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랜차이즈(3) >
성민의 투덜거림에 필 니크로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물론 닿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손길은 꽤나 따듯했다.
괜찮다. 평생 자기만 사랑해줄 것 같았던 엄마가 누군가의 여자가 되는 상황이다. 조금은 투정 부리고 짜증 내는 것 정도야 봐줄 만하다. 다른 사람은 다 아니더라도, 지난 3년간 함께 동고동락했던 필 니크로만큼은 성민의 이런 작은 투정 정도는 용서해줄 수 있었다.
-그래도 그 두 사람을 슈렉이랑 피오나 공주라고 하기에는······.-
“하긴, 제가 동키라고 하는 것도 좀 말이 안 되기는 하네요.”
-하지만 조이가 용이라고 하는 건 그래도 좀 말이 되는 것 같구나.-
“그게 제일 말이 안 되는 부분이거든요? 세상에 그렇게 귀여운 드래곤이 어딨습니까?”
***
스티브 저먼은 뉴욕 메츠의 팬이다. 기자 생활을 하는 지금도 그것은 변함없다. 그런 그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누구?”
“김성민입니다.”
그리고 뉴욕 메츠의 팬들에게 김성민은 그리 유쾌한 이름은 아니었다. 물론 작년 메츠의 월드시리즈 진출을 막아섰던 것은 디아고 헤밍턴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경기의 첫 단추인 1차전에서 8이닝 14삼진 2피안타 무실점. 그리고 경기를 마무리 짓는 5차전에서 7.1이닝 6피안타 1볼넷 2실점. 그야말로 작년 챔피언십 시리즈는 디아고 헤밍턴으로 시작해서 디아고 헤밍턴으로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김성민 역시 만만치는 않았다. 9이닝 4피안타 무실점 완봉승. 몇몇 팬들은 2차전에서 김성민이 다저스의 불펜을 모조리 쉬게 해주는 바람에 3차전 이후 경기가 더 엉망이 됐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시즌 중에 그는 메츠를 상대로 무려 2승을 챙겨갔었다. 그것도 그들의 심장인 시티필드에서만!!
“김성민 같은 소리 하네. 데이빗이냐? 아니면 올란드? 어디서 또 아시안들 발음 연습 좀 하고 온 것 같은데. 티 엄청 나거든?”
물론 유쾌한 이름이건, 그렇지 않은 이름이건, 김성민은 MLB의 탑스타 중 하나다. 비록 스티브 저먼이 제법 이름난 스포츠 기자라고는 하지만 메츠도 아니고, 심지어 양키스도 아니고 저 멀리 보스턴의 김성민 같은 선수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올 이유는 전혀 없다. 그렇기에 이걸 진짜 김성민이라고 믿는 것보다는 그의 친한 친구 놈들이 장난을 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때론 합리성만으로는 돌아가지 않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잠시만요, 이거 영상통화로 전환하시죠.”
“어휴, 그래. 전환하자 전환해. 또 무슨 지랄을 준비한 거야?”
이런 미친?
“이런 미친? 진짜 김성민?”
자신도 모르게 스티브 저먼의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왔다. 영상통화에서 나온 얼굴은 분명 김성민이었다. 물론 디지털 세상이고, 이런 가짜 영상을 영상통화로 보내는 방법도 존재할지 모른다. 하지만 데이빗이나 올란드 같은 머저리들이 그런 기술까지 익혀서 자신을 속이려 한다고 믿기 보다는, 지금 전화를 건 사람이 진짜 김성민이라는 쪽이 더 설득력이 있다.
“네, 진짜 김성민입니다.”
“맙소사. 스티브 저먼입니다. 김성민 선수가 저한테는 대체 무슨 일로?”
마찬가지로 메츠의 팬인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 김성민의 이름 뒤에는 비속어가 따라붙지만, 그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는 절대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빅리그의 탑스타가 대체 무슨 볼일이 있어서 뉴욕의 평범한 기자에게 전화를 건 것일까? 하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요즘 보기 드문 양심적이고 정직한 기자님이라고요.”
“네? 네?”
“사실 요즘 세상에 기자와 양심적, 그리고 정직이라는 단어가 함께 사용되는 건 거의 불가능하잖습니까. 그런데 아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다들 기자님은 꽤 믿을 수 있는 분이라고 하더라고요.”
“아, 감사합니다.”
스티브 저먼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탑스타의 전화에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도 벌써 10년 넘게 기자 생활을 해온 남자다.
뭘까? 대체 뭐 때문에 보스턴 레드삭스의 선수가 자신에게 전화를 직접 걸어 온 것일까? 에이전시를 끼고 이야기하기 힘든 일이겠지?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특별히 할 것이 있는 건가?
“이번 기사 잘 읽었습니다.”
“네?”
“프레스톤 윌슨 감독님에 관한 기사요.”
“아······.”
“아시다시피 프레스톤 윌슨 감독님은 제 고향인 한국에서도 상당히 인기가 많은 분이시거든요. 저도 어린 시절에 프레스톤 윌슨 감독님 출장하는 경기들 보면서 자랐고요. 물론 강진호 선수 덕분이긴 하지만 그 당시 뉴욕 메츠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국민팀이나 다름없었거든요.”
자신과 마찬가지로 프레스톤 윌슨의 팬이었다는 그의 이야기에는 우선 반가운 마음이 생겨났다. 작년 메츠의 앞을 가로막았던 투수이기는 하지만 애초에 최대 원수는 김성민이 아닌 디아고 헤밍턴이었으니까.
동시에 그의 용건이 프레스톤 윌슨의 기사였다는 부분은 그의 심장을 뜨끔하게 만들었다. 안 그래도 의도했던 것과는 다르게 흘러간 기사였다. 메츠의 홍보팀장인 차드 도넬리와 일단 이야기를 나눈 것으로 대충 수습하긴 했지만 사실 썩 마음에 드는 결과는 아니었다.
“기사 부분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사실 저 같은 오래된 팬 입장에서 볼 때 기사만 보면 이건 오히려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 반응이 참······.”
하지만 성민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그를 타박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최근의 성적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뭐, 그렇죠. 작년과 비교해서 딱히 달라진 게 없는 전력구성인데 작년에는 챔피언십 시리즈까지 나갔고, 올해는 와일드카드도 힘든 분위기니까요. 그렇다고 뭐 딱히 부상 선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팬들에게는 애당초 작년에 챔피언십 시리즈까지 진출한 것이 대단한 일이었던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죠. 게다가 뉴욕 메츠의 오랜 팬들에게 포스트시즌 진출은 너무 당연하고, 월드 시리즈 우승도 뭐 격년에 한 번 정도는 해줘야 당연한 거였으니까요. 뭐, 대단한 순간들이기는 했습니다. 훌륭한 선발들, 승리를 지킬 줄 아는 불펜들, 타선은 어디 하나 거를 곳이 없었죠. 게다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5툴이라는 말이 걸맞은 선수까지.”
성민의 말을 듣는 스티브 저먼의 머릿속에 그의 소년기와 청년기를 함께했던 메츠의 가장 빛났던 20년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기억들이었다.
성민의 말이 계속됐다.
“당시의 이미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현재의 메츠는 불만이겠죠. 게다가 프레스톤 윌슨 감독은 당시의 주역 중 하나잖습니까. 요즘 보통의 팬들이라면 팀의 전력이 제대로 구성되지 않은 것에 단장을 욕하지만, 메츠의 팬들은 감독을 욕할 수밖에 없죠. 그들에게 프레스톤 윌슨 감독은 뉴욕 메츠 그 자체니까요.”
현대 야구의 팬이라면 팀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누구인지 다 알고 있다. 감독이 그저 선수들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면, 단장은 그 선수단 자체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두 직업의 중요성은 연봉만 봐도 알 수 있다. 2034년 현재 메이저리그 단장들의 평균 연봉은 350만 달러에 육박한다. 반면 감독의 평균 연봉은 150만 달러가 채 되지 못한다. 지난 10년 동안 단장의 평균 연봉이 100만 달러 이상 오르는 동안, 감독의 평균 연봉은 오히려 50만 달러나 떨어졌다.
“맞습니다. 사실 메츠의 최근 성적은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죠. 당장 김성민 선수만 하더라도 프레스톤 윌슨 감독님은 어떻게 해서든 영입을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었지만, 이뤄지지 못했죠. 3년 6,600만 달러라니. 결국, 프레스톤 윌슨 감독님의 말이 옳았습니다.”
“사실 그 부분은 저도 아쉬운 부분입니다. 다저스가 6,600만 달러를 제시했기에 오긴 했지만, 만약 메츠가 같은 금액을 제시했다면? 글쎄요.”
필 니크로가 뜨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일 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거절했을 거면서······.
성민의 이야기에 스티브 저먼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작년에 LA다저스에 성민이 없고, 메츠에 성민이 있었더라면? 챔피언십 시리즈의 결과는 어땠을까?
“게다가 윌슨 감독님이 또 어떤 분입니까. 사실 그분이 은퇴하고, 추후로 메츠를 이끌 거라고 믿었던 선수들이 부상으로 나가떨어진 이후 암흑기에 접어든 메츠를 수렁에서 끌어올린 1등 공신 아닙니까.”
“그렇죠. 확실히 프레스톤 윌슨 감독님이 부임한 이후 팀 케미스트리에 잡음이 나오는 일은 없었으니까요.”
스티브 저먼이 성민의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게다가 뉴욕 메츠의 전담 기자로 팀의 내부 사정을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알고 있었던 만큼 성민의 이야기가 더 크게 와닿았다.
“무엇보다 프레스톤 윌슨 감독님 하면 평생을 홀로 살아오신 분 아닙니까. 보통 위대한 선수의 2세는 마찬가지로 대단한 재능을 갖고 태어나잖아요. 우리가 MLB에서 그것도 이왕이면 메츠에서 프레스톤 윌슨 주니어를 못 보는 건 진짜 아쉬운 일이었고요.”
“그렇죠.”
“전 그래서 이번 그 진지한 열애설이 정말 굉장히 반가웠습니다.”
“그러시군요.”
그 순간 스티브 저먼의 머리에 무언가가 스쳤다. 프레스톤 윌슨 감독의 이런 열렬한 팬이라면 그에게 원할만한 것이 존재한다.
“아, 혹시 열애설 그 사진 원본을 원하셔서 이렇게 전화 주신 겁니까? 그거라면 죄송하지만 곤란합니다. 상대방 여성분의 신분이 민간인이거든요.”
“아닙니다. 천만에요.”
성민이 그 단호한 이야기에 마음속으로 흡족함을 표시했다.
“그냥 기자님의 의도와 다르게 벌어진 일들에 유감을 표시하고 싶었습니다. 뉴욕 메츠, 그리고 프레스톤 윌슨 감독의 팬으로써 말이죠. 게다가 조금 걱정이 되네요. 이대로라면 참 아쉬운 일들이 벌어질 것 같거든요.”
“네? 뭐 어떤 아쉬운 일이?”
“혹시라도 그 여성분이 이런 일에 부담감을 느껴서 모처럼 찾아온 프레스톤 감독님의 그 ‘진지한 만남’이 깨지지 않을까. 뭐 그런 걱정이죠. 댓글들을 읽으면 마치 그 여성분 때문에 프레스톤 감독님의 커리어가 엉망이 되고 있다. 뭐 그런 느낌을 받거든요.”
맙소사.
그 부분은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상황은 성민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심각했다. 성민은 단순히 현재의 인터넷 여론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티브 저먼은 알고 있었다.
프레스톤 윌슨 감독은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다.
그렇다면 이건 단순히 이번 시즌의 성적에 대한 비난만이 프레스톤 윌슨 감독의 그녀에게 쏟아지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프레스톤 윌슨 감독의 은퇴에 관한 부분까지도 모조리 그녀에게 쏟아지게 된다.
연예인이나 셀럽이 아닌, 평범한 민간인이 과연 그런 비난을 견딜 수 있을까? 굳이 그런 비난을 견디며 프레스톤 윌슨과 만남을 이어 나갈까?
성민의 이야기처럼 그는 40년에 가까운 생활을 뉴욕 메츠를 위해 한눈팔지 않고 헌신했다. 그런데 메츠는 그런 그의 헌신을 이렇게 돌려줘도 괜찮은 것일까?
“맙소사, 그건 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군요.”
“그러니까요. 이건 정말 프레스톤 윌슨 감독님의 팬으로서 참 아쉬운 부분이에요. 휴, 만약 모든 사람이 저희처럼 뉴욕 메츠와 프레스톤 윌슨 감독님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죠.”
성민의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스티브 저먼의 머리가 번뜩였다.
그래, 방법이 있다.
“김성민 선수, 잠시만요. 제게 방법이 떠오른 것 같습니다.”
“방법이요?”
“혹시 저를 조금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마침내 성민이 바라던 이야기가 스티브 저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프랜차이즈(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