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수(5) >
노 히트 게임.
사실 미국의 노히터와 한국 일본의 노히트 노런은 조금 다른 개념이다.
전자의 경우 9이닝 동안 ‘안타만’ 맞지 않으면 된다. 그 뜻인즉 볼넷, 사구, 도루, 실책 등으로는 점수를 내준다고 해도 노히터 기록이 인정된다는 의미다. 후자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노히트 ‘노런’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노히터를 베이스로 완봉승까지 거둬야 한다. 더 어려운 기록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성민은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인은 지금 신경이 절반쯤 저기 관중석으로 향해있는지라 알 수 없었지만, 덕아웃의 선수들은 은근슬쩍 성민에게서 떨어진 곳에 앉아 오늘따라 유달리 더 말이 없는 에이스를 배려해주고 있었다.
덕아웃의 구석, 랄로 가야르도와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속삭였다.
‘이거 최초 기록 아닙니까?’
‘뭐가?’
‘한 시즌에 이거 두 번이요.’
‘내가 알기로는 아닐걸? 2015년에 맥스 슈어저도 2번 했던 거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때 기억으로는 그것도 최초 기록은 아니었던 것 같아.’
‘어쨌거나 2015년 이후로 처음인 거면 쩌는 기록은 쩌는 기록인 거네요.’
두 사람의 대화에 좌익수인 미셸 에쉬만이 슬쩍 끼어들었다.
‘이제 고작 6회 지났다. 부정 타는 이야기 하지 말고 너희 타석이나 준비해.’
‘하지만······.’
‘쩌는 기록은 지난번에 퍼펙트 달성했으면 역대 최초로 한 투수가 퍼펙트 2번. 그것도 2년 연속으로 달성하는 기록이었을 거야. 이건 저 녀석 기준으로는 쩌는 축에도 못 끼니까 우리 할 거나 잘하자고. 알겠어?’
지난 경기, 성민의 퍼펙트를 날려 먹었던 랄로 가야르도가 입을 다물었다.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하여간 이 꼰대 영감은 낄 데 안 낄 데 다 끼려고 그러는 주제에 꼭 이렇게 분위기를 망가트린다.
‘하여간, 잔소리는. 그렇게 말 안 해도 우리도 알아서 잘할 거거든요?’
‘그래야지. 그리고 참고로 말하자면 오늘 성민이가 역대 일곱 번째다.’
일곱 번째.
생각보다는 많다.
메이저리그의 역사가 근 160년째라는 점을 생각해도 지금까지 노히터가 400번이 채 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같은 투수가 같은 해에 2번의 노히터를 일곱 번이나 기록했다는 것은 분명 많은 횟수다.
하지만 이는 결국 그걸 할 만한 투수는 한정적이고, 그런 투수들도 그걸 할 만큼 기량이 대단한 시기는 길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크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리고 그런 한정된 투수 가운데 하나로 그 대단한 기량을 유지 중인 어떤 남자는 여전히 자신의 기록을 조금도 의식하지 못한 채 앞으로의 인생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솔직히 희연 누나 같은 경우는 저도 꽤 관심이 있었어요.’
-박 기자?
‘당연하죠. 솔직히 그 누나 나한테 관심 보이는 거 좀 노골적이었잖아요. 물론 취재 대상으로 관심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만은 아니었죠. 그건 남자로서도 관심 보이는 거였어요. 취재 대상으로서의 관심이야, 어차피 일이니까 부담 없이 할 수 있지만, 연애 감정은······, 저도 그거 알면서 그런 식으로 이용할 만큼 나쁜 놈은 아니거든요.’
-확실히 박 기자도 너한테 좀 그런 마음이 있긴 했지.
‘그러니까요. 저도 원래는 좀 잘해봐야지 뭐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근데 엄마랑 그렇게 하는 걸 보니까 이상하게 거부감이 생기더라고요.’
-흐음······.
성민이 말을 이어갔다.
‘제가 사실 이런 쪽으로 눈치가 굉장히 빨라요.’
-아니, 넌 꼭 이런 쪽이 아니더라도 눈치가 굉장히 빠르다.
‘조이한테도 뭔가 촉이 딱 오거든요. 얘, 지금 사업적인 문제나 단발적인 뭔가가 아니라 나한테 좀 진지한 마음이 있구나. 뭐 그런 거요.’
-너는 어떠냐?
‘예쁜 여자가 저 좋다고 그러는데 당연히 신경이 쓰이죠. 게다가 조이 정도면 성격도 좋잖아요. 그런데 신경이 안 쓰이면 그게 사람입니까?’
-신경? 이건 정확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 그게 단순히 신경이 쓰이는 일인지, 아니면 마음이 가는 건지 말이다.
성민이 대답 대신 글러브를 손에 쥐었다.
이제 7회 초.
디트로이트의 애송이들을 틀어막을 시간이었다.
***
성민이 권 여사와 조이를 위해 준비해 준 자리는 포수 뒤편. 경기를 관전하기 가장 좋은 자리였다. 매우 비싼 자리다. 아니 단순히 가격을 떠나서 사실 구매 자체가 지극히 어려운 좌석들이다. 애초에 시즌권으로 싹 나가고 스텁허브 같은 2차 중계 사이트에서도 매물을 구하기도 힘들다.
그리고 그 말인즉 오늘 권 여사와 조이의 근처에 앉아있는 사람들은 그만큼 높은 시간적, 혹은 금전적 비용을 지불하고라도 경기를 직접 관전하기 위해 경기장을 찾은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7회.
성민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그리고 권 여사와 조이 주변 관중들의 소음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기묘한 정적. 권 여사와 조이 역시 이어가던 대화를 한순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의 시선이 성민에게 꽂혔다. 아니, 성민을 바라보는 것은 그녀들만이 아니었다. 지금 펜웨이 파크에 가득한 3만7천여 관중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경기를 관전하는 7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의 시선 역시 성민에게 집중됐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고요한 집중 속에서 성민의 활약이 시작됐다.
‘곰곰이 생각해봤는데요. 저도 조금은 호감 쪽으로 마음이 기우는 것 같긴 해요. 솔직히 어디 가도 조이만한 여자는 흔하진 않잖아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그 사람이 얼마나 흔한가, 귀한가가 아니지. 그래. 네 생각에 조이가 너의 ‘완벽한 그 사람’인 것 같으냐?
‘완벽한 그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를 일이고요. 그냥 고민이 된다 그거죠.’
-그렇다면 일단 만나봐야지.
‘저도 그 정도는 다 알거든요?’
-원래 아는 걸 실행에 옮기는 게 가장 어려운 법이지.
‘어휴, 진짜. 잔소리는.’
경기장에 모인, 아니 경기와 관련된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경기에 집중하지 못 하는 사람이 피칭을 이어갔다.
내야 땅볼.
그리고 열 번째 삼진.
타석에 5번 타자인 제이크 홀튼이 들어왔다.
“오늘 방망이가 영 비실한데?”
“내가 비실한 게 아니라 오늘 너희 투수 아주 컨디션이 끝장나는 거겠지.”
“천만에. 우리 투수는 오늘 컨디션이 끝장나는 게 아니라, 원래 그냥 끝내주는 투수인 거고.”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야.”
“글쎄. 제이크, 네가 타석에 들어온 거 보니 최소한 이번 이닝까지는 그냥 넘어가겠는데?”
“넘어가는 건 야구공이고. 여기 앉아서 가만히 기다리기나 하라고. 내가 아주 움직일 필요도 없게 만들어 줄 테니까.”
“그래, 네가 생각하는 거랑은 조금 다르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움직일 필요도 없을 것 같네.”
두 포수의 가벼운 입씨름.
제이크 홀튼이 의욕 충만한 자세로 타석에 섰다. 어떻게 보면 괜히 말을 섞었다고 볼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괜찮았다. 의욕이란 충만하면 충만한 대로 약점이 생기는 법이다.
초구.
복판으로.
느린 너클볼을.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주문에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을 던지는 순간만큼은 잡념 없는 와인드업.
성민의 손에서 공이 떠올랐다.
제이크 홀튼이 눈을 빛냈다.
해볼 만하다.
타이밍은 맞았다. 남은 것은 저 공을 방망이에 맞추는 일뿐이다. 제이크 홀튼의 방망이가 힘차게 돌아갔다.
-딱!!
35세.
커리어 내내 포수로 뛴 덕분에 몸 곳곳이 삐거덕거렸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는 힘을 쥐어 짜낸 스윙이 야구공을 두들겼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마지막 순간 춤을 추듯 움직인 야구공이 절묘하게 방망이의 가장 좋은 지점을 피했다. 일찌감치 바닥을 한번 찍고 날아가는 땅볼.
제이크 홀튼이 1루를 향해 달렸다. 하지만 35세. 커리어 내내 포수만 해온 무릎이 그의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반면 저 2, 3루 간을 지키는 유격수 루시 알베리는 새것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몸을 마음껏 자랑했다. 날아오는 공을 글러브로 가볍게 잡아서 손목을 톡 튕긴다. 이전이었다면 상상하기 힘든 과감한 플레이다. 하지만 유효했다. 글러브를 살짝 빠져나온 공을 움켜쥐고 그대로 1루를 향해 가볍게 송구했다.
-뻐엉!!
“아웃!!”
1루까지 다섯 걸음.
에두아르도 크루즈의 이야기처럼 그가 자리에서 움직일 필요도 없이 이닝이 종료됐다. 성민이 정말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덤덤히 마운드를 내려갔다.
노히터까지 고작 2이닝을 남겨둔 투수라고는 믿기 힘든 자세였다.
‘역시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이는 게 최고겠죠?’
-마음이라······. 그래서 지금 걱정이 그런데도 너희 어머니와 저렇게 잘 어울리면 네 마음이 반대로 가지 않을까. 뭐 그게 걱정이다. 그런 이야기 아니냐?
‘······. 콕 집어 이야기하자면 뭐 그런 셈이죠.’
-그렇다면 결국 지금 현재 마음은 조이에게 향하고 있다는 뜻이로구나.
‘······.’
성민이 대답 대신 딴소리를 선택했다.
‘그나저나 오늘 경기를 좀 길게 맡기네요. 벌써 7이닝을 던졌는데 교체시킬 생각이 없어 보여요.’
-오늘 무실점으로 잘 막고 있으니 그런 거겠지. 게다가 투구수도 많지 않아서 몸도 아직 쌩쌩하고 말이다.
‘어휴, 쌩쌩하기는요. 8월 말이라 이거 던지고도 삭신이 쑤시는 느낌인데.’
-아직 점수도 3:0이니까. 아무래도 불펜에게 맡기느니 너에게 맡기는 게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우리 불펜도 요즘 많이 올라왔는데······.’
-그래도 그놈들보단 네가 낫지.
‘하긴, 뭐 그건 또 그렇죠.’
필 니크로가 확신했다.
이 자식 지금 자기가 노히터인 것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냥 모르는 채로 내버려 두자.
그렇게 경기가 흘러갔다.
8회.
여전히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타선은 성민을 공략하지 못했다. 당연하다. 상위 타순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던 공이다. 6, 7, 8번. AA에서나 뛰어야 하는 루시 알베리 급 선수들이 감히 공략할 수 있는 공이 아니다.
그리고 9회.
디트로이트의 불펜 투수를 가볍게 삼진으로 잡아내고 다시 1번 타자.
성민이 마침내 결심했다.
‘저 조이를 진지하게 이성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 지금 너 빼고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을 드디어 너도 알아냈구나.
‘하지만 역시 엄마가 또 상관하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요.’
공 여섯 개.
빠른 너클볼에 내야 뜬공 아웃.
그리고 마지막.
***
조이가 너무 편안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이 가슴에 쌓였기 때문일까.
권 여사의 이야기를 들은 조이 제임슨이 깜짝 놀라 대답했다.
“맙소사. 그러면 지금 그렇게 중요한 일 때문에 미국을 방문하셨던 거예요?”
권 여사가 어울리지 않는 부끄러움 가득한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니, 꼭 그것만은 아니고. 우리 성민이가 요즘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내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니. 아들이 훨씬 중요하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성민 씨가 십 대 청소년도 아니고. 당연히 어머님한테는 어머님의 인생이 훨씬 중요하죠.”
“아이, 참. 내가 원래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다 늙어서 이게 무슨 주책인지.”
“주책은요. 어머님. 이거 정말 중요한 일이잖아요. 그리고 어머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성민 씨는 훨씬 성숙한 성인이에요.”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두 사람의 귀를 먹게 할 만큼 거대한 환호성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딱!!
높게 치솟은 타구.
마운드 위에 서 있던 성민이 가볍게 야구공을 잡아챘다.
그것은 흡사 어딘가 야구 만화의 주인공에게나 어울릴법한 완벽한 마무리였다.
[김성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전. 노히트 노런!!]
< 국수(5)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