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15화 (216/287)

< 국수(3) >

클러치 히터라는 말이 있다.

득점권, 혹은 결정적인 상황에서 더 좋은 플레이를 보여주는 타자라는 의미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2034년 현재에도 여전히 논란이 많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클러치히터라고 부르는 선수들의 성적을 귀납적으로 살펴보면 득점권 성적과 통산 성적에 그렇게 크게 유의미한 차이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극히 예외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는 선수도 존재한다. 실제로 그런 선수 가운데는 득점권에서 타격 매커니즘을 조금 다르게 가져간다고 주장하는 선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주장들에 대해 어느 세이버메트릭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멍청한 짓이죠. 아니, 득점권에서 더 잘 칠 수 있다는 말은 평소에는 힘을 억제하고 있다가 위기 상황에서 펑!! 터트린다는 말 아닙니까? 뭐, 그건 나의 잠재력을 120% 사용해야 하는 비기라서 아껴 써야 하는 거랍니까? 그런 짓을 대체 왜 하는 거예요? 중2병 걸린 힘숨찐도 아니고. 그냥 평소에도 그때처럼 잘하면 되는 거잖아요.”

맞는 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필 니크로가 확신했다.

이 녀석은 클리치 히터, 아니 빅게임 피쳐가 확실하다. 그의 시선이 성민의 몸을 훑었다. 약동하는 심장, 꿈틀대는 근육. 활발한 신경망. 모든 것이 흔들림이 없다.

저 가까운 곳에서 그의 엄마인 권 여사와 조이가 저토록 친밀하게 대화 나누는, 어쩌면 일생일대의 위기상황이 진행 중인 지금에도 말이다.

게다가 이 녀석은 또 한 가지 강력한 장점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약자에게 강하다는 점이었다.

이는 녀석이 기록했던 KBO 시절의 미친 성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30경기 202이닝 25승 무패. 평자책 0.89

물론 MLB 사이 영 컨텐더급 에이스 투수가 AA급 리그에 가면 이 정도 성적을 거두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야구라는 것이 꼭 그렇지가 않다.

설사 메이저 최정상급의 타자라고 해도 AA급 리그에서 항상 4할 타율이나 배리 본즈급 성적을 기록하는 것은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디아고 헤밍턴이 당장 KBO에 간다고 해서 저런 터무니 없는 성적을 장담할 수 있지도 않다.

무엇보다 성민은 저 성적을 그 ‘마린스’를 이끌고 만들어 냈다.

다만 문제는 메이저리그에는 ‘약자’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KBO는 루키부터 하위권 수준의 메이저리거까지 다양한 선수들이 공존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는 다르다. 여긴 대체 선수 레벨이니 뭐니 해도 어쨌거나 ‘메이저리그’에 올라 올 만한 기량의 녀석들이 올라온다. 당장 여기서 대체 선수 레벨이라고 하는 선수만 하더라도 지명타자나 일루수 같은 놈들은 KBO를 기준으로 하면 제대로 터지는 해에는 MVP까지도 노려볼만한 괴물들이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약팀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보통의 약팀과는 달랐다. 보통의 약팀이라면 탱킹을 하건, 뭐를 하건 최대한 유망주를 모으고, 그 유망주가 터지는 시점에 한순간의 자원을 쏟아붓는다.

물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도 그런 형태를 ‘흉내’는 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흉내’에 그쳤다. 포기해야 할 타이밍보다 늦게 포기했고, 달려야 할 타이밍에 과감하지 못했다. 그러는 와중에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는 팬들에게 휘둘리기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현재 로스터는 엉망진창이었다.

몇몇 선수는 이름값 높은 선수들이다. 하지만 단지 이름값만 높을 뿐, 너무 늙었다. 또한, 몇몇 선수는 재능은 있지만, 너무 어리다. 차라리 그들보다는 AAA를 떠도는 20대 후반의 선수들이 더 강력할 지경이다.

쉬어가는 타이밍도, 달리는 타이밍도 아닌 어정쩡함.

그리고 그런 타자들은 성민에게 매우 좋은 먹잇감이었다.

-딱!!

공을 건드리는 타자는 있었다.

[빗맞은 타구!! 높게 떠올랐지만, 내야를 넘기지 못합니다.]

[김성민 선수의 너클볼. 오늘 변화가 상당히 좋은 것 같은데요? 정타가 지금까지 하나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이 선수, 지난 기록들을 보면 항상 뭔가 해내야 하는 시점에서는 꼭 해냈거든요. 전형적인 빅게임 피쳐에요. 오늘 경기 같은 경우도 8월 이달의 선수를 결정 짓는 경기잖습니까. 역시나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세 번째 타자를 상대로 초구 내야 땅볼!! 루시 알베리 선수가 잡아 가볍게 일루로!!]

“아웃!!”

[3회 초.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공격. 김성민 선수가 또 다시 삼자범퇴로 가볍게 마무리 짓습니다. 이걸로 3회까지 모조리 삼자범퇴. 타순이 한 바퀴 돌았습니다.]

[이게 참, 공격력만 따지면 여러 가지로 아쉽기는 합니다만, 이런 장면들을 보면 루시 알베리 선수를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가요? 제가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수비 같았는데요.]

[물론 가을 야구를 노리는 팀의 주전 유격수라면 당연히 해내야 하는 수비는 맞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기존 보스턴의 유격수였던 후안 칼초 선수는 그걸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해요. 후안 칼초 선수 같은 경우는 애당초 주전급이라기보다는 내야 유틸 요원 정도로 분류해야 하는 선수예요. 보스턴도 시즌 초반 플랜대로라면 바그너 가이탄 선수의 백업 정도로 사용할 요량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바그너 가이탄 선수는 이번 시즌 보스턴에서 단 한 경기도 치르지 못한 채 지금 탬파베이 레이스에서 뛰고 있죠.]

[맞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만 보면 그 트레이드 자체는 보스턴에게 상당한 이득이었어요. 보스턴이 이대로 가을 야구까지 나가기만 한다면 트레이드의 적절함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다만 유격수의 수비 공백이 참 아쉬운 점이었죠. 그런 의미에서 루시 알베리 선수의 수비는 아주 훌륭합니다. 공격만 조금 보강되면 참 좋을 텐데 말이죠.]

[아, 3회 말. 마침 타석에 9번 타자 루시 알베리 선수가 선두 타자로 올라오고 있네요.]

보스턴의 몇몇 극성맞은 팬들이 타석에 들어오는 루시 알베리를 향해 야유를 보냈다. 저놈들은 자기 팀의 선수고 뭐고 마음에 안 들면 일단 야유부터 퍼붓고 보는 놈들이다.

루시 알베리가 그들의 야유를 귓등으로 흘려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조금만 잘하면 곧바로 환호를 지를 녀석들이야.’

마운드에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다섯 번째 선발인 맷 비티가 올라와 있었다. 38세의 노장으로 전성기에는 연 2,500만 달러도 수령 했던 거물이다. 물론 전성기 97마일까지 나오던 최고 구속이 91마일로 줄어든 지금은 그저 그런 하위 선발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심지어 그 91마일도 이번 시즌에는 딱 한 번 찍은 게 전부다.

또한, 루시 알베리가 메이저급 투수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 하고 있긴 했지만 AA에서는 그래도 괜찮은 타격을 보여줬다. 심지어 그것도 ‘유격수치고는 괜찮은’이 아니라 ‘모든 포지션을 통틀어 괜찮은’이었다. 유격수로만 한정 짓는다면 그는 분명 AA리그 최고 수준의 타격 기술을 갖춘 타자였다.

지금 마운드에 선 맷 비티는 메이저급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남자였다. 물론 시즌 초만 하더라도 꾸역꾸역 메이저 하위권 선발은 되는 기량을 보여줬지만 5개월의 시즌을 보내고 8월의 막바지가 된 지금은 체력이 빠질 대로 빠져 80마일대 똥볼을 던지는 영감에 불과했다.

물론 그가 1회부터 이를 악물고 던지기는 했지만, 루시가 메이저리그에 올라와 지금까지 상대한 모든 선발 중에서 객관적으로 가장 약한 투수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이것은 저 야유를 환호로 바꿀 절호의 기회다.

초구.

맷 비티의 왼손을 떠난 야구공이 힘차게 날아왔다.

루시 알베리가 돌아가던 방망이를 세웠다. 빠지는 공이다.

-뻐엉!

루시 알베리의 생각이 맞았다.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볼카운트 1-0. 존 밖으로 휙 빠져나가는 83마일 슬라이더. 제법 괜찮은 공이었지만 느낌이 왔다.

마운드의 맷 비티가 웃었다.

애송이 주제에 제법이네?

두 번째.

같은 코스.

아니다. 살짝 깊숙하다. 속구? 슬라이더?

루시 알베리가 선택했다.

-부웅!!

“스트라잌!!”

망할. 속았다.

같은 코스로 두 개 연속 같은 공이라니. 게다가 구속은 느렸지만, 확실히 공의 변화는 살아 있었다. 최고 90마일도 간당간당한 공으로 빅리그에 꾸역꾸역 붙어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볼카운트 1-1

세 번째.

조금 더 몸쪽 깊숙한 코스. 이건 속구다. 확신에 가득 찬 루시 알베리의 방망이가 힘차게 뻗어나갔다.

-딱!!

빗맞은 타구가 파울라인을 벗어났다.

3구 연속 슬라이더. 볼카운트는 1-2. 순식간에 몰려버렸다. 마운드의 맷 비티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비릿하게 웃는다.

“애송이, 너무 쉽게 속아주는 거 아니야? 재미 없게 말이야. 하긴, 저 영감은 네가 아직 아빠 주머니 속에서 팔다리 없이 꼬물거릴 때부터 야구공을 던지던 양반이니까 수준이 다르기는 하지.”

“확실히 늙어서 그런지 비실비실하긴 하네.”

“저 영감님이야 늙어서 비실비실하다지만, 넌 젊은 놈이 왜 그렇게 비실비실하냐? 아, 웁스. 젊다고 항상 빳빳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내가 실언을 했네. 아픈 상처를 건드려서 미안.”

루시 알베리가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지금 상대하는 것은 저 투수지 이 빌어먹을 포수 놈이 아닌데 괜히 대꾸했다가 손해만 잔뜩 봤다.

“그래, 맑은 공기를 좀 마셔 줘. 단순히 체력이 부족해서 거기로 가야 하는 혈액량 때문에 비실비실한 걸 수도 있으니까 습습후후. 충분한 심호흡을 해주라고.”

방망이를 쥔 손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조금 들어갔다.

어떻게든 한 방 쳐낸다. 그리고 그런 루시의 의도를 읽은 걸까?

네 번째.

이건 확실히 빠지는 공이다.

루시 알베리의 방망이가 움직이지 않았다.

볼카운트 2-2.

“호, 그래도 공은 제법 볼 줄 아네? 하긴 연장이 부실하면 스킬이라도 괜찮아야지.”

루시 알베리가 그 헛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온다.’

복판.

그의 방망이가 힘차게 뻗어나갔다.

그런데.

공이

도착하지 않는다.

75.1마일의 체인지업.

타격폼이 무너졌다.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쳐낼 수만 있다면!! 방망이를 한계까지 컨트롤 하여 맷 비티의 공을 향해 방망이를 뻗어갔다.

하지만 궤적이 달랐다.

그가 예상하고 방망이를 휘두르려던 궤적은 속구의 궤적. 맷 비티의 공은 그것보다 공 2개쯤 더 떨어진 곳을 파고들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관중들의 야유성이 더 커졌다.

“잘했어. 꼬맹이. 그래도 우리 영감님한테 공을 다섯 개나 던지게 했잖아? 어휴, 저기 우리 영감 팔 덜덜 떨리는 거 보여? 다음 번에는 노인공경 차원에서 초구 뜬공 아웃 같은 걸로 좀 부탁해.”

루시 알베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포수 녀석의 놀림 때문일까?

아니다. 그런 외적인 것에 넘어가서 흥분해버린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한 번 한 번의 기회는 소중하다. 그 소중한 기회 중 하나를 이렇게 날리다니. 심지어 맷 비티의 체인지업은 그리 대단한 공도 아니다. 조금만 더 냉정했더라면 방망이를 돌리기 전부터 구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덕아웃.

루시 알베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그 시간.

-제법 노련하네.

‘제법이라뇨. 우리 엄마는 노련함으로 따지면 세계 최고입니다. 고작 제법이라는 부사를 붙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요.’

-아니······.

성민은 여전히 친밀하게, 심지어 뭐가 그리 좋은지 중간중간 깔깔거리며 웃기까지 하는 두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 국수(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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