성을 잡을 수 있을까?]
-지금 우리 보스턴이 17경기 남은 상황에서 91승 54패잖아. 양키스가 95승 50패고. 이번 맞대결에서 스윕승하면 94승 54패랑 95승 53패니까 충분히 지구 1위 노려볼 수 있지.-
-거, 희망 회로가 너무 과하게 돌아가서 아주 불타버리겠소.-
-지금 보스턴 기세면 충분히 할 수 있다!! 아자!!-
-충분히 할 수 있는 소리 하네. 어디 양키스 기세는 뭐 만만하냐?-
-현실적으로 보스턴이 위닝시리즈 한다고 치면 보스턴은 93승 55패. 양키스는 96승 52패. 그러면 남는 경기가 14경기. 보스턴은 그냥 와일드카드나 준비하는 게 현명할 듯.-
-아니, 봑 놈들 보스턴이 위닝시리즈 하는 게 어디가 현실적이라고 그러는 거지? 양키스한테 찌발리고 엉엉 울면 어쩌려고 그러냐?-
-응, 1차전 선발 김성민. 그리고 남은 경기에서 1승 1패 하면 위닝시리즈-
-근데 성민이가 이기는 건 상수라고 치고, 남은 2경기만 어찌어찌 이기면 스윕승이니까 아직 지구 1위 노려볼 만한 거 아님?-
-그래!!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었음.-
-삐삐!! 희망 회로가 너무 과열되어 전원을 차단합니다.-
양키 스타디움을 찾은 관중들의 얼굴에 일말의 불안감이 감돌았다.
“괜찮겠죠?”
“당연하지.”
열일곱 경기를 남긴 상황에서 4경기 차이.
설사 이번 시리즈를 루징시리즈로 끝낸다고 해도 여전히 3경기 차이다. 요즘 양키스의 기세 대로라면 지구 1위가 뒤바뀔 리는 만무하다. 혹시 위닝시리즈로 끝낸다면 차이는 다섯 경기로 벌어진다. 그러면 이제 두 다리를 뻗고 편한 마음으로 맥주나 마시며 경기를 관전할 수 있다. 그리고 만의 하나라도 스윕 승을 거둔다면? 그건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진다.
그러나 김성민이 지금까지 보여준 포스가 너무 무서웠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성민은 부정할 수 없는 이번 시즌 리그 최고의 투수였으니까. 하지만 뉴욕 양키스의 팬들에게 성민은 단순히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 녀석은 마치 양키스를 잡는 것이 자신의 숙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공을 던져 댄다.
“애초에 얼마를 써서라도 저 자식을 잡았어야 했어. 그랬으면 작년에 월드 시리즈를 내주는 일도 없었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이번 트레이드 때 우리가 데리고 올 수도 있었잖아. 유망주라면 우리도 보스턴 못지않게 괜찮은 애들이 있었다고.”
“저 녀석 보스턴이랑 계약이 내년으로 끝이지? 내 생각에는 얼마를 쓰더라도 꼭 데리고 와야 하는 투수야.”
“당연하지. 나이가 좀 있기는 하지만 너클볼 투수잖아. 7년, 8년짜리 장기 계약을 해서라도 데리고 와야 해.”
양키 스타디움에 모인 관중들이 보스턴 덕아웃 앞에서 가볍게 몸을 푸는 성민을 바라보며 수군댔다. 오늘 그들의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는 욘 마르틴. 이번 시즌 노쇠화의 기미가 역력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3.64의 훌륭한 성적을 기록 중인 그들의 에이스다. 김성민이 2.61이라는 사기적인 성적을 기록하고 있기에 조금 묻히는 감이 있었지만, 3.64의 평자책 역시 리그 전체를 통틀어 일곱 번째로 낮은 평자책이며 아메리칸리그 동부 지구로 한정 지으면 세 번째다. 그러한 에이스의 등판에도 불구하고 양키스의 팬들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1회 초.
욘 마르틴의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꿰뚫었다.
-뻐엉!!
“스트라잌!!”
전성기의 구속을 잃어가기 시작한 이 에이스는 오늘의 맞대결에 몹시 감사했다. 물론 로테이션 순서상 만나게 된 상황이기는 했다. 하지만 세 번 중 한 번만 이겨도 승리하는 팀과 세 번을 다 이겨야 하는 팀이 만났다면 전자의 팀은 굳이 일등 마와 일등 마를 맞붙일 필요가 없다.
그래 물론 안다. 양키스는 이런 상황에서 피해가는 느낌을 줘서는 안 되는 팀이라는 것을. 또한, 지금 양키스에는 이 정도 여유는 있다는 것도. 하지만 이 맞대결에는 분명 오랜 시간 양키스를 위해 헌신해온 욘 마르틴에 대한 존중이 섞여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욘 마르틴이 거기에 부응할 것은 오직 가장 좋은 피칭뿐일 터.
91.7마일의 커터가 제롬 스튜버츠의 땅볼을 끌어냈다. 선행 주자가 있다면 선행 주자의 학살자 소리나 듣는 제롬 스튜버츠였지만, 그 빠른 발은 인정할 만했다. 그는 이번 시즌 내야안타만 무려 41개를 기록했다.
하지만 오늘은 양키스의 유격수 제이크 스컬리가 조금 빨랐다. 평소보다 한 걸음 깊숙하게 들어온 위치. 그의 몸이 빠르게 땅볼 타구를 잡아냈다. 그리고 그대로 일루로
“아웃!!”
제롬 스튜버츠가 아쉬움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보스턴의 공격이 이어졌다.
분명 욘 마르틴은 전성기를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훌륭한 투수였으며 무엇보다 그의 등 뒤에는 그를 응원하는 4만7천 명의 핀스트라이프들이 존재했다.
-딱!!
외야 플라이.
-뻐엉!!
“스트라잌!! 아웃!!”
루킹삼진.
“젠장, 저게 어떻게 스트라이크냐. 존에서 한참 벗어났구만.”
“쟤네 홈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매튜 쿠퍼가 연신 투덜거리며 방망이를 내려놓고 글러브를 챙겨들었다.
이제 성민의 차례였다.
이제는 지겹게 느껴지는 에노모토 코이치가 타석에 들어왔다. 지난 맞대결 당시 에노모토 코이치의 컨디션은 절정이었다. 물론 성민을 상대로는 썩 재미를 보지 못했었지만 당시 그의 기량이 절정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만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동작이 둔하군.
‘저 녀석도 사람인데 지칠 때도 됐죠.’
에노모토 코이치는 올해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그래서였을까? 재작년과 작년에는 제법 배려를 받았던데 반해 올해는 거의 전 경기에 출장했다. 물론 9월 확장 로스터 이후로 좀 쉬긴 했다. 당장 직전 경기도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장기간의 피로가 풀리는 데는 최소 보름의 휴식은 필요하다.
여전히 나쁘지 않은 성적을 기록하곤 있었지만, 에노모토 코이치는 명백하게 지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타격으로 드러났다.
-딱!!
초구 72.4마일 너클볼. 빗맞은 공이 느린 내야 땅볼로 이어졌다. 루시 알베리가 빠르게 달렸다. 에노모토 코이치 역시 1루를 향해 빠르게 달렸다. 하지만 방망이를 휘두른 이후 1루를 향해 달리기까지 반응속도 자체가 아주 미세하게 느렸다. 본래 에노모토 코이치는 홈에서 1루까지 3.7초대의 터무니없는 속도를 자랑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뻐엉!!
아슬아슬한 차이.
“아웃!!”
황당한 표정을 짓는 에노모토 코이치에게 양키스의 주루코치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비디오 판정을 신청해봐야 아웃이다.
그리고 타석에 두 번째 타자인 제이크 스컬리가 들어왔다.
에노모토 코이치에 이어지는 제이크 스컬리. 그들은 명실상부한 아메리칸리그 최고의 리드 오프 콤비다. 심지어 제이크 스컬리는 철강왕으로 유명하다. 그는 이번 시즌 에노모토 코이치 못지않게 많은 경기를 치른 ‘유격수’임에도 1회의 몸놀림을 봤을 때 여전히 쌩쌩했다.
-호구 왔구만.
하지만 그러면 뭐하겠는가.
-부웅!!
“스트라잌!!”
-뻐엉!!!
“스트라잌!!”
-딱!!
-딱!!
-부웅!!
“스트라잌!! 아웃!!”
지난 경기 이후로 성민에게 심리적으로 한 수 뒤지고 들어가는 호구가 돼버린 것을. 5구째 느린 너클볼에 깔끔하게 헛스윙 삼진.
성민이 가볍게 양키스의 타자들을 요리했다. 아메리칸리그 전체 승률 1위 팀을 상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이제는 여유까지 느껴진다. 메이저에 진출한 지 고작 2년. 녀석은 명백한 리그 최정상 투수로 거듭났다.
-그래 봐야 입 놀리는 솜씨에 비하면 아직 한참 먼 것 같다만.
‘네?’
***
-뉴욕 메츠 감독님-
그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저장된 이름에 필 니크로가 실소했다. 요즘 여러 가지로 인간 같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성민이었기에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보여주는 인간적인 소심함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아, 윌슨 감독님. 어쩐 일이세요?”
“내일이 등판인 걸로 아는데,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군.”
“괜찮습니다. 뭐 아직 잠자리에 들려면 서너 시간은 더 있어야 하는걸요.”
프레스톤 윌슨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그 머뭇거림이 성민에게 많은 정보를 알려주었다. 역시 박경효다. 참지 못하고 금세 나불거릴 거라고 확신했는데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 없다.
기사 혹은 구단에 직접 보고.
박경효에게 소식을 흘릴 때는 두 가지 가능성을 다 고려했었다. 기자들과 힘껏 놀고 싶었으면 일단 기사로 내보내고 봤을 것이고 윗선에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직접 보고를 했을 것이다.
기사로 보기 전에 프레스톤 윌슨에게 직접 전화가 온 것을 보니 이번에는 아무래도 후자를 선택한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신데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면 힘껏 돕겠습니다. 누가 뭐래도 저희 이제 곧 가족이잖아요.”
성민의 이야기에 프레스톤 윌슨이 살짝 감동했다.
“사실은 어떻게 알았는지 부산 마린스에서 연락이 왔어.”
“마린스에서요?”
“어, 감독 자리를 제의하더라고.”
빙고.
모든 시나리오가 성민이 원하는 대로 흘러왔다. 그리고 이제는 슬슬 그 모든 시나리오의 끝을 볼 시간이었다.
< 프랜차이즈(7)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