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13화 (214/287)

< 국수(1) >

성민이 원정 경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 안에는 예상치 못했던 사람이 존재했다.

“엄마?”

“어휴,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집안 꼴이 대체 이게 뭐니?”

권 여사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성민이 조금 당황했다.

“아주, 집 안에 먼지가, 먼지가.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더라. 너 로봇청소기는 저기 저렇게 사두고 아예 안 돌리는 거야?”

“아니, 원래 오늘 리엔 이라고 집 치워주는 사람 왔어야 했는데. 일이 생겨서 못 오게 됐다고 연락이 왔어. 보통은 원정 끝나는 날에 맞춰서 치워두는데. 하여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청소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보다 엄마, 여긴 대체 어쩐 일이야?”

“얘, 너 그 사람 당장 바꿔라. 이게 일주일 안 치워서 쌓인 먼지가 아니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청소기부터 좀 내려놓고. 갑자기 미국은 무슨 일이야. 아무 말도 없었잖아. 에이전시에서도 별말 없던 거 보면 구단에서 나오는 티켓으로 온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권 여사가 아주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그 짧은 망설임만으로도 성민은 권 여사가 어째서 이렇게 찾아왔는지를 단박에 눈치 챌 수 있었다.

“엄마. 설마 나 국수 먹는 거야?”

“뭐, 뭐라는 거야. 얘가. 그냥 너 요즘 그 조이라는 여자애랑 아주 기사가 하루가 멀다고 올라오고 있는데, 엄마가 아직 실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그거 좀 볼까 하는 마음에 이렇게 찾아온 거지. 너, 내가 그런 거로 온다고 하면 너 절대로 오지 말라고 할 것 아니니. 그래서 말인데 대체 그 여자애 언제 보여줄 생각이야. 아니다. 언제 보여줄지 물어봐서 뭐 하겠니. 나 미국 오기도 힘든데 이렇게 온 김에 얼굴이나 보고 잠깐 밥이나 먹자고 그래라. 내가 뭐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왜 얼굴을 안 보여준다니?”

“엄마?”

다다다 쏘아붙이는 권 여사를 향해 성민이 능글맞은 표정으로 웃었다.

권 여사가 33년 차 김성민의 전문가라면, 성민 역시 33년 차의 권 여사 전문가다. 이건 그냥 당황한 거다. 그래서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려고 애쓰는 거다. 성민이 권 여사의 마음을 눈치챘다.

“그러니까 나 결혼시킬 생각이 있긴 있는 거죠?”

“응? 그게 무슨 소리니? 당연히 그런 생각으로 넘치지.”

하지만 굳이 더 이야기를 파고들지 않았다. 여기서 뭐, 사실 프레스톤 감독이랑 엄마랑 일 때문에 찾아온 거 아니냐며 사실을 다퉈봤자 싸움만 일어난다. 어차피 권 여사 역시 이렇게 찾아왔을 때는 다 이야기를 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찾아왔다. 조금만 여유를 준다면 알아서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냥 권 여사 장단에 맞춰주면 그만이다.

“원래 연애라는 건, 주변에서 왈가왈부할수록 안 되는 거예요. 엄마, 막 내 연애 깨트리고 싶어요? 설마 조이가 외국인이라든지, 연예인이라든지 해서 싫은 거예요?”

“그럴리가!! 엄마는 아주 만족하고 있어. 그때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엄마는 피부가 하얗든 까맣든 머리가 누렇든 빨갛든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 엄마가 아주 편견 없이 활짝 열린 사람이야.”

“알죠. 그래서 저도 엄마 닮아서 편견 없이 활짝 열려있고요.”

성민의 이야기에 필 니크로가 신음했다.

성민의 말 속에 담긴 뜻을 읽은 덕분이었다.

-확실히 넌 너무 심각할 정도로 열려있긴 열려있지.

‘됐네요.’

-되다니? 뭐가?

‘영감님이 내 말을 눈치챘을 정도인데 아무리 엄마가 경황이 없어도 눈치를 못 챘을 리가 없잖아요.’

사실 성민이라고 고민을 한 번도 안 했던 것은 아니다.

엄마가 연애를, 그리고 결혼을 한다?

이건 결혼과 이혼에 조금 더 개방적인 문화에서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제다. 하물며 한국은 아직 그런 부분에서 제법 고루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성민의 어머니인 권 여사는 30년이 넘게 혼자 살아왔다. 그것도 아들인 성민의 뒷바라지만을 바라본 채로.

그렇다면 이제는 권 여사도 자신의 삶을 찾아 조금은 더 행복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권 여사는 여전히 성민의 성공이, 성민의 삶이 그녀의 보람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김성민의 어머니 권 여사가 아니라, 권미영의 삶 역시 중요하다.

지금 성민이 아무렇지 않게 말한 편견 없이 활짝 열려있다는 말은 그 많은 고민의 끝에 흘러나온 진심이었다.

그 진심이 전해진 것일까?

권 여사가 그런 성민의 이야기에 웃었다.

성민 역시 그런 권 여사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서 조이는 언제쯤 같이 식사라도 한 번 할 수 있는 거니?”

“아, 엄마!!”

***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은 정말 별것 아닌 계기였다.

조이 제임슨은 최근 스케줄에 너무 치여서 친구들과 놀 시간이 부족했다. 덕분에 섭섭해하는 그녀들을 달래기 위해 조금 무리해서 파티에 참여했다.

호텔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벌이는 커다란 파티.

뭐 누군가의 자선 모금인가 뭔가 하는 목적의 파티였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세금으로 나갈 돈, 국가 대신 어디에다가 기부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게다가 세금은 낼 때마다 기분이 엿 같지만, 이런 기부는 내가 이렇게 좋은 사람이라는 뿌듯함이 따라온다. 여러모로 이득이다.

중요한 것은 이 파티에 모이는 인사들이 저명한 사회 인사들이며, 유명한 셀럽들이고, 그들의 기분을 맞춰줄 수 있는 화끈한 모델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PC가 유행한 이후 좋아진 점은 예전이라면 화끈한 여자 모델만이 파티장을 누볐을 이곳을 그들 못지않게 화끈한 남자 모델들도 함께 누빈다는 점이었다.

“쟤, 진짜 괜찮은데?”

“좀, 너무 마르지 않았어?”

“얘는? 마르기는 뭐가 말랐다는 거야. 내가 보기에는 딱 좋구만.”

모델 사무소에서 제법 괜찮게 나가는 애들로 골라왔을 녀석들이 영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뭐 나름대로 운동을 한 티가 나기는 한다. 하지만 골격 자체가 달랐다. 아무래도 남자라면 저것보다는 조금 더 건장해야 하지 않을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와우, 저기 좀 봐봐. 헤수스야.”

헤수스 고메스.

남미에서 건너 온 이민자 2세.

라티노 출신으로 본래 흑인들의 영역이었던 힙합계에 아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남자였다. 매력적인 보이스와 얼굴. 타고난 박자감각. 그는 평소 조이 제임슨이 가장 좋아하던 가수였다.

“어, 헤수스네.”

하지만 요즘 바쁜 스케줄에 너무 치여서일까? 이상하게 설레는 마음 따위 전혀 들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가까이 다가가서 말이라도 걸어봤을 텐데 그저 심드렁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이 달달한 타르트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성민이라면 뭐 조절이니 뭐니 까다롭게 굴면서 그녀 혼자 먹으라고 슬쩍 밀어줬겠지. 음료만 해도 그렇다. 아니, 알콜을 못 마시는 거야 그렇다고 치자. 남들 다 잘 마시는 탄산은 대체 왜? 아니, 그렇게 걱정이면 그냥 제로칼로리 음료를 마시면 되는 거 아닌가?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망할, 이거 아무래도 그냥 피곤해서가 아닌 것 같은데?”

***

8월 이달의 투수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현재까지 평균자책점 0.6

사실상 남은 한 경기에서 거하게 똥을 푸지만 않으면 이달의 투수는 확정이다. 이번 경기의 상대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미국에서 가장 낙후된 도시인 디트로이트를 연고로 하는 팀이다.

여러 가지 산업적, 행정적인 문제가 겹쳐 탄생한 이 최악의 도시는 건물을 임대하는 것은커녕 관리하는 것 자체가 돈 낭비라는 판단하에 수십 층짜리 건물들이 방치되어있다. 심지어 팔리지도 않는다. 도시 자체가 죽어버린 것이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지난 몇 해동안 이 도시를 탈출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그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말해 그들은 21세기 초반 마이클 일리치 시절만 하더라도 빅마켓에 가까운 지출 규모를 자랑하던 팀이었지만 최근에는 그때의 위용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약소 구단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 시즌 역시 마찬가지였다. 5할이 채 되지 못하는 승률. 올스타라고는 투수 하나를 간신히 내보내는 빈약함. 여러 가지로 성민에게는 유리했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성민에게 굉장히 곤란한 요소가 존재했다.

-성민아, 일단 진정하고 경기에 집중하자.

‘저 지금 충분히 진정하고 있습니다.’

-그래, 뭐 별일 없을 거다. 너희 어머니가 어디 보통 어머니냐.

권 여사가 방문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권 여사가 성민을 방문한 것은 프레스톤 감독과 무언가 진전이 있기 때문이고, 성민은 그저 마음씨 넓은 아들로서 그것에 고개를 끄덕이면 그만인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권 여사가 방문하고 정확히 하루 뒤.

“응? 조이? 지금 뭐라고 그랬어?”

“이번에 보스턴에서 열릴 홈 경기 관람하러 가겠다고요.”

“이번 홈 경기를? 조이 너 요즘 엄청 바빠서 눈코 뜰 새도 없다고 하지 않았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건 맞는데, 성민 너 지금 환상적인 한 달을 보내고 있다며. 그 피날레인데 내가 가주는 게 그림이 좋지 않겠어?”

“어, 물론 그건 그렇긴 하지만······.”

성민이 잠시 망설였다.

느낌이 권 여사도 하루 이틀 내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 보이고, 이거 보스턴까지 온다고 하면 권 여사가 어떻게든 만나려 할 게 뻔하다.

어떻게 할까?

“사실 지금 우리 엄마가 와 있어서 말이야.”

“아, 그래?”

“어, 엄마가 좀 극성맞은 면이 있어서, 한국에서 너랑 나랑 사귄다는 기사도 크게 났고, 괜히 너 온다는 이야기 들으면 얼굴 한번 보고 싶다고 그럴 게 뻔하거든.”

성민이 차라리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선택했다.

확실히 조이가 굳이 찾아와서 축하해주면 그림이야 좋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별문제는 없다.

“아, 그래? 그러면 잘됐네. 네 경기 같이 보고 저녁도 같이하면 되겠다.”

“어?”

“네 경기 같이 보고 저녁도 같이하면 되겠다고.”

“자, 잠깐만. 조이. 우리 엄마는 너랑 나랑 진짜 진지하게 진심으로 사귄다고 생각하고 있어. 게다가 내가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서 좀 극성맞은 부분도 있고. 괜히 너 피곤할 거야.”

“난 괜찮아. 아무리 극성맞아봤자 파파라치나 토크쇼의 똥 같은 진행자 놈들만 하려고. 게다가 이번 기회에 그런 부분까지 노출이 되면 지금 우리 관계에 대해서 긴가민가 하는 사람들도 더 집중할거 아니야.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아니, 그거야 그렇지만······.”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러면 그날 경기 티켓이나 준비해 줘. 아, 혹시 어머님이 영어는 하실 줄 아셔?”

“어, 그건 그런데······.”

그리하여 결론적으로 지금 성민의 눈에 띄는 저 객석에는 성민의 어머니인 권 여사와 조이 제임슨이 정다운 모습으로 앉아 성민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그러니까 우리 엄마라서 더 불안한 겁니다. 우리 엄마라서.’

성민이 첫 번째 타자를 준비했다.

< 국수(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