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수(4) >
경기가 계속됐다.
“그러니까 성민이가 중학교 1학년 때 인가? 어느 날 하루는 글쎄, 이제 야구가 하기 싫다고 집까지 울면서 온 거야.”
“네? 성민 씨가 울면서요?”
“그래, 그래서 내가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글쎄, 야구부의 선배라는 놈들이 우리 성민이 아빠 없는 걸 가지고 놀리며 욕을 했다는 거야.”
“맙소사. 그래서요? 설마 거기서 야구를 그만두지는 않았겠죠? 그랬으면 지금 저기서 저렇게 있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당연하지. 그래서 내가 거기서 이렇게 물었어.”
조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뭐라고 물으셨는데요?”
“그 선배라는 애들이 너보다 덩치도 크고 무서운 애들이냐고. 그러니까 아니라고 하더라고.”
“성민 씨는 어릴 때부터 컸나 보네요?”
“나를 닮아서,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175센티가 넘었었지. 하여간에 그러기에 내가 이렇게 이야기했어. ‘그러면 대체 왜 네가 야구가 하기 싫으냐고 말이야. 너보다 크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은 녀석들 때문에 왜 네가 야구를 그만둬야 해? 그냥 가서 콧잔등을 한 방 빵 날려버려.’라고 말이야.”
“맙소사. 그래서요? 성민 씨가 어떻게 했어요?”
“울다가 깜짝 놀라더니, 선배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또 이렇게 말했지. 선배고 뭐고, 어차피 이렇게 야구 그만두면 아무것도 아닌 사이라고. 어차피 그만둘 거면 속이라도 시원하게 풀고 그만둬야 한다고 말이야.”
“그래서, 성민 씨가 그 선배라는 사람들 때렸어요?”
권 여사가 웃었다.
“아니, 아마 그랬으면 지금 야구 못 하고 있었겠지. 그냥 방에 틀어박혀서 하루 온종일 고민을 하더라고. 그리고 나중에 와서는 그거 말고 야구는 계속하면서 놀림 안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어.”
“그래서 뭐라고 해주셨는데요?”
“항상 웃고 인사 잘하고 네가 가진 걸 나누라고 해줬어.”
“에? 그냥 그걸로 다 해결이 됐어요?”
그럴 리가.
“내가 학교에 조금 더 자주 찾아갔지. 애들 간식거리도 좀 많이 사가고, 비품도 종종 사서 넣어주고. 감독님한테 밥도 몇 번 샀어. 그리고 우리 성민이 용돈도 아주 듬뿍 줬지. 간식 사 먹을 때 항상 함께 가는 애들 것도 하나씩 더 사줄 수 있도록 말이야.”
“맙소사······.”
성민이가 중학교 1학년 즈음이면, 권 여사 역시 이제 막 40대. 미혼모로 살아남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자신의 커리어만으로도 바빴을 나이였다. 이건 그야말로 슈퍼 맘 그 자체다.
그렇게 권 여사와의 대화 속에서 조이는 대체 성민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권 여사와 조이 제임슨이 웃고 떠드는 모습이 마운드에서는 너무나도 또렷하게 잘 보였다. 궁금해 미칠 것 같다. 대체 뭐가 저렇게 재밌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성민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상대방을 절묘하게 몰아붙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좋은 공을 집어넣는다. 물론 선수 중에는 어떻게든 꾸역꾸역 참아내는 사람도 있었고, 그 참을성으로 결국 1루를 밟는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루수인 제롬 스튜버츠는 언제나처럼 든든했으며, 루시 알베리 역시 시즌 초반 그 난장을 피우고 마이너로 내려갔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준수한 수비를 보여줬다.
결과적으로 말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주자가 득점권에 들어서는 일은 없었다. 오늘 타구 가운데 외야로 날아간 것은 고작 두 개. 그나마도 모두 외야수 정면의 평범한 뜬공들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베테랑 투수 맷 비티 역시 오늘 자신의 기량 이상으로 최선을 다했다.
보스턴의 타선을 상대로 5회까지 2실점밖에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했다.
“젠장, 조금만 더 잡아당기면 빠질 것 같았는데.”
“너클볼이 더러울 거야 예상했지만, 난 이거 타이밍도 진짜 더러운데?”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어린 타자들이 연신 투덜거렸다.
확실히 아직 애송이 수준인 그들에게 성민의 공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AA급 리그에서 브레이킹 볼에 방망이 붕붕 돌릴 시기의 녀석들이다. 지금 녀석들에게 성민을 공략하라는 것은 루시 알베리나 박동엽 수준의 타자에게 성민을 공략하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성민에게 감탄하는 것은 그 어린 선수들만은 아니었다. 이제 돈값 못하는 늙은 베테랑들 역시 오늘 성민의 피칭에 혀를 내두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저 새끼, 뭔가 이상하게 집중 안 하는 느낌인데 또 피칭을 보면 그런 것 같지도 않고. 갑갑하네.”
“중간중간 들어오는 속구는 별거 아닌데, 이게 타이밍이 진짜 묘해. 그렇다고 또 그거 노리자니 너클볼 연속으로 쑥쑥 들어와서 루킹삼진이고. 아니, 애초에 어떻게 저 미친 공을 존 안팎에 마음대로 넣는 거야?”
“시부럴, 내가 그래도 마이너에서 로버트랑 2년 정도 한솥밥을 먹었었단 말이지. 그러면서 너클볼 꽤나 잡아봤어. 심심하면 타석에서 직접 상대해보기도 했고 말이야.”
“마이클이면 그 AAA에서 너클볼로 재기하겠다던 그 영감?”
“그래, 근데 저 새끼 너클볼은 뭔가 달라. 아, 물론 마이클도 잘 던진 너클볼은 꽤 괜찮았지. 근데 10개 던지면 한 예닐곱 개 정도 제대로 던지는 비율이었단 말이지? 그리고 그 정도로 메이저 콜업이 어쩌니저쩌니 말이 나왔었고. 물론 결국 콜업은 못 됐었지만. 하여간 그런데 저 새끼는 어떻게 너클볼 중에서 실투가 보이지를 않냐?”
“에이, 그냥 항상 존 안으로 넣으려는 건데 잘 들어가면 스트라이크고 안 들어가면 볼인 거 아닐까?”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포수 제이크 홀튼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새끼가 필요할 때 스트라이크랑 볼을 구분해서 따박따박 넣겠냐? 지금 5이닝 동안 우리 볼넷으로라도 출루한 새끼 둘밖에 없잖아.”
“그건 그렇지.”
“아오, 내가 진짜 5년만 젊었어도 시발, 힘으로라도 어떻게든 저 먼 남쪽 나라로 보내주는 건데.”
“제이크 너 5년 전에 커리어 하이 때도 홈런 20개 간신히 쳐놓고 무슨 헛소리냐.”
“인마, 포수가 20홈런이면 보정 넣어주면 일루수나 지명타자로 치면 50홈런쯤 쳐주는 게 이 바닥 국룰이지.”
“국룰 같은 소리 하네. 헛소리하지 말고 준비나 하자.”
“어? 뭘?”
-뻐엉!!
“스트라잌!! 아웃!!”
[6회 초. 2번 타자를 상대로 루킹 삼진!! 김성민 선수!! 오늘 6이닝 동안 벌써 삼진만 아홉 개째에요!! 굉장한 페이스입니다.]
[아직 시즌이 끝나기까지 한 달이 넘게 남은 상황에서 벌써 227번째 삼진입니다. 이대로면 250삼진은 무난하겠어요.]
“뭐긴 뭐야, 나갈 준비지.”
“시발, 이거 아주 시간이 네 녀석 밤일 치르는 시간처럼 흘러가네.”
“내 밤일 치르는 시간처럼 흘러갔으면 인마 앞으로 2시간은 더 있어야 공수 교대지.”
“쉘라가 그러는데 너 20초라더만.”
“야, 그게 벌써 몇 년 전 이야기인데 그걸 아직도!!”
덕아웃으로 돌아오는 길.
필 니크로가 조용히 생각했다.
이거 뭐지?
물론 상대방이 좀 허접하긴 하다. 아무리 성민이라도 가끔 실투가 나오는데 그걸 제대로 공략하는 놈이 거의 없었으니까. 하지만 또 마냥 상대방의 허접함만을 탓하기에는 개중에는 꽤 날카로운 스윙을 보여주는 놈들도 있다.
그런데 성민이 전심전력으로 집중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신경의 절반은 저기 관중석에 가 있는 상황인데 이렇게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고?
아니, 애초에 이 녀석 자기가 지금 이런 성적을 내고 있다는 자각은 하는 건가? 그냥 한 타석 한 타석에만 신경을 쏟아붓는 건가? 그래서 오히려 단기적인 집중력은 더 좋은 뭐 그런 상태인 건가?
지금까지 성민이 허용한 출루는 볼넷 두 개가 전부다. 놀랍게도 녀석은 현재 노히트를 기록 중이라는 뜻이다.
‘역시, 경기 끝나면 같이 밥 먹자고 그러겠죠?’
-당연히 그러겠지. 그냥 봐도 엄청 친해진 것 같더구나.
‘하, 앞으로 사업 생각하면 계속 좋은 관계를 가져가야 하는데.’
어린 시절부터 성민은 권 여사의 치맛바람 아래 자라왔다. 사실 그걸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남들은 아빠와 엄마에게 반반씩 나눠 받아야 했을 애정을 오직 엄마에게서만 충족할 수 있었으니까.
어린 시절 성민에게 권 여사는 어머니의 애정과 아버지의 든든함을 모두 갖춘 초인이었다. 물론 모든 어린아이에게 부모란 그렇지만, 그 두 가지를 홀로 해내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30세를 훌쩍 넘긴 지금.
성민은 한 명의 당당한 성인이 됐다. 대부분 사람은 어린 시절 거인과 같았던 부모님이 어느 순간 너무 작고 왜소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온다. 그때부터 부모님은 나를 보호해주는 장벽이 아닌, 내가 보호해줘야 하는 대상이 된다.
하지만 성민은 조금 달랐다. 권 여사는 작아지지 않았다. 성민이 프로가 됐을 때도 그녀는 여전히 정력적인 사업가이자 성민의 계약을 도와주는 숨겨진 에이전트였다. 물론 에이전트 시험에 10수나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연 2,200만 달러를 수령 하는 성민에게, 이제 한 달에 버는 돈이 권 여사가 평생을 모은 돈보다 더 많아진 성민에게도 권 여사는 여전히 거인이었다. 그리고 성민은 여전히 그 거인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렇기에 성민은 권 여사의 그늘을 벗어나고 싶었다. 모든 소년이 언젠가 아버지를 넘어서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이다.
경기가 계속됐다.
***
권 여사의 이야기가 계속됐다.
그 이야기 속의 성민은 아직 귀여웠고, 철이 없었고, 부족했으며 너무 여렸다. 난 왜 아빠가 없냐고 떼를 쓰며 울던 아이는 야구를 하기 싫다고 투정 부리는 아이로 성장했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코치에게 들이박기도 했으며 선배들 뒤치다꺼리하겠다고 손해를 보기도 했다.
팔이 망가지도록 공을 던졌고, 가능성 없어 보이는 일에 매달렸다. 그리고 어느새 훌쩍 자라 30년을 살아온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타향에서 모두가 인정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남자로 성장했다.
“영리하지만, 무른 구석이 있어. 합리적인 걸 좋아한다고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감정을 따라가지. 아버지에 대한 동경이 있어.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있어 보여. 자기가 과연 아버지가 될 준비가 됐을까? 항상 고민하는 것 같아.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하고 있기에 그래서 일단 결혼하면 책임을 다하는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될 거라고 생각해.”
권 여사가 바라보는 성민은 여전히 자신의 보호가 필요한 아이였다. 엄마가 치워주지 않으면 먼지 가득한 집 안에서 살아갈 어린아이. 선배의 괴롭힘에 훌쩍이는 어린아이.
하지만 조이 제임슨이 웃었다. 그리고 과감히 고개를 저었다.
“성민은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는 항상 과감해요. 혹시 조금 잘못될 것 같아도 밀고 나가는 힘이 있죠. 사람을 좋아해요.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흡입력이 있어요. 장난이 많지만, 중요한 순간에 진지해진 눈빛이 멋지죠. 좋은 남편이나 좋은 아버지가 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성민은 좋은 파트너, 그리고 아이들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아이는 자라나 어른이 된다.
그리고 어른의 연애에는 엄마의 코칭이 필요하지 않다.
처음에는 약간의 당황. 그리고 감탄.
권 여사가 기쁜 마음으로 조이의 손을 잡았다.
< 국수(4)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