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루에이스(2) >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이 열광했다.
당연하다.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에이스’ 김성민이었고, 타석에 선 타자는 ‘뉴욕 양키스의 유격수’ 제이크 스컬리였다.
“크크크, 맙소사!! 다들 지금 저거 봤어? 이거 집에 녹화 눌러놓고 나온 사람?”
“이 멍청한 친구 같으니. 시대를 못 맞춰가는군. 요즘 시대에 누가 TV에 녹화를 눌러놓고 나온다는 거야.”
“워워, 설마 자네들 예약녹화 같은 이야기 하려는 건 아니지? 요즘은 인터넷이라는 놈이 그런 걸 알아서 다 해주는 시대라고.”
경기장의 가장 좋은 자리에 앉아있던 여든이 다 된 붉은 옷의 노인 셋이 박장대소했다.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은 보스턴이 승리하는 순간이고, 그다음 즐거운 순간은 양키스가 패배하는 순간이다. 방금 이 장면은 그 두 가지를 합친 것만큼 짜릿했다. 저 거만한 핀 스프라이트 놈이 저런 똥볼에 헛스윙 삼진을 당하다니.
-연습해 둔 보람이 있구나.
타자의 허를 찌르는 공. 만약 타자가 작정하고 준비한다면 가뿐히 담장을 넘길 수 있는 공.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퓨스가 멘탈만 준비한다고 되는 마냥 던지기 쉬운 공은 아니었다.
저 높은 곳에서 저 낮은 곳까지.
이퓨스는 종적인 변화가 매우 큰 공이다. 정확하게 스트라이크존에 넣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이퓨스는 그냥 흘려보낼 경우 볼로 기록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금 성민은 달랐다. 그의 공은 놀라울 만큼 아슬아슬하게 스트라이크존을 스쳐 지나갔다.
세 번째 타자가 3구째 평범한 내야 땅볼로 물러났다.
1회 초, 삼진 하나 포함 공 7개 만에 삼자범퇴. 성민이 그야말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양키스를 침묵시켰다.
매우 좋은 시작이다. 평소였다면 다른 선수들이 성민에게 조금은 까불거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 좋은 결과에도 불구하고 성민은 여전히 투쟁심 가득한 모습 그대로였다. 고작 1이닝을 이렇게 막아낸 것 정도는 성에 차지 않는다.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성민은 온몸으로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물론 성민의 실제 속내는 조금 달랐지만.
‘뭐, 이 정도면 거의 완벽했네요. 공 일곱 개로 삼자범퇴라니. 오늘 경기 이대로만 풀려주면 꽤 오래 던질 수 있겠어요.’
-그것보다 최근에 들어온 불펜들은 나쁘지 않으니, 일찌감치 훌쩍 앞서나가고 쉬어 주는 게 베스트겠지. 너 지금 몸에 피로가 상당해.
‘그래요? 그렇게 무거운 느낌은 없는데.’
-몸이 무거워지는 걸 느끼면 그건 이미 늦은 거고. 그전에 미리미리 관리해둬야지. 네 목표대로 되면 시즌이 9월에 끝나는 것도 아니잖아.
8월이다. 개막 이후로 만 4개월. 스프링 트레이닝 때부터 하자면 6개월. 성민은 로테이션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달려왔다.
‘뭐, 그래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도록 하죠. 일단 오늘은 오늘 경기에.’
양키스의 마운드에 조 달튼이 올라왔다.
27세. 한창때의 투수다. 이번 시즌 양키스의 분전에는 이 남자의 활약 역시 상당한 지분이 있었다. 지금까지 19경기에 선발 출장하여 9승 3패. 평균 자책점 3.41.
평균 자책점만으로 따지면 그보다 좋은 투수는 제법 많았다. 내셔널리그에는 올해도 여전히 2점대 투수가 넷이나 됐으니까. 하지만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로 한정 지었을 때 그보다 낮은 평균 자책점을 기록 중인 투수는 보스턴의 에이스인 성민,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에이스인 애덤 맥도날드. 그리고 양키스의 에이스인 욘 마르틴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성민을 향했다. 현재 아메리칸리그의 모든 화제를 독차지 하고 있는 투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뜨거웠다.
뉴욕 양키스의 순혈 투수. 욘 마르틴의 뒤를 이을 에이스. 이번 시즌 마침내 폭발!! 본래라면 그에게 쏟아졌어야 할 그 막대한 스포트라이트들은 현재 대부분 성민을 향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머저리가 아니었다. 성민은 그만한 실력을 갖춘 투수였다. 인정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러리라는 법은 없지.’
그는 성민을 제법 많이 봤다. KBO라는 곳에서 10년을 뛰었다는 말에 어울리게 그는 노련한 투수였다. 어느 상황에서도 흔들리는 모습 없이 능글맞게 경기를 끌어나갔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투쟁심이 끓어 넘친다.
양키스의 타자들은 그 다른 모습에 당황하여 수세에 몰렸지만, 같은 투수인 그는 알 수 있었다. 저건 절대 좋은 소식이 아니다. 그가 보기에 성민은 누구보다 정교한 기계장치 같은 투수였다. 결코, 한 단계 기어를 높여서 좋은 결과를 내는 유형의 투수가 아니다.
이대로라면 분명 탈이 날 것이다. 그러니 그전까지 버티기만 한다면.
최고 98마일.
조 달튼의 피칭이 보스턴의 선수들을 그럭저럭 묶었다.
-딱!!
물론 그 와중에도 랄로 가야르도의 타격은 압도적이었다. 에노모토 코이치가 올스타급이라는 말에 걸맞은 수비 실력을 지닌 우익수가 아니었다면 점수를 내줄 수밖에 없었을 그런 타구.
[우측 외야 상당히 깊숙한 곳!! 에노모토 코이치가 간신히 타구를 잡아냅니다.]
[에노모토 코이치 선수 같은 경우 레인지만 따지면 중견수를 봐도 괜찮을 만큼 넓은 선수거든요. 실제로 NPB 시절에는 종종 중견수도 봤던 선수고요. 방금도 매우 훌륭한 수비였습니다.]
선수들의 눈빛이 힐끔 성민에게 향했다.
변한 것은 없었다.
0:0
성민이 글러브를 챙겨 묵묵히 마운드로 향했다.
타석에는 Mr. 양키스 리암 루카스가 들어왔다.
그는 올스타전 직전까지 근 한 달 동안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자연스러운 에이징 커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올스타전에서 디아고 헤밍턴의 공을 담장 밖으로 넘겨버린 직후, 그는 37세는 아직 한창때임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최근 20경기에서 87타석 76타수 24안타 3홈런.
0.316/0.356/0.500.
‘아주 몸이 근질거리는 얼굴이네요.’
-이런 순간에 자신이 뭔가를 해줘야 한다는 걸 아는 선수다. 압박이 올수록 더 집중하고 강해지는 타입이지.
‘지금 제가 압박이 되긴 된다 그 말이네요.’
-그래, 지금 너 겉으로만 보면 진짜 디아고 헤밍턴 그 자체다. 아무도 네 피칭이 평소보다 더 뺀질거린다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어.
압박에 강하고, 위기 상황에서 더 집중하는 타자라고 딱히 무서워할 이유는 없었다. 성공은 습관을 만들고, 그 습관으로 여러 번의 성공을 경험한 사람은 그 습관을 쉽게 바꾸지 못한다.
리암 루카스는 양키스를 대표하는 타자다. 그는 감히 자신을 향해 정면승부를 걸어오는 투수를 상대로 수도 없는 승리를 기록해왔다.
시대를 대표했던 수많은 투수. 심지어 이 시대를 넘어 메이저 역사에 기록될만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디아고 헤밍턴이라는 남자에게까지도.
정면에서 걸어오는 승부를 절대 피하지 않는다.
리암 루카스가 성민의 공을 기다렸다.
초구.
빠른 공.
리암 루카스의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부웅!!
“스트라잌!!”
‘응?’
존에서 너무 크게 떨어진 공이었다. 속았나? 아니다. 마운드의 투수 얼굴에는 약간의 당황 그리고 안도감과 투쟁심이 들끓는다. 이건 그냥 의도하지 않은 빠진 공이다.
녀석 운이 좋았군.
‘저럴 줄 알았어요. 아주 방망이 휘두르고 싶다고 저렇게 광고를 하는데 존에 공을 넣어주는 머저리가 세상에 어딨다고.’
-글쎄다. 생각보다는 많지 않을까?
두 번째.
느린 공?
-뻐엉!!!
아니었다. 90.3마일의 빠른 공. 방망이를 간신히 멈춰 세웠다. 다행히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는다. 이번에도 손에서 공이 빠졌나? 역시,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투수 지금 파이팅이 넘친다.
성민이 나직이 혀를 찼다.
‘쳇, 생각 없이 또 방망이를 붕붕 휘두를 줄 알았는데. 그래도 신중하게 나온다. 이거네요.’
-15년 가깝게 양키스라는 팀을 대표하는 노련한 타자다.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지.
세 번째.
가장 자신 있는 빠른 너클볼.
-딱!!
리암 루카스의 방망이가 성민의 공을 걷어냈다. 하지만 최근 타격감에 물이 올랐음에도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일찌감치 파울라인을 벗어나 버린 타구를 바라보며 리암 루카스가 조금만 더 깊숙했더라면 이라고 아쉬워했다.
볼카운트 1-2
투수에게 극도로 유리한 카운트다.
보통이라면 공 하나 정도는 당연히 뺀다. 하지만 지금 녀석이 보여주는 모습. 그리고 1회에 보여줬던 모습들을 생각하면 그런 것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심지어 녀석은 이퓨스를 던지는 와중에도 정확하게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을 던졌다.
그야말로 극도의 공격성이다.
리암 루카스가 성민의 네 번째 공을 기다렸다.
와인드업.
그리고 너클볼.
빠른 너클볼이다. 카운트는 이미 투 스트라이크. 걷어내야 한다. 존 밖으로, 밖으로. 아니다. 이건 너클볼이다. 분명 꺾여 들어온다. 리암 루카스의 방망이가 성민의 공을 쫓았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어? 잠깐만.
이거 왜 들어올 생각을 안 했지? 설마?
리암 루카스의 시선이 마운드로 향했다.
아니다.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의 얼굴에서는 타자를 완벽하게 속여 삼진을 끌어냈다는 즐거움이 보이지 않는다. 원하는 대로 공이 들어가지 않는 것 같은 짜증. 그럼에도 그게 결과적으로는 좋았기에 화를 낼 수도 없는 답답함. 그리고 그런 감정을 숨기기 위한 노력까지.
덕아웃으로 돌아가던 리암 루카스가 자신의 다음으로 타석에 올라가는 보이드 머피에게 소곤거렸다.
‘저 녀석 오늘 커맨드가 제대로 안 먹히는 것 같아. 한 번 확인해봐.’
‘알았어요.’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이 어울리는 위대한 재능 앞에 양키스의 타선이 농락당하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한 코스로 들어오는 공에 방망이를 멈췄다가 루킹 스트라이크.
그리고 몰리는 것 같았던 너클볼을 냅다 두들겨 내야 땅볼 아웃.
2회.
그렇게 성민이 또다시 삼자범퇴로 양키스의 타선을 막아냈다.
***
“성민 선배 오늘 진짜 장난 아니네. 저렇게 기합 빡 들어간 모습,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는데. 역시 아직 1위 포기하지 않으신 거겠지?”
8월 초.
60경기가 남은 상황에서 1위와는 무려 여덟 경기 차이.
동엽이 보기에 성민은 아직 1위를 포기하지 않았다. 미화된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2년 전에도 그랬다. 성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1등만을 보고 달려들었다.
3할 2푼 5리. 27승 56패.
아니, 어제저녁에 1패를 추가해서 3할 2푼 1리. 27승 57패. 남은 경기는 마찬가지로 60경기. 현재 시즌 98패 페이스다. 참고로 KBO 역대 최다 패는 1999년 132경기 체제에서 있었던 97패다. 다행히도 마린스가 가진 기록은 아니다.
마린스가 지금까지 여러 가지, 특히 안 좋은 쪽으로 대단한 기록을 많이 찍기는 했지만, 그래도 시즌 최다 패 기록만큼은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이러다가는 그것마저도 갱신하게 생겼다.
“성민 선배가 있었다면 조금 달라졌겠지?”
아쉬웠다. 이건 성민의 존재만이 아니다. 그보다 박동엽 자신은 성민과 같은 선수가 될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단순히 실력의 문제만이 아니다.
부산 출신 고등학교.
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부분에서 동엽은 이미 성민과 같은 선수가 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혼자만의 노력뿐이었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TV 속의 성민은 여전히 치열하게 경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지키는 선수들 역시 그에 못지않게 치열하게 경기를 이어 나갔다. 그 너무나도 부러운 광경을, 동엽이 하염없이 지켜봤다.
< 트루에이스(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