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블 헤더(3) >
더블린 펠트만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담장을 넘어가는 타구를 바라봤다. 매튜 쿠퍼가 뽐내듯 어깨를 으쓱하며 베이스를 도는 꼴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매튜에게 한 마디를 뱉었던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포수 케빈 포만이 마운드 위로 올라왔다.
“이봐, 펠트만. 정신 차려. 이제 고작 1점이야.”
“이게 넘어가네요?”
“멍청한 소리 하지 말고. 이거보다 더한 것도 종종 넘어가는 게 빅리그야. 저기 보스턴의 김성민 같은 녀석도 올해 두들겨 맞은 홈런만 21개고 이번 시즌 역대급 성적 쓰고 있는 저기 내셔널리그의 디아고 헤밍턴도 2경기에 1개는 홈런을 두들겨 맞고 있어. 메이저리그에서 홈런은 그냥 누구나 지불하는 세금 같은 거라고.”
물론 엄밀히 말해 사실은 아니다.
지금 더블린 펠트만이 두들겨 맞은 속구는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잘 제구된 속구였고, 성민이나 디아고가 두들겨 맞는 공들은 가끔 나오는 실투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굳이 메이저에 갓 올라온 투수의 기를 죽일 이유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어떻게든 살려줘야 한다.
케빈 포만은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조금 재수는 없지만, 이런 타입의 투수 놈은 자신감과 배짱 넘치게 공을 팽팽 던질 때 그 기량을 다 발휘하는 타입이다.
매튜 쿠퍼가 턱 끝을 치켜들고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랄로 가야르도를 비롯한 그의 친구들이 그 건방진 매튜 쿠퍼의 머리를 힘차게 두들겼다.
“이 자식, 한 달 만에 돌아와서 죽만 쑤다가 이제 겨우 홈런 하나 쳤다고 기세등등한 것 좀 봐.”
“어허, 죽을 쑤다니. 그냥 너무 오래간만이라 감을 잡는 데 시간이 좀 걸린 것뿐이야. 이제 감을 잡았으니까 쭉쭉 뻗어나갈 일만 남은 셈이지.”
“이제 막 빅리그 올라 온 애송이 상대로 하나 쳐놓고 그 무슨 잘난 척이냐.”
“애송이라니. 저 녀석 이번에 BA 전체 2위 했던 녀석이라고. 당장 빅리그 올라와도 충분한 투수라 이 말이지.”
“헛소리한다. 여기 BA 상위권에 이름 안 올려본 녀석이 누가 있냐? 그리고 다들 올라와서 똥 한 바가지씩은 푸지게 쌌던 거 기억 안 나?”
하지만 이번만큼은 매튜의 말이 옳았다.
더블린 펠트만이 이어지는 두 명의 타자를 모조리 삼진으로 잡아냈다.
1이닝 3삼진. 피홈런 하나가 큰 흠이기는 했지만, 메이저 무대에 처음 선 수많은 투수가 1이닝도 제대로 못 버티고 나가떨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의 나이가 고작 21살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매우 훌륭한 결과였다.
-재능이 있군.
‘애초에 100마일 넘는 공을 스트라이크존에 제대로 넣을 수 있는 투수잖습니까. 그거면 뭐 말 다 한 거죠.’
성민이 더블린 펠트만의 피칭을 대수롭지 않게 평가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고작 21살짜리의 재능에 감탄하기에 성민은 이미 너무 대단한 투수였다. 게다가 저만한 재능은 드물기는 하지만, 그래도 몇 년에 한 번씩은 나오는 재능이었고, 저런 재능을 지닌 투수들이 모두 빅리그에서 성공한 것도 아니다.
물론 피홈런을 허용한 직후 침착하게 두 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낸 것은 칭찬할 만하지만 글쎄······.
‘게다가 제가 보기엔 이건 저 포수, 혹은 덕아웃을 칭찬해야 할 것 같은데요.’
-하긴 그것도 그렇지.
만약 매튜 쿠퍼 이후의 타자가 랄로 가야르도 같은 타자였다면 백투백 홈런을 허용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피칭이었다. 피홈런 이후 이어진 더블린 펠트만의 피칭은 구위를 이용하여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오는 피칭이었다. 그것을 홈런을 처맞고 흔들린 1년 차 투수가 생각했을 리는 만무했다. 이건 아마도 괜히 흔들리는 것보다 그 압도적인 구위를 믿어보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한 다른 누군가의 판단이었을 것이다.
성민이 마운드에 섰다.
타석에는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4번 타자인 에드가 나바로가 올라왔다. 타율은 조금 낮았지만 확실한 한 방이 있는 타자다.
초구.
-따악!!
존을 완전히 벗어나는 속구를 에드가 나바로가 두들겼다. 타구가 내야 관중석으로 날아갔다. 완벽하게 벗어나는 공이었지만, 나바로의 기준으로는 그래도 해볼 만하다는 판단이었다. 게다가 저렇게 빗맞은 공을 내야 관중석까지 날려 보내다니. 역시 힘 하나는 굉장했다.
에드가 나바로가 아쉬운 표정으로 잠시 타석에서 물러났다.
“아쉽겠네. 팔이 한 3인치만 더 길었더라면 제대로 쳐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이 어이없는 공에 방망이를 내민 주제에 아쉬운 표정이 가득한 에드가 나바로를 비꼬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에드가 나바로는 그의 비꼬는 말을 순순히 긍정했다.
“아쉬운 일이기는 하지. 저 빌어먹을 너클볼들에 비하면야 이쪽이 훨씬 가능성 큰 공이었을 테니 말이야.”
“뭘 좀 알긴 아는 친구로구만.”
“그러니까 살살 좀 부탁해. 재계약도 다가오는데 나도 좀 먹고살아야지.”
그 넉살에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마운드의 성민이 두 번째 공을 준비했다.
73.1마일 빠른 너클볼.
춤추듯 날아오는 그 공을 향해 에드가 나바로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에드가 나바로의 그것이 엄살이었을까? 그의 방망이가 성민의 공을 두들겼다.
좌측 방면으로 날아가는 높고 강한 타구. 하지만 괜찮았다. 보스턴의 좌측 외야에는 초록의 괴물이 있었으니까.
미셸 에쉬만을 대신하여 좌측 외야를 지키고 있던 태너 맥도날드가 빠르게 달렸다.
‘쳇, 역시 좁아.’
차라리 다른 구장이었다면 워닝트랙 한참 앞에서 잡혔을 타구다. 하지만 좌측 담장까지 고작 94미터. 다른 구장보다 20미터 이상 짧은 펜웨이 파크다. 에드가 나바로의 타구가 그린 몬스터를 두들겼다.
태너 맥도날드가 타구의 방향을 예측했다. 보스턴과 계약을 맺은 AA 리그 포틀랜드 시독스의 홈구장인 해드록 필드는 복제품이라고는 하지만 펜웨이 파크와 똑같은 그린 몬스터가 설치돼있다.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
태너 맥도날드의 착각이었다.
그는 무언가를 보여주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대신 튕겨 나온 타구의 움직임을 보고 움직였어야 했다. 그의 예측이 완벽하게 틀렸다. 서둘러 공이 날아간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공을 주워들어 2루를 향해 강하게 내던졌다.
거기까지 추가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약 1.5초 정도?
하지만 1.5초는 아슬아슬하게 2루에서 잡아낼 수 있었을 발 느린 주자를 안전하게 2루까지 달려가게 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뻐엉!!
“세이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덕아웃이 조금 소란스러워졌다.
고작 2루타 하나에? 하지만 그럴 만했다. 안 그래도 1차전 경기에서 패배하여 조금 위축된 상황이다. 약간의 승산이라도 생기면 억지로라도 팀의 사기를 끌어 올려야 했다.
게다가 이번 경기의 상대가 또 누구던가.
바로 직전 경기 노히트 노런. 최근 다섯 경기 39이닝 2실점. 8월 평균자책점 0.46이라는 터무니없는 성적을 기록 중인 그야말로 최고의 투수가 상대인 상황이다. 2회부터 득점권에 주자를 보냈다는 것에 즐거워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마운드의 성민은 평소처럼 그냥 웃었다.
조금 달랐던 점은 웃은 것이 성민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필 니크로도 함께 웃었다. 물론 웃음의 의미는 조금 달랐지만.
-저 자식은 대체 뭘 하는 거냐? 혼자 무슨 춤이라도 추는 거야? 왼쪽으로 세 걸음, 오른쪽으로 전력 질주?
‘빅리그에 처음 올라왔으니 의욕이 충만해서 뭔가 보여주고 싶었겠죠.’
-다른 건 모르겠고 댄스에 재능이 없다는 건 확실히 보여준 것 같구나.
성민이 태너 맥도날드를 향해 괜찮다는 의미로 손짓했다.
뭐 대단할 것도 없다. 부산 시절, 말년의 김호섭은 이보다 더한 짓도 밥 먹듯이 했다. 심지어 그래놓고는 짬밥으로 누르기까지 했다. 이 정도는 그냥 애교다.
게다가 최근 다섯 경기가 너무 잘 풀려서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딱히 위기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자만하지 말아라.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메이저리그다.
‘자만하는 게 아닙니다. 자신감 있게 상황을 헤쳐나가려고 노력하는 거죠.’
필 니크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내심 만족했다.
지난번 노히트, 아니 권 여사의 결혼 선언 이후로 성민은 한 차례 더 성장했다. 물론 야구 실력적인 면에서의 성장은 아니었다. 무슨 무협 영화도 아니고 삶의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필살기가 생기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실력을 배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재능과 그것을 개화시키기 위한 노력뿐이다.
성장한 부분은 멘탈적인 측면이었다.
그래, 놀랍게도 안 그래도 마운드 위에서 거의 100점에 가까웠던 이 녀석은 한 단계 더 성장했다.
지금까지 녀석은 짜증이 나더라도 짜증을 억누르고 야수들을 다독였다. 그것이 승리하기에 더 좋은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성민은 짜증 자체가 나지 않았다.
승리에 대한 욕망이 사그라들었기 때문일까? 천만에. 그보다는 고작 ‘이 정도’로는 자신이 승리하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는 확신에 가까운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민의 이야기처럼 자만심과는 다른 부분이었다. 자만심이 상대를 경시하는 감정이라면 자신이 이뤄낸, 노력한 것에 확신하는 것이다.
2회 초.
성민이 그 자신감이 근거가 있는 것이었음을 피칭으로 증명했다.
2루에 선 에드가 나바로는 더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내야 땅볼.
삼진.
그리고 내야 뜬공.
성민이 가볍게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
‘젠장. 멍청했어. 거기서 대체 왜 욕심을 냈을까?’
덕아웃에 주저앉은 태너 맥도날드가 자신을 자책했다. 물론 성민은 괜찮다고 손짓해주었다. 다행이다. 하지만 선발 투수가 괜찮다고 해서 상황이 좋아진 건 아니다.
그는 지금 마운드에 선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투수 더블린 펠트만처럼 여유로운 상황이 아니다. 올해 벌써 24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드래프트 됐으니, 이제 꽉 찰 만큼 찬 나이다. 무언가를 보여줘야만 했다.
타석에서라도.
태너 맥도날드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의 방망이를 바라봤다.
“헤이.”
“어? 서, 성민?”
그리고 그 순간, 놀랍게도 그의 곁에 오늘의 선발 투수 성민이 털썩 주저앉았다. 등판일의 선발 투수가 예민한 것은 이미 마이너 시절부터 수도 없이 경험한 일이다. 아까 수비 중에는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 짜증이 많이 났던 것을 지금 풀러 온 것일까? 어차피 무실점을 잘 막았는데도 굳이?
태너 맥도날드가 긴장 가득한 얼굴로 성민을 바라봤다.
“워워, 긴장 풀어.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다.”
“아까는 정말 미안했어. 조금 더 잘해보려다가 그만.”
성민이 고개를 저었다.
표정이 부드러운 걸 보니 화를 내러 온 것은 아니다. 그냥 선배로서 너무 무리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러 온 것일까? 재능과 기회가 넘치는 것들은 모른다. 자신과 같은 사람은 기회가 찾아왔을 때 무리를 해서라도 어떻게든 그것을 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물론 여기서 성민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반발할 생각은 없다. 알겠다고 기꺼이 고개를 끄덕이겠다.
“아니야. 잘했어. 루키라면 그렇게 덤벼들어야지. 어차피 공을 보고 잡으러 갔더라도 높은 확률로 이루타인 상황이야. 예측이 맞았더라면 주자를 잡아낼 가능성도 있었지. 주변에서 뭐라고 하건 간에 패기 있게 덤벼들라고. 알겠어?”
“어, 어?”
이 새끼 또 시작이구나.
필 니크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 더블 헤더(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