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블 헤더(5) >
뉴욕 양키스는 세계 최고의 팀이다.
물론 야구를 보는 사람 가운데는 이 사실을 긍정하는 사람보다는 부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아니 감히 우리 팀을 놔두고 어디를 세계 최고라고!!
하지만 한 가지, 그들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뉴욕 양키스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을 쓰는 팀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는 그 막대한 돈 일부는 우수한 프런트를 구성하는 데도 사용됐다. 워낙에 돈 지랄로 점철된 이미지인지라 합리적으로 돈을 사용하는 스몰마켓들에 비해 잘 드러나진 않지만, 실제로 가장 정교하고 방대한 전력분석팀을 운영하는 것은 이런 메가마켓 팀들이다.
“이건 어떻게 봐도 괴물이네요. 좀 더 정확한 건 자세한 데이터가 나와야 알 수 있겠지만 지금 보이는 수치만으로도 이건 터무니가 없어요.”
“그래도 좀 지친 건 확실한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요, 지쳤는데 이게 유지가 되니까 괴물이라는 거죠. 지금 보시면 평균 구속이 시즌 중반 한창 좋을 때랑 비교해서 거의 1.6마일이 떨어졌어요.”
“확실히 그렇게 구속이 저하됐는데도 이런 기록을 내는 부분은······.”
“그게 아니죠. 아시다시피 너클볼은 공의 회전수를 억제하는 게 핵심이잖습니까.”
시즌 막판 피곤함에 쩔어 잠깐 헛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14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직원이다. 그것만으로도 지금 그가 하는 이야기가 무슨 소리인지 곧바로 알아들었다.
“맙소사!!”
“네, 컨트롤이 정말 비정상적으로 대단하다는 뜻입니다. 뭐 너클볼을 존에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걸 증명하는 거지만, 이건 그 정도로 설명 가능한 게 아니죠. 악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그 떨어진 악력에 맞춰 회전수를 억제할 수 있다는 소리니까요.”
“실투 비율은요?”
“8월에는 다섯 경기 39이닝 549개의 공을 던지는 가운데 회전수 3회 이상의 너클볼은 고작 여덟 개에 불과했습니다.”
549개 중에서 여덟 개.
많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즌 막판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는 상황에서 무려 39이닝을 던지면서 고작 여덟 개의 실투?
“그래도 다행인 점은, 8월에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정말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해서 달린 게 아닌가 싶다는 점입니다. 이번 경기만 보더라도 5회까지 벌써 실투만 네 개째 나오고 있으니까요.”
“이건 8월 이달의 투수상을 받고 긴장이 조금 풀렸다고 봐야겠죠?”
“체력적으로 한계에 달한 걸지도 모르죠. 작년 LA 다저스에서는 그런 것 없이 무사히 한 시즌을 치렀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철저하게 관리를 받았던 LA 다저스 시절 생활과 지금 보스턴에서의 생활은 다르니까요. 당장 작년 성민이 소화했던 이닝이 213.1이닝인데 아직 네 경기가 남은 상황에서 벌써 207이닝째 소화하고 있잖습니까.”
“하긴, KBO나 NPB 출신 동양인 투수들의 체력적인 문제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기는 하죠.”
사실 정규시즌 남은 3연전 맞대결 같은 부분은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정규시즌은 일종의 마라톤이다. 한순간 저쪽에서 힘을 내서 빠르게 달려 구간 레코드를 갱신한다고 해봤자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마지막 테이프를 누가 먼저 끊느냐다. 그런 의미에서 35경기가 남은 상황에서 다섯 경기 차이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이나 다름없고 양키스의 지구 우승은 사실상 확정이라고 봐야 했다.
문제는 포스트 시즌 디비전시리즈다.
현재 뉴욕 양키스는 아메리칸리그 전체 승률 1위다. 그리고 그것은 남은 기간 동안 뒤집힐 가능성이 크지 않다. 즉 뉴욕 양키스가 디비전시리즈에서 상대해야 할 팀은 와일드카드를 통해 디비전시리즈에 올라올 팀이다.
“일단 조금 더 지켜보죠. 어쨌거나 우리와 달리 보스턴은 여유가 없고, 남은 한 달도 달리지 않는다면 와일드카드조차 얻어내지 못할 확률이 존재하니까요.”
***
60.3마일의 느린 너클볼
-딱!!
높게 치솟은 타구가 좌익수 앞으로 날아갔다.
“아웃!!”
외야뜬공 아웃.
성민이 모자를 매만졌다.
-애송이들이 상대라 그런지 노리는 족족 걸려드는구나.
‘정확히는 이제 막 빅리그에 올라와서 뭔가 보여주고 싶어서 좀이 쑤신 애송이들이라서 그런 거겠죠. 게다가 녀석들도 1차전에서는 나름대로 괜찮았으니까요.’
변화가 조금 덜 한 느린 너클볼을 던지면 던지는 족족 방망이가 튀어나온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공 가운데 스트라이크존 안에 들어가는 공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냥 지켜보면 볼이 될 것임에도 그들은 용감하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내야 땅볼, 외야 뜬공, 내야 뜬공.
의욕이 가득한 타자들이 휘두른 방망이가 만들어 낸 결과들이다. 물론 게 중에는 행운의 안타도 존재하긴 존재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이어지는 내야 땅볼로 병살이다.
5회 초.
마지막 9번 타자를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내며 성민이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앞으로 2이닝 정도? 괜찮겠는데요.’
-글쎄다. 감독이 머리가 있으면 1이닝 더 던지고 끊겠지.
‘투구 수도 적당하고, 체력안배도 이렇게 잘했는데요?’
-지난 경기 노 히터 한다고 9이닝을 던졌던 걸 생각하면 오늘은 6이닝 던지는 것만 해도 충분하지. 게다가 다시 말하지만, 지구 우승을 노리는 너랑 다르게, 아마 얘들은 그 이후를 생각하고 있을 거다.
와일드카드는 단판 승부다.
그리고 보스턴 레드삭스는 현재 단판 승부로 가면 아메리칸리그 그 어느 팀과 붙어도 꿀리지 않는다. 아직 35경기, 한 달이 조금 넘게 남은 상황에서 당장 시즌 아웃이 된다고 해도 사이 영이 거의 확정인 선발 투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뭐, 괜찮습니다. 일단 오늘 경기는 이대로면 이길 게 분명하니까요.’
-아직 1:0인데도 자신감이 넘치는구나.
‘에이, 영감님도 딱 보면 견적 나오잖아요.’
성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딱!!
시원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루시 알베리가 98.7마일짜리 속구를 시원하게 공략했다. 구속도 조금 떨어졌다. 하지만 진짜 떨어진 것은 구위다. 횡 무브먼트, 종 무브먼트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던 더블린 펠트만의 공은 이미 없었다.
4이닝 내내 전력을 다해 공을 뿌려댄 더블린 펠트만의 악력은 이미 떨어졌다. 체력이 저하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제구력 저하는 이미 지난 이닝부터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게다가 루시 알베리가 메이저에서 타격으로 난조를 겪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속구를 치는 능력 하나 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9월의 저녁. 이제 쌀쌀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더블린 펠트만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뚝뚝 흘러내렸다.
케빈 포만이 또 한 번 마운드로 올라갔다.
“괜찮아?”
“손에서 좀 미끄러졌어요.”
케빈 포만의 시선이 힐끔 덕아웃을 스쳤다.
슬슬 움직일 때가 됐는데? 비록 투구 수가 79개밖에 안 되기는 했지만, 이 녀석 너무 열심히 달렸다. 실제로 덕아웃도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면 앞으로 하나 정도인가? 케빈 포만이 더블린 펠트만의 어깨를 툭 두들겼다.
“그래, 공의 위력은 아직 살아 있어. 자신 있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네 공은 알아도 못 칠 만큼 강력해.”
“저도 압니다.”
“그래, 그걸 알고 있는 게 진짜 일류지.”
애송이의 기를 있는 힘껏 살려주었다.
다음 타자는 1번 타자인 닉 존슨. 오늘 더블린 펠트만에게 2타석 연속 삼진을 허용했던 타자다.
그래, 이 정도는.
하지만 착각이었다.
더블린 펠트만이 강력한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공 자체의 위력 때문이었다. 100마일에 어마어마한 무브먼트를 지닌 속구와 92마일짜리 슬라이더. 듣기만 해도 터무니없다.
하지만 그 공의 위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더블린 펠트만은 아직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 투수에 불과했다.
‘젠장!!’
첫 번째 타석과 두 번째 타석에서 잘 먹혔던 슬라이더를 선택했다. 하지만 밋밋했다. 크게 휘어 들어가기는커녕 89마일짜리 복판에 몰린 행잉 슬라이더. 그야말로 배팅볼 그 자체다.
-딱!!
닉 존슨의 방망이가 힘차게 돌아갔다.
큼지막한 타구가 좌측 담장을 향해 날아갔다. 다른 구장이었다면 홈런도 노려볼 만한 타구였다. 하지만 이곳은 펜웨이파크. 그린 몬스터가 닉 존슨의 홈런을 막았다.
하지만 괜찮다.
1루에 있던 루시 알베리는 이미 뒤를 보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2루를 지나 3루. 3루 코치의 팔이 힘차게 돌아갔다. 그래, 그린 몬스터 아래에서 제대로 된 수비를 하는 것은 어지간한 좌익수가 아닌 한 무리다. 그리고 오늘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좌익수는 그 어지간한 좌익수에 포함되지 않는다.
“세이프!!”
적시 2루타.
보스턴이 1점을 추가로 적립했다.
시카고 화이트삭스가 서둘러 투수를 교체했다. 아직 2:0이다. 승부는 알 수 없다. 분명 불펜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들은 그렇게 생각을 했다.
-딱!!
그리고 그들의 그 헛된 기대를 매튜 쿠퍼가 완벽하게 박살 냈다. 교체된 투수를 상대로 또다시 홈런.
복귀 이후 지금까지의 부진이 거짓말이었다는 듯한 놀라운 활약이었다.
[김성민 6이닝 무실점!! 멈출 줄 모르는 기세!!]
[8월 이후 45이닝 2실점!! 보스턴의 상승세를 견인하는 슈퍼 에이스 김성민!!]
[시카고 화이트삭스와의 시리즈 스윕승!! 아메리칸리그 와일드카드 경쟁에서 성큼 앞서가는 보스턴 레드삭스!!]
-개 미쳤네. 내가 요즘 성민이 보는 맛에 산다.-
-너도 설마 마린스 팬이냐? 나도 요즘 성민이만 보고 있는데. 진짜 후, 이러다가 또 우승까지 하는 거 아닌지 몰라?-
-마린스?? 그게 뭐죠?? 먹는 건가요? KBO는 9개 팀밖에 없는데요.-
-흔한 마린스 팬의 현실도피로군. 근데 지금 보스턴 전력 가지고 우승은 좀 에바임.-
-왜? 요즘 기세 엄청 좋은데? 그리고 가을 야구는 어차피 에이스 싸움인데 성민이야 말할 것 없고, 라만 그레고리도 안정적인 프론트 라이너고 브라이언 보일에, 맥스도 요즘 괜찮고 부룬디 쿠치에도 이번 경기는 좀 부진했지만 나쁘지 않은 투수잖아. 불펜진도 이 정도면 탄탄하고.-
-가서 뉴욕 양키스랑 LA 다저스를 보고 옵니다.-
-근데 보스턴이 양키스랑 다저스 상대 전적은 꽤 괜찮지 않나?-
-다저스랑 이번 시즌에 3경기 해서 스윕패했음. 근데 양키스랑은 박빙이긴 하네.-
***
스티브 저먼은 뉴욕 토박이다.
어린 시절 메츠의 경기에 열광하며 자라난 그는 자연스럽게 야구에 관련된 일을 지망하게 됐고, 현재는 제법 이름난 스포츠 신문의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조안나, 지금 뭐라고 했어? 프레스톤 윌슨 감독님이 재계약을 안 하실 거라고? 그거 진짜야?”
“정말이라니까. 이번에 사무실 문이 제대로 안 닫혀서 우연히 듣게 됐는데, 그것 때문에 지금 구단에서도 엄청 말이 많은 모양이야.”
스티브에게는 한 가지 큰 장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타고난 그의 외모였다. 그는 자신이 잘생긴 걸 명확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그 결과물 중 하나가 메츠에서 일하는 여직원 조안나 베이커였다.
“뭐 때문이야? 설마 또 이번에도 재계약 엄청, 짜게 제시한 거야? 아니면 설마 올해 지구 우승 물 건너갔다고? 프런트 그 빡대가리들은 10년 전에 암흑기를 이제 기억도 못 하는 건가?”
“이번에는 그런 거 아닌 것 같아. 오히려 프레스톤 감독님 쪽에서 사의를 표명했다고 그러던데?”
“뭐라고? 그 야구밖에 모르는 양반이 감독 자리를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했단 말이야?”
팬심과 기자의 본능 사이의 어딘가. 스티브 저먼이 특종의 냄새를 맡았다.
< 더블 헤더(5)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