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루에이스(3) >
양키스의 선수들이 하나둘씩 무언가 이상하다는 점을 느낀 것은 5회가 넘어서였다.
마운드에 선 투수에게서 느껴지는 기세와 피칭 내용이 너무 다르다. 이게 그냥 제구가 좀 안 되는 걸까?
근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투구 내용이???
하지만 고개를 돌려 마운드를 보면 또 그런 의심을 하는 것이 말이 안되는 것 같다. 대체 저 얼굴 어디에서 그런 능구렁이 같은 면모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러는 사이 경기는 차근차근 진행됐다.
조 달튼은 최선을 다했다. 물론 그가 최선을 다했다는 이유만으로 보스턴의 타선이 점수를 내지 못했다면, 그건 지금까지 보스턴에게 두들겨 맞았던 다른 투수들에게 너무 모욕적인 말일 것이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루시 알베리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2타수 무안타 1삼진.
리베라와 페팃 이후, 빌어먹을 양키스의 에이스 놈들이 그랬듯 조 달튼 역시 커터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 심지어 커터만 두 가지 종류를 사용한다. 망할 자식 같으니.
브레이킹볼은 그럭저럭 적응했지만, 이런 종류의 변형 패스트볼은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만약 파워가 조금 더 있었더라면 힘으로 뚫어냈을 텐데, 유격수인 루시 알베리로는 무작정 몸을 키우기도 힘들다.
5회 말 선두타자로 나온 루시 알베리를 잡아낸 조 달튼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아웃 카운트 13개. 출루에 성공한 타자는 일곱. 운이 매우 좋았다. 4이닝 동안 일곱 명의 타자를 출루시키고 무실점으로 막아내다니. 유격수 제이크 스컬리의 호수비가 만들어낸 더블 플레이가 없었더라면 0:0의 상황은 진즉에 무너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타순.
분명 보스턴의 타선은 매튜 쿠퍼가 있을 때와 비교해 확실히 약해졌다. 하지만 애당초 ‘점수? 그래 좀 내줄 수도 있지. 하지만 우리도 그만큼 두들겨 패서 이길거야.’라는 마인드로 시즌을 끌어왔던 보스턴 레드삭스다.
그들을 상대로 끝까지 무실점을 이어간다? 힘든 일이다.
선두타자 제롬 스튜버츠가 똑딱질을 시전했다.
괜찮았다. 선행주자는 없었고 제롬 스튜버츠는 누구보다 빨랐으니까. 타석 바로 앞을 크게 튕겨 투수 정면으로 날아가는 야구공. 피칭 직후 무너진 자세를 되돌리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조 달튼이 글러브를 뻗어 타구를 잡으려 노력해봤지만 소용 없었다. 타구가 투수 옆을 스쳐 지나 흘러갔다. 덕분에 유격수, 이루수 모두 반응이 조금 늦었다. 바닥을 구르는 공을 잡아 일루를 향해 던졌을 때, 이미 제롬 스튜버츠의 몸은 일루 베이스를 밟고 있었다.
“세이프!!”
그리고 타석에 랄로 가야르도가 들어왔다.
매튜 쿠퍼가 없는 상황에서 2번에 가장 어울리는 타자는 역시 랄로 가야르도였다. 매튜 쿠퍼보다 타율은 조금 낮고, 주루 능력 역시 떨어지지만, 장타율만큼은 더 높다. 타격 생산성으로 따지자면 팀 내 최고 타자다.
지난 첫 번째 타석에서 우측 외야 깊숙한 플라이를. 두 번째 타석에서는 이루수의 키를 넘기는 라인 드라이브성 안타를. 랄로 가야르도는 그야말로 최고의 타격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만약 보스턴에서 MVP가 나온다면 그건 분명 이 남자일 것이다.
조 달튼이 힐끔 1루를 바라봤다.
제롬 스튜버츠의 몸은 이미 달릴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다. 도루? 글쎄, 그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조금 커다란 장타 하나면 무조건 홈까지 들어가겠다는 의욕이 가득하다.
가벼운 견제구 하나.
“세이프!!”
제롬 스튜버츠의 앞섶이 누렇게 물들었다.
랄로 가야르도의 시선이 잠시 보스턴의 덕아웃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이글이글 투지를 불태우는 성민이 보였다.
마음에 든다. 매튜 녀석이 없다고 침체되는 꼴 따윈 사양이다. 그가 데뷔한 이래 처음으로 5할이 넘는 승률을 기록하고, 어쩌면 가을 야구에 도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저 앉는다고?
‘절대 그럴 수는 없지.’
자신들의 에이스인 성민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 역시 그것일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평소 순둥순둥하던 에이스가 빡세게 기합을 넣는 것으로, 선수들의 자세 역시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제롬 스튜버츠의 저런 자세 역시 그러하다.
견제구 하나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달라지지 않은 거리. 몇 번이고 앞섶을 더럽혀도 상관없다는 저 파이팅. 지금 보스턴에 필요했던 것은 바로 저런 정신이었다.
무엇보다 오늘 성민의 피칭을 보고 있자면 우리가 지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공 하나, 하나에 영혼이 담긴 것 같았다. 양키스의 타자들이 오늘 성민을 공략하지 못 하는 것은 어쩌면 그 기백 때문이 아닐까?
마운드의 조 달튼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랄로 가야르도가 방망이를 강하게 움켜 쥐었다.
‘그렇다면 나 역시 지금은 그 기백에 답을 해줄 차례다.’
93.1마일의 컷패스트볼.
랄로 가야르도의 방망이가 공을 놓치지 않았다.
정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스윙은 흔들리지 않았다. 끝까지 모든 힘을 실어서 공을 잡아 당겼다.
-딱!!
발사각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속도만큼은 랄로 가야르도의 어마어마한 힘을 증명하듯 훌륭했다.
유격수인 제이크 스컬리가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빠르게. 그리고 빠르게.
일루 주자인 제롬 스튜버츠가 달리기 시작했다.
가능할까?
타구 속도가 너무 빨라서 모를 일이다. 생각을 멈춘다. 어차피 판단은 주루 코치의 몫이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은 연습한 대로, 이왕이면 연습한 것보다 더 훌륭하게. 그저 달리고 또 달리는 것뿐이다.
이루를 지나 삼루로.
그의 시선이 삼루 주루코치를 향했다.
랄로 가야르도의 타구에 실린 힘이 떨어지지 않았다. 실로 무시무시한 힘이다. 만약 오늘 경기장이 펜웨이파크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이딴 형편없는 타구각으로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는 쉽게 보기 힘든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늘 그들이 뛰는 구장은 11미터의 녹색 괴물이 도사리고 있는 펜웨이파크였다.
그린 몬스터의 중단을 랄로 가야르도의 타구가 두들겼다.
과연 어디로 튕겨 나갈 것인가? 양키스 좌익수의 몸이 타구 방향을 쫓았다.
덕아웃에서 몸을 내밀고 그를 관찰하던 보스턴의 좌익수 미셸 에쉬만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라운드에서 공을 받을 때는 이 엿 같은 그린 몬스터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담벼락이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최고의 동료다.
담벼락에 튕긴 공이 양키스 우익수의 글러브를 피해 바닥을 나뒹굴었다.
보스턴의 삼루 주루코치가 힘차게 팔을 돌렸다. 더 빠르게!! 더욱 빠르게!!
1루에서부터 2루를 지나 3루까지.
지금까지 50미터. 그리고 앞으로 약 30미터 더.
달리던 힘 그대로 3루 베이스를 오른발로 가볍게 밟고 홈까지!!
뒤늦게 공을 잡은 좌익수가 홈을 향해 힘껏 송구했다. 공은 당연히 사람보다 빠르다. 하지만 그 거리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세이프!!”
제롬 스튜버츠의 발이 홈플레이트를 밟고 지나간 이후에야 야구공이 포수의 미트에 도착했다.
1:0
평소의 성민이었다면 가볍게 미소짓거나 혹은 주먹을 불끈 쥐는 정도 행동으로 그쳤을 것이다.
“좋았어!!! 됐어!!!”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성민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보스턴의 선수들로는 처음 보는 생경한 광경. 덕아웃으로 돌아온 제롬 스튜버츠를 성민이 힘차게 끌어안았다. 그것은 마치 지금 이걸로 승리가 결정되기라도 했다는 듯한 강력한 포옹이었다.
어색하지 않았다.
오늘 성민이 보여준 승리에 대한 욕구는 그만큼 강력했으니까.
-여기까지도 디아고 헤밍턴의 행동 그대로군.
‘정확히는 경기 지고 있다가 역전했을 때의 녀석이긴 합니다만, 오늘은 이 정도가 딱 좋겠죠.’
마운드의 조 달튼이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걷어찼다. 그리고 2루에 서 있는 랄로 가야르도를 한번 쳐다봤다.
‘젠장. 그래, 저건 어쩔 수 없는 괴물이다. 4.1이닝 1실점. 아직 나쁘지 않다. 무너질 필요 없다.’ 조 달튼이 그렇게 자신을 추슬렀다.
이어지는 보스턴의 타선을 상대로 신중한 승부 끝에 볼넷.
그리고 병살타.
조 달튼이 5이닝을 1실점으로 막아냈다.
[1사 1, 2루 상황에서 더블 플레이!! 아, 보스턴의 5회 말 공격. 1점을 뽑아내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아쉽게 끝났습니다.]
-얘들 진짜 왜 이럼? 평소에 수비 엿 같이 해서 그렇지 그래도 점수는 잘 뽑아줬잖아. 이젠 공격까지 마린스가 되는 거냐?-
-아무리 그래도 승률이 타율보다 낮은 마린스랑 비교하는 건 좀······.-
-마린스 승률이 성민이 타율보다 낮다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이 잔인한 새끼들. 사람 그렇게 팩트로 때리는 거 아니다. 정정당당하게 선동과 날조로 승부하자.-
-그나저나 1:0인데 그런 것 치고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하네.-
-그 편안한 마음, 성민이가 마운드를 내려가는 순간 사라질 것이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죠? 투수가 마운드를 내려가다니. 그러면 공은 누가 던집니까? 휴먼.-
-불펜. 한국말로는 점수자판기라고 하지.-
-오늘 성민이 지금 5이닝 동안 투구 수 56개밖에 안 됨. 성민이가 완봉해줄 것임.-
-응, 시바 꿈.-
6회 초.
1:0
성민이 다시 마운드에 올라왔다.
솔직히 안심할 수 있는 점수 차이는 아니다. 또한, 절망할만한 점수 차이는 더더욱 아니다.
한 방.
고작 한 방이면 따라잡을 수 있는 점수다.
마운드의 투수는 여전히 의욕과 투쟁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마치 이미 승리한 것 같은 그 자신만만한 미소.
1점이면 충분하다는 그 광오함.
리암 루카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다저스의 저 디아고 헤밍턴이 던진 가장 좋은 공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타이밍에 담장 밖으로 넘어가는 것이 메이저리그다. 아직 아웃 카운트는 열두 개나 남았다. 1점?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
저 패배를 생각하지 않는 투수의 얼굴에 맺힌 미소를 지워주겠다.
세 번째 타순.
에노모토 코이치가 타석에 들어왔다.
그는 앞선 두 번째 타석에서 내야수의 키를 살짝 넘기는 단타를 기록했다.
‘저 녀석 이번 시즌 타율이 0.293이었죠?’
-바로 직전 타석에서 안타 하나 쳤으니 좀 올라갔겠지.
‘뭐, 어쨌거나 3할은 안 되는 거네요. 그러면 됐습니다.’
-응? 그러면 됐다니? 대체 뭐가 됐다는 소리냐?
‘저 녀석 3할 타율까진 안 나오잖아요.’
-그래, 그렇지.
‘그런데 앞선 타석에서 안타를 하나 쳤잖아요.’
-그래 안타를 쳤지.
‘그러니까 이제는 삼진이나 범타로 물러날 때가 된 거죠.’
-대체 그건 어디서 배운 기적의 논리냐?
그야말로 신박한 개소리였다.
하지만 성민의 피칭이 그 신박한 개소리를 현실로 만들었다.
-딱!!
유격수 정면 내야땅볼.
루시 알베리가 가볍게 공을 잡아 일루에 뿌렸다.
“아웃!!”
1루 포스 아웃.
성민이 웃었다. 뭐 논리야 어찌 됐건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타석에 2번 타자 제이크 스컬리가 들어왔다.
‘킁킁, 어디서 냄새 안 나십니까?’
-갑자기 무슨 냄새?
투수와 타자 간에는 상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물론 그것은 그 투수와 타자의 스타일 때문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가끔, 다른 무언가가 그 상성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무슨 냄새기는요. 당연히 호구의 냄새죠.’
첫 번째 타석의 굴욕적인 이퓨스 헛스윙 삼진.
그리고 두 번째 타석. 멋지게 영웅스윙으로 삼구삼진.
성민이 라이벌 팀의 올스타급 유격수 제이크 스컬리에게서 강한 호구의 냄새를 맡았다.
< 트루에이스(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