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루에이스(4) >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제이크 스컬리는 성민에게서 강한 위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본래도 성민을 상대로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래도 항상 ‘해볼 만하다.’ 혹은 ‘조금만 제대로 맞았더라면.’ 정도의 느낌이었다.
하지만 오늘 성민이 주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네까짓 게 감히?
성민의 공이 제이크 스컬리를 윽박질렀다.
-부웅
“스트라잌!!”
아니, 희롱했다. 63.4마일의 느린 너클볼이 헛스윙을 끌어냈다.
그리고 속구, 다시 속구, 그리고 빠른 너클볼.
그리하여 볼카운트 1-2.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장갑을 동여매고 헬멧을 고쳐 썼다.
그리고 다섯 번째.
또 한 번 속구가 존을 가로질렀다.
-딱!!
라인 밖으로 굴러나가는 타구. 파울이다.
제이크 스컬리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래, 절대 공략 못 할 투수는 아니다.
쫄지 말자. 할 수 있다.
마운드 위에서 투쟁심을 끊임없이 내뿜는 투수를 상대로 방망이를 단단히 쥐고 준비했다. 볼카운트는 여전히 1-2.
여섯 번째.
성민의 손끝에서 야구공이 떠올랐다.
그래, 말 그대로 떠올랐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이퓨스, 빌어먹을 이퓨스였다.
‘아, 왜 나만!!’
제이크 스컬리가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걷어찼다. 빌어먹을 새끼. 이 멍청한 새끼. 대체 왜 머릿속에서 이퓨스는 까맣게 지웠을까. 바로 전전 타석에서 그렇게 당해놓고. 한 경기에서 두 타석이나 웃음거리가 돼버리다니.
실제로 펜웨이파크의 많은 관객은 박장대소를 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같은 놈이 두 번이나 저런 똥볼에 당하다니. 다시 말하지만 보스턴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보스턴이 이기는 일이고,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것은 양키스가 엿 먹는 일이다. 그리고 성민의 이퓨스는 그 두 가지를 완벽하게 충족시키는 공이었다.
제이크 스컬리는 아직 Mr. 양키스처럼 양키스를 대표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양키스 순혈 출신으로 벌써 6년째 양키스의 주전 유격수다. 게다가 준수한 외모에 3년 연속 올스타에 선정되는 실력까지 갖췄다. 양키스가 리암 루카스 이후로 누군가를 얼굴로 삼는다면 그건 당연히 제이크 스컬리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선수를 상대로 또 이런 플레이라니.
그라운드에 가득한 열광적인 보스턴 팬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민을 향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을 쏟아냈다.
마운드의 성민이 그 환호에 응답하듯 포효했다. 사람들의 박수와 함성이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 그 커지는 박수와 함성 속에서 성민이 세 번째 타자를 뜬공으로 잡아냈다.
1점 차이.
아직 남은 아웃 카운트는 9개.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래, 절대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어렵게 느껴지는 것일까?
리암 루카스가 자신에게 되물었다.
결론이 나오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과거의 그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래, 기억난다. 아직 Mr. 양키스가 Mr. 양키스가 아니던 시절. 아직 미숙하고 혈기만 넘치던 그 시절.
커리어의 마지막 황혼을 불태우던 어느 위대한 투수에게서 이와 흡사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의 공이 특별히 어려웠는가?
그래, 물론 어렵기는 어려웠다. 전성기를 지난 시점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리그 에이스급 투수였으니까.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에게는 존재했다.
당시 리암 루카스는 그것이 저 위대한 투수가 이 시대를 지배했던 관록이라고 생각했었다.
‘젠장, 그러니까 저 녀석이 트루 에이스다. 뭐 그런 소리인가?’
실력과 상관없는 저 기묘한 느낌. 저 기백.
오늘이다!! 싶은 날에는 절대 패배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저것이야말로 진짜 에이스의 자격이 아닐까?
물론 아니었다.
성민의 재능이나 능력이 시대의 지배자에 어울리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23살의 애송이 리암 루카스가 느꼈던 감각을 37세의 리암 루카스에게 느끼게 한다는 것은 당시의 그가 돌아온다고 해도 불가능했다.
이것은 그저 성민의 아카데미 급 연기력과 그의 능글맞은 피칭의 괴리가 만들어 낸 착각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은 참으로 웃겨서, 그렇게 생각을 해버리는 순간 그것은 어느 정도 실체를 갖는다.
오늘 리암 루카스에게는 성민이 그러했다.
조 달튼은 포기하지 않는 마음으로 끈덕지게 들러붙었다.
그는 6회에도 7회에도 추가점을 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성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8월.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경기.
‘김성민’이 뉴욕 양키스를 이겼다.
***
처음 빅리그에 콜업될 때만 하더라도 후안 칼초와 에릭 크레이그 위주로 라인업이 구성되고 루시 알베리는 가끔 밖에 그라운드에 나올 수 없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루시 알베리에게는 생각보다 많은 기회가 돌아왔다. 단순히 어린 유망주이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수비가 더 크게 발전했더군요.”
수비는 본래 그냥 눈으로만 봐서는 크게 실감하기 힘들다. 하지만 어차피 전력분석팀이 하는 일은 경기 영상을 마냥 돌려보는 일이 아닌, 경기의 데이터를 살피는 일이었다.
확연하게 수비 레인지가 넓어졌다. 게다가 공을 뽑는 것도 꽤나 과감해졌다. 물론 그 반대급부로 송구가 조금 불안해지기는 했지만, 애초에 보스턴의 일루수인 랄로 가야르도는 포구 하나 만큼은 일품이다. 상관 없었다.
“타격이 딱 2할만 나와줘도 후안 칼초 대신 유격수 자리에 박아둘 만할 텐데 말이죠.”
후안 칼초의 경우 매튜 쿠퍼의 부상 이후, 유격수 대신 삼루수에 자주 들어간 덕분에 소폭 상승하여 현재 성적은 0.239/0.298/0.333이었다.
애매하다. 수비라도 좋다면 어찌어찌 유격수로 써먹을 수는 있는 성적이지만, 후안 칼초의 경우는 빈말로도 유격수 수비가 좋다고 보기 힘들다.
“파워를 조금만 더 키운다면 훨씬 나아질 것 같은데 말이죠. 어제 경기의 이 장면만 보더라도 힘만 조금 더 있었다면 내야 수비를 뚫고 나갔을 겁니다.”
현재 다시 콜업된 이후 루시 알베리의 성적은 21타석 20타수 3안타 1볼넷 0.150/0.190/0.150.
처참했다.
-야, 시즌 초에도 그랬지만, 대체 뭐냐? 얜 무슨 든든한 빽이 있길래 자꾸 경기에 나오는 거야?-
-그래도 수비는 시즌 초랑 비교하면 많이 좋아졌잖아. 솔직히 후안 칼초나 에릭 크레이그보다 수비는 훨씬 나은 듯.-
-그러면 뭐하냐. 1할 4푼짜리인데. 얘 대신에 성민이가 타석에 들어가도 얘보단 타격 성적이 좋겠다.-
-아니, 애초에 그 녀석은 작년 실버슬러거 수상자니까. 지금도 어지간한 팀의 유격수보다는 비율 스탯이 더 좋잖아······.-
-AA에서는 진짜 괜찮았고, AAA도 그 정도면 유격수로 나쁘지 않았으니까 조금만 더 기회를 주면 차차 괜찮아질 거라고 본다. 어쨌든 바그너 가이탄이랑 로버트 보일이 그렇게 트레이드 된 이상, 앞으로 보스턴 유격수 자리는 얘가 좀 맡아줘야 함.-
-FA를 사 와야지. 1할 4푼짜리가 맡긴 뭘 맡냐.-
-진짜 갑갑해서 뒤지겠다. 작년이나 재작년 같았으면 루시 알베리 박아놓고 써도 괜찮거든? 근데 지금은 우리 와일드 카드 경쟁하고 있잖아. 그것도 트레이드 이빠이 해서 말이야. 지금은 느긋하게 유망주 키울 시간이 아니라 어떻게든 이겨야 하는 타이밍인데. 에휴, 우리는 1할 4푼짜리를 유격수로 쓰고 앉았네?-
인터넷의 여론 역시 당연히 좋지 않았다.
루시 알베리를 옹호하는 의견이라고 해봐야, 앞으로 장래성은 기대되는 녀석이다. 정도가 전부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조차도 지금은 장래성을 생각해서 유망주를 사용할 때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팍팍한 상황 속에서 루시 알베리는 그저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지금은 어렵다? 준비가 안 됐다? 다 변명에 불과하다. 지금 안 되는데 미래에 된다는 보장은 없다. 괴롭고 힘들더라도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 기회를 잡아야 한다.
바그너 가이탄과 로버트 보일이 없으니 유격수 자리는 결국 내 차지일 것이다? 천만에, 보스턴 레드삭스는 빅마켓이다. 당장 내년에라도 FA 유격수를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
아마 4월이었다면 또 다시 내년을 기약하며 포기했을지도 몰랐다. 아니, 마이너로 내려간다는 것이 얼마나 분한 것인지 모른 채 내려갔더라면 이번에도 그냥 포기했을 수도 있다.
성민의 이야기가 기억났다.
‘한계를 정해놓고 그 안에서 움직이면 아무것도 되지 않아. 네 나이 때의 한계라는 건 원래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넓어지기 마련이야.’
아직이다.
나는 아직 한계에 도달하지 않았다.
루시 알베리가 조금 더 움직였다.
***
8월. 시작이 좋았다.
첫 경기부터 양키스를 만나서 9이닝 무실점 완봉승. 물론 성민의 경기 한 번이 팀의 분위기를 확 바꾸지는 못했다. 하지만 연패를 끊었고, 이전만큼 점수가 펑펑 터지지는 못 했지만 어찌어찌 꾸역꾸역 더 잘 막아내며 5할 이상의 승률을 유지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성민의 두 번째 등판 경기에서 7이닝 1실점 승리. 분위기가 조금 묘해졌다. 그리고 또 세 번째 경기에서도 7이닝 1실점 승리.
0.783?
승리는 팀의 분위기를 바꾼다.
하지만 팀의 분위기를 바꾸는 것은 승리만은 아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5회, 2사 주자 1, 2루 상황에서 삼진으로 이닝을 막아낸 성민이 포효했다. 이번에도 연기였냐고?
아니었다.
지금까지 5이닝 무실점.
평균 자책점으로 따지자면 0.643.
한 달로 끊어봤을 때 터무니없는 성적을 기록하는 투수는 많다. 이번 달은 성민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역시 첫 끗발이 개 끗발이라는 말은 완전 헛소리에요. 원래 단추를 끼울 때도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하는 법이죠.’
필 니크로가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이 녀석 겸손이라는 것이 없다. 하지만 부정은 할 수 없었다. 그것이 엄연한 현실이었으니까.
8월이 오기 전부터 성민은 가장 강력한 아메리칸리그 사이영 컨텐더였다. 그리고 8월의 4번째 경기를 치르는 현재.
성민은 단순히 ‘가장 강력한’을 넘어서 앞으로 이상한 짓만 하지 않는다면 사이 영을 수상하는 것이 확실한 투수로 올라와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커리어 세 번째 이달의 투수 역시 코 앞이다.
기록이란 묘하다.
그것은 결국 지나간 경기의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기록이라는 것에 열광한다. 그것은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다.
덕아웃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성민을 바라보는 선수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와일드카드는 아직 불투명하다. 하지만 함께 경기를 뛰는 우리의 에이스가 대단한 기록을 써 내려간다는 점이 그들의 의욕을 더 크게 고취했다.
질 때 지더라도, 성민의 경기만큼은 질 수 없다.
점수를 내줄 때 내주더라도 성민의 경기만큼은 몸을 날려 공을 잡아낸다.
무엇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부상으로 DL에 올랐던 녀석들이 돌아온다. 지금 와일드카드를 경쟁하는 팀은 총 다섯 팀. 마지노선인 2위와는 고작 1승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현실 속에서
루시 알베리는 여전히 발버둥치고 있었다.
< 트루에이스(4)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