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수(7) >
조금 늦은 아침.
권 여사는 성민의 배웅을 마다하고 씩씩하게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물론 한국으로 돌아간 건 아니다.
뉴욕이다.
덕분에 성민은 브런치를 조이와 함께 할 수 있었다.
“뭐 먹을래? 여기 에그 베네딕트가 괜찮은데.”
“같은 거로 시켜 줘.”
음식을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기까지의 짧다면 짧고 길면 긴 시간.
필 니크로가 능글맞은 웃음으로 물었다.
-너 긴장했구나.
‘긴장은 누가 긴장을 합니까.’
사실 물어볼 말은 많았다.
대체 어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했는지, 권 여사가 어쩌다 그런 이야기까지 너에게 하게 된 건지. 갑자기 시간은 어떻게 낼 수 있었는지.
하지만 도통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잠깐만!!
맙소사 이거 긴장 맞는 것 같은데?
과거 KBO 1군 무대에 처음 올라갈 때 느껴졌던 그 덜덜덜한 느낌이랑 매우 흡사하다. 그녀가 뭐라고 대답할지 무섭다.
대체 왜?
그 순간 성민은 깨달았다. 맙소사. 나 지금 이 여자랑 관계가 끊어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구나.
필 니크로가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아빠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이 멍청한 녀석이 드디어 깨달은 모양이다.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지만 동시에 너무 쉬운 일이다.
아마 녀석은 과거에 그 박희연 기자에게도, 장예슬이라는 걸그룹 처자에게도 모두 호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이 제임슨과 그녀들의 차이는 대체 무엇일까? 돈? 미모? 유명세? 성격? 물론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필 니크로가 보기에 결정적인 차이는 그녀들에게 있지 않았다.
김성민.
한국에 있던 시절의 녀석은 결핍을 몰랐다. 아, 물론 금전적인 부분에서는 현재가 더 풍족하다. 하지만 어디 금전이 결핍의 모든 것이던가. 게다가 사실 금전적인 부분에서도 딱히 부족함은 없었다. 권 여사는 상당한 재력가였고, 결국 그녀의 모든 돈은 성민의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심리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없긴 하지만, 권 여사는 성민이 그것을 느끼기 힘들 만큼 거의 모든 것을 커버해주었다. 팀에서는 가장 힘 있는 선배들에게 예쁨 받는 후배이자 후배들과 원만한 선배였다.
무엇보다 필 니크로 본인. 그리고 너클볼이 있었다.
성공은 확정적이었으며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오직 시간뿐이었다. 그래, 그 시절의 성민에게 가장 간절한 것은 조금 더 좋은 공을 던지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것이 달라졌을까?
물론 필 니크로의 잔소리가 항상 함께하기 때문이지만 여전히 성민은 금욕적인 수준으로 야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제 언제까지나 함께 해줄 것 같았던 그만의 든든한 지원군인 권 여사가 없다. 물론 권 여사는 여전히 그의 엄마이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연인, 누군가의 아내다.
직장에서 그는 여전히 중심이다. 하지만 10년 가깝게 함께 웃고 떠들던 친구들은 이제 없다.
실제로 타향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람과 가족과 함께 사는 사람의 결혼율은 유의미한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필 니크로가 판단하기에 지금 성민은 명백히 ‘누군가가 필요한 상태’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조이 제임슨이었다.
“이야기는 잘했어?”
“덕분에.”
“어머님, 참 좋은 분이더라고.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네가 어떻게 그렇게 자랐는지를 알 것 같았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던 거야?”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그냥 성민이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관한 이야기?”
“설마?”
“야구 하기 싫다고 울면서 집에 왔었다는 이야기라든지, 코치님한테 공 더 못 던지겠다고 이게 지금 사람 하나 잡으려는 도살장인지 야구장인지 모르겠다고 덤벼들었다는 이야기라든지, 악플 읽고 속상하다고 술 잔뜩 마시고 시내 놀러 가는 바람에 신문에 기사로 떠서 징계를 먹었던 이야기를 들었냐고?”
“아······. 엄마 진짜······.”
둘이 뭐가 그렇게 재밌다고 깔깔거렸나 했더니, 그럴만했다. 성민 인생의 흑역사라는 흑역사는 죄다 흘러나오는 것 같다.
“엄마가 이야기를 조금 과장을 했던 것 같은데, 사실 울었다기보다는 그냥, 어? 속상해서 상담? 뭐 그런 걸 한 거고, 고등학교 때 코치 그건 진짜 사람 새끼가 아니었던 거고, 야 그리고 그때 그 악플은 진짜 보통 악플이 아니었어. 그건 솔직히 술 몇 병 들이켜도 인정해줘야 하는 그런 악플이었다고.”
성민의 연이은 변명에 조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보다 네 어머님 정말 좋은 분이더라.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데도 너를 너무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어. 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네가 얼마나 많은 사랑과 관심 그리고 보호 속에서 자랐는지를 알 수 있겠더라.”
“너무 많은 사랑과 관심 그리고 보호였지.”
조이 제임슨이 성민의 손을 잡았다.
따듯했다.
“괜찮아. 어머님은 떠난 게 아니야. 설사 새로운 누군가를 만난다고 하실지라도, 넌 영원히 그분의 하나뿐인 아들이야. 그분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모두 바쳐 만들어 낸 가장 빛나는 작품. 그게 바로 너야.”
“누가 들으면 내가 막 엄청 섭섭해하는 줄 알겠네. 엄마 연애 좀 하라고, 결혼 좀 하라고 등 떠민 게 나였어.”
“알아. 다 알아.”
“솔직히 엄마가 자기 시간 다 써서 내 인생에 이래라저래라하는 거 정말 싫었어. 아니 자식이 서른을 넘겼는데 본인 삶도 좀 살아야 하는 거 아니야? 평생 그렇게 일만 하고 뒤치다꺼리를 했는데, 내가 이제 1년에 돈을 이렇게나 많이 버는데, 이제 내가 버는 돈 좀 달라고도 그러고, 비싼 밥 사달라고도 좀 그러고, 나 데리고 백화점 가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 이런 것도 좀 해보고 말이야.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왜 계속 내 뒤치다꺼리만 하려고 그래?”
그 따듯한 손 때문일까?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 깊숙한 곳에 담겨있던 이야기가 터져 나왔다. 조이 제임슨이 그 손을 놓지 않은 채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연애만 해도 그래. 아니, 요즘 50대 이상 대상으로 한 결혼정보업체도 성행하는 판국에 본인 연애는 신경도 안 쓰고 왜 내 연애를 신경 쓰는 거야? 안 그래?”
“그래, 맞아. 근데 그래서 이제 드디어 그 짝을 찾으셨잖아?”
“그래, 그랬지. 하여간 역시 권 여사야. 스케일도 크다니까? 아니, 갑자기 명예의 전당 헌액자를? 그것도 본인이 미국에 오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을 한국으로 불러들인다고?”
“어머님이 미국으로 오지 않는 게 섭섭한거야?”
“섭섭하긴 누가 섭섭하다는 거야. 어차피 미국으로 왔어도 뉴욕으로 갔을 텐데. 그게 그거지 뭐.”
주문한 음식이 나왔지만 둘의 대화는 멈추지 않았다.
평소 조이는 성민과 제법 쿵짝이 잘맞는 대화상대였다. 하지만 오늘의 조이는 그 이상이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청자였다.
성민은 자신의 마음에 담긴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그것은 필 니크로가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도 있었고, 짐작만 하던 이야기도 있었으며,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이야기를 끝냈을 때.
성민은 자신이 얼마나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녀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해왔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동시에 이제는 더이상 지금처럼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성민 스스로가 입으로 이야기 해왔던 것처럼, 권 여사에게는 권 여사의 인생이 있기 때문이다.
“내 이야기는 이만하면 됐고, 조이 넌 어떻게 시간을 낸 거야?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바쁘지. 아주 눈코 뜰 새도 없이 바빠. 근데 시간을 냈지.”
“뭐 중요한 이야깃거리라도 있었던 거야? 꼭 얼굴 보고해야 하는?”
“어, 뭐 좀 확인할 필요가 있었거든.”
“확인?”
조이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더했다.
“맛있는 걸 먹는데, 통 넘어가지를 않더라?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을 보는데 흥이 안 나. 멋진 모델을 보는데 뭔가 부족해 보이고. 게다가 밤에 잠을 자려는데 잠이 잘 안 와. 부정맥인가 싶게 가슴이 쿵쾅거리기도 하고. 병원을 가볼까 싶었는데, 사실 그것보다 더 의심이 가는 게 있으니 병원을 가봤자 헛일일 것 같더란 말이지.”
성민은 바보가 아니다.
지금 엄마의 일로 조금 혼란했지만, 조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정도는 곧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가슴이 요동친다. 싫지 않았다. 그리고 성민이 무언가 입을 열려는 바로 그 찰나.
“확인은 했어. 하지만 일단 지금은 그다음이 반칙 같으니까 그만할래. 원하는 걸 손에 넣을 때는 수단방법을 안 가려야 한다는 신조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특별한 거니까.”
“조이······.”“어머님 결혼식에 초대받았어. 미국에서 하는 거. 그리고 한국에서 하는 거 모두 다. 어차피 우리 사업적으로 따져도 꼭 가야하는 거잖아. 안 그래?”
필 니크로가 웃었다.
이건 지금 이 자리에서 확정만 안 했지 사실상 끝난 게임이다. 아니 그보다 더하다. 지금이라면 얕은 수렁이지만, 이걸로 더 깊숙한 수렁으로 끌어들인다.
과연 원하는 걸 손에 넣을 때는 수단방법을 안 가린다더니, 정말이지 이건 그보다 더 악랄하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멋진 여성이다. 성민이 이 녀석. 엄마에게서 드디어 독립하나 했더니, 이건 정말이지. 이 녀석의 인생은 어쩔 수 없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아니, 어쩌면 이런 녀석을 제어하려면 최소한, 이 정도는 되는 여성들이어야 가능한 건가?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
공항.
이제는 너무 익숙한 얼굴이 그녀를 마중나와 있었다.
프레스톤 윌슨.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전설적인 선수이자, 현 메츠의 감독. 그리고 권 여사의 피앙세다.
“며칠 더 있다가 와도 되는데, 너무 일찍 돌아온 거 아니야?”
“벌써 질렸다, 뭐 그런 이야기에요?”
샐쭉한 권 여사의 대답에 프레스톤 윌슨이 100점짜리 답안을 내놓았다.
“아니, 이건 승자의 양보지. 내년부터 나는 한국에서 당신을 독차지할 거니까.”
“흥, 하여간 말은. 그냥 당신도 한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으니까요. 이번에 일주일 뉴욕에 머물면 또 원정 나가야 하잖아요. 게다가······.”
“게다가?”
“생각보다 훨씬 좋은 여자애가 옆에 있더라고요. 하여간, 우리 성민이 녀석 그런 부분은 제 엄마를 똑 닮아서 짝 고르는 눈 하나는 확실하다니까요.”
“지금 이거 내 칭찬 하는 거 맞지?”
권 여사가 대답 대신 그의 빈손을 잡았다.
따듯하다.
“정말 괜찮겠어요? 나 따라서 한국으로 오는 거?”
“말했잖아. 괜찮다고. 야구라는 놈은 정말 얄미운 놈이라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만 너무 편애해. 진호 같은 녀석은 이것저것 다 하면서 야구를 해도 괜찮지만, 나 같은 모지리는 오직 야구만 짝사랑해도 곁을 줄까 말까 하거든. 평생을 그렇게 녀석을 짝사랑하면서 살았어. 뭐 사실 결과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지. 그러니 이제는 야구와는 졸혼을 하고 내 인생을 살아도 괜찮을 거야.”
주름이 가득한 두 손.
누군가는 아들을 위해, 누군가는 야구를 위해.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모두 바쳤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맞잡은 주름진 두 손은 가장 팽팽하던 그 시절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김성민 8월 이달의 투수 수상!!]
< 국수(7) > 끝
ⓒ 묘엽
작가의 말
제 개인적인 사정으로 내일 토요일은 연재를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