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수(2) >
2034년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총체적 난국이라는 표현이 적합한 팀이었다.
보통 스몰 마켓 팀은 스몰 마켓에 어울리는 운영으로 팀을 꾸려나간다. 이미 스몰 마켓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 라인은 빌리 빈의 지난 머니볼부터 한가지 방식으로 확립이 됐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들은 20세기 후반, 21세기 초반의 스타일을 쉽게 버리지 못했다. 마이클 일리치 시절만 하더라도 그들은 분명 빅마켓에 가까운 팀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마이클 일리치라는 부자 구단주 때문만은 아니었다.
본래의 디트로이트는 미국 자동차 공업의 상징과 같은 도시로 제법 부유했다. 물론 1970년대 일본 자동차의 약진이 시작된 이래 도시는 꾸준히 쇠퇴했고, 2007년 이후 한국 자동차 역시 가파르게 성장함으로써 한 차례 더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처참한 수준이 된 것은 그런 외국의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
테슬라.
기존의 자동차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매커니즘의 자동차가 자동차의 도시 디트로이트가 아닌 저 실리콘밸리에서 생산되기 시작했다. 디트로이트에서도 가장 임대료가 비싼 시내에 위치한 테슬라의 ‘갤러리’야 말로 GM, 포드, 크라이슬러로 대변되는 기존 내연기관 자동차 업체들의 패배를 상징했다.
도시 자체가 그렇게 점진적으로 죽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스몰마켓의 방식으로 자신의 체질을 개선하지 못했다. 물론 지출의 규모는 줄었다. 하지만 팀의 운용방식은 여전히 스몰 마켓의 그것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이는 그나마 남아있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팬들을 잃어버릴 수 없기에 이뤄진 일종의 고육지책이었다.
결과적으로 말해 2034년 현재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터무니없는 약팀이었다.
타석에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1번 타자 그리핀 데이즈가 들어왔다.
***
인간과 인간이 소통하는 데는 오직 언어적인 방법만이 동원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언어적인 부분은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 실제로 문자로 대화하는 것과 전화로 대화하는 것 그리고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저 사람이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 혹은 나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싫어하는지. 그런 수많은 정보는 각종 비언어적인 형태로 전달되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이 제임슨과 권미영 여사의 첫 만남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안녕하세요. 조이 제임슨입니다.”
처음 권 여사를 만난 조이 제임슨이 한 말이었다.
물론 한국말이었다. 어설프고 썩 좋지 못한 발음이었지만, 권 여사의 호감을 사기에는 그걸로 충분했다.
그렇다고 해서 권 여사는 조이가 한국말을 할 줄 알 거라는 착각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아마 자신을 만난다고 하니까 급하게 인사 정도 외운 거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더 기특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는 의미 아닌가.
“권미영이라고 해요. TV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예쁘네요.”
“감사합니다. 어머님도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예쁘세요.”
“제 사진도 봤어요?”
“네, 성민 씨가 보여준 적 있어요.”
애초에 둘 다 좋은 의도로 만났으니 날이 설 이유가 없다.
훈훈함 그 자체의 대화가 오고 갔다.
“그래서 어때요? 성민이가 좀 잘해줘요? 시즌 중이라고 바빠서 얼굴 보기도 힘든 거 아닌가?”
“어휴, 그거야 어쩔 수 없죠. 자기 커리어가 있는 건데요. 대신 성민 씨도 그만큼 저의 커리어를 존중해주고, 둘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함께 하고 있어요. 게다가 이번 시즌이 끝나면 또 드라마 촬영도 같이 들어갈 예정이고요.”
“아, 그래. 그 드라마. 대체 그 드라마는 어쩌다 출연하게 된 거에요?”
“그게 그러니까······.”
별것 아닌 이야기들이었지만, 애초에 누군가와 친해지는 데 필요한 것은 대화의 내용이 아니다. 대화 그 자체다.
그리고 두 사람이 그렇게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성민의 눈에 너무 똑똑하게 들어왔다.
-신경 쓰지 말아라. 타자 들어온다.
‘압니다.’
하지만 여전히 신경이 쓰인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것일까? 궁금하다. 조이의 이야기에 딱히 틀린 건 없기에 자리를 마련해주기는 했지만 이렇게 신경 쓰일 줄은 성민 본인도 몰랐다.
사실 조이 제임슨은 현재 성민의 입지를 위해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기는 했지만, 그건 일방이 아니었다. 쌍방이다. 조이 제임슨 역시 자신의 입지를 위해 성민이 중요하다. 또한, 그녀는 멍청한 사람이 아니었고, 나름대로 야망도 있었다. 그렇기에 성민에게는 그녀가 쉽게 이 관계를 망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게다가 그녀의 이야기처럼 이렇게 부모님과 만나는 장면까지 사람들에게 노출 시킨다면, 둘의 스토리에는 더 큰 설득력이 생긴다. 어떻게 봐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걱정됐다.
또, 엄마가 뭔가를 던져서 관계가 어그러지면 어쩌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조이 제임슨 역시 성민을 필요로 한다. 드라마를 찍는 데는 아무 영향이 없을 거다. 게다가 그녀가 없다고 해도 다른 길은 아직 많다. 이미 유명해진 유명세가 어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어떤 프로그램을 통해 다시 유명해지면 그만이다.
하지만 어쩐지 싫었다.
성민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미 경기가 시작됐다. 필 니크로의 이야기처럼 잡념 따위에 사로잡힐 타이밍이 아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1번 타자 그리핀 데이즈가 타석에서 자세를 잡았다. 사람과 사람의 소통은 언어적인 방법만이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마운드의 저 투수. 정신이 어딘가에 팔려있는 것 같다.
모욕적이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적이 더 약한 상태로 싸워주는데 최선을 다하라고 일갈하는 것은 열혈 소년 만화의 주인공으로 충분하다. 이왕이면 더 안좋은 상황에서 나와 싸워준다면 땡큐다. 하물며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이번 달 4경기 무려 30이닝을 던지는 동안 고작 2실점을 한 괴물이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이번 시즌 아메리칸리그 사이영상은 거의 확실한 존재. 그런 녀석을 상대로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내년 이후 찾아올 연봉협상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겠지.
마운드의 투수가 크게 와인드업했다.
초구를 노린다.
그리핀 데이즈가 침착하게 성민의 공을 바라봤다.
성민의 손을 떠난 공이 날아온다. 그리핀 데이즈가 그 공을 바라본다. 공이 계속 날아온다. 그런데······.
-부웅!!
“스트라잌!!”
그리핀 데이즈의 방망이가 멋지게 허공을 휘저었다.
“와, 시발. 이거 뭐지?”
영상을 아무리 많이 보고 들어왔다고 해도, 공이 제멋대로 이렇게 움직이는 것을 직접 접하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 익숙한 불평에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피식 웃었다. 75.2마일의 빠른 너클볼을 처음 접하는 타자들이 종종 보여주는 반응이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래도 보통 한 팀의 상위 타순이면 이 정도 반응까지 보여주는 일은 적었는데 이 친구에게는 그만큼 충격적인 공이었던 것 같다.
멘탈이 깨진 표정으로 잠시 타석에서 물러났던 그리핀 데이즈가 헬멧을 툭툭 두들기고 정신을 되찾았다. 그래, 아무리 대단한 투수라고 해도 결국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애초에 에이스급 투수가 던진 가장 좋은 공은, 저런 미친 공이 아니더라도 치기 어려운 것은 똑같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1번 타자가 다시 타석에 섰다.
두 번째.
62.8마일의 느린 너클볼.
너무 느려서 오히려 타이밍을 맞추기가 어렵다. 근데 그건 사실 크게 문제가 안 된다. 더 큰 문제는 이 미친 공이 날아오는 과정에서 대체 몇 번씩이나 방향을 바꾸냐는 점이었다.
-부웅!!
“스트라잌!!”
시원한 헛스윙이 허공을 갈랐다.
2구 연속 헛스윙.
성민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또 한 번 조이와 권 여사에게 향했다. 여전히 다정하다. 필 니크로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그가 뭐라 말하기 전, 다시 성민이 타석의 타자에게 집중했다. 그 전환은 마치 전혀 다른 영화 두 개의 필름을 그대로 이어붙인 것 마냥 즉각적이었다.
역시 괴물이다.
‘데이터대로네요.’
-그래.
게다가 저렇게 다른 곳에 신경 쓰이는 일이 있는 와중에도 경기 전 읽었던 자료는 머릿속에 완벽하게 넣어두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그리핀 데이즈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가 나름대로 밀고 있는 유망주였지만, 그래 봐야 아직 유망주에 불과했다. 사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가 좀 제대로 된 상황이었다면 아직 마이너에서 조금 더 담금질을 해야하는 선수다. 마치 지금 보스턴 레드삭스의 루시 알베리처럼 말이다.
굳이 어렵게 싸움을 가져갈 필요도 없다.
그냥 스트라이크존에 너클볼을 던지면 절대 장타는 나오지 않을 녀석이다. 아니, 그걸 떠나서 애초에 높은 확률로 헛스윙을 할 녀석이다. 녀석이 빅리그에 그나마 붙어있는 것은 존에 들어오는 속구, 그리고 변형 패스트볼을 잘 두들기는 능력 덕분이었다. 게다가 실투 역시 기가 막히게 두들긴다. 한 마디로 타격에 재능은 있다는 뜻이다.
다만 경험이 필요한 브레이킹 볼에 매우 약한 모습을 보였다. 이건 조금 수준 낮은 브레이킹볼부터 차근차근 경험해야 하는 부분인데, 그거야 녀석의 사정이다.
성민은 녀석의 약점을 사정없이 파헤치면 그만이다.
세 번째.
빠른 너클볼.
-부웅!!
“스트라잌!! 아웃!!”
마운드의 괴물이 자신의 몫을 훌륭하게 해냈다.
***
-뻐엉!!
천둥 같은 포구음이 경기장에 울렸다.
“사실 전 성민 씨랑 사귀기 전에는 야구를 보러 경기장에 와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처음에는 이 소리에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냥 글러브로 공을 받는 것뿐인데 이렇게 큰 소리가 날 줄은 몰랐거든요.”
“이해해요. 나도 처녀 적에 처음 야구 경기장에 갔을 때 정말 크게 놀랐었으니까요.”
“와우, 어머님 처녀 적이라니. 지금도 이렇게 미인이신데 그땐 더 엄청나셨을 것 같아요.”
“어휴, 미인은 무슨. 저보단 성민이 아빠가 진짜 미남이었죠. 아주 따라다니는 여자가 줄을 이었었는데, 글쎄 그 양반 취미가 야구라지 뭐에요? 덕분에 나도 야구 잘 아는 척하려고 열심히 규칙 외우고, 선수들도 외우고 했는데 정작 경기장에서는 어버버하는 바람에 다 들켜버렸었죠.”
“어머!!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벌써 35년도 넘은 옜날 이야기.
권 여사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게 귀여웠대요.”
“네?”
“덩치는 산만 한 처자가 자길 위해서 그렇게 노력하고, 그거 들켰다고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고 그러더라고요.”
“되게 로맨틱하셨네요.”
권 여사가 조이의 손을 꼭 쥐었다.
“성민이 녀석이 내 아들이긴 하지만, 또 결정적인 부분에서는 그이를 닮았어요.”
“아, 그건 또 의외네요. 우리 성민 씨는······.”
거기까지 말하던 조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권 여사를 바라봤다.
잠깐만, 그러니까 이거 지금 나한테 조언해준 거 맞지?
마치 조이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권 여사가 인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국수(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