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09화 (210/287)

< 트루에이스(1) >

에이스.

어떻게 보면 그냥 선발 로테이션에서 가장 빠른, 그저 가장 먼저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를 부르는 말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에이스라는 단어를 고작 그런 의미로 생각하지 않는다.

‘가장 뛰어난.’

그렇기에 오늘 펜웨이 파크에 모인 보스턴 레드삭스의 팬들은 기대했다.

“설마 오늘은 이기겠지?”

“당연하지!! 오늘 등판하는 투수가 성민이잖아. 그 친구가 이번 시즌에 홈에서 뛴 경기는 한 경기 빼고 전부 이겼었어.”

“한 경기 빼고 전부 이겼었다고?”

“그래, 물론 성민 본인 기록이야 노디시전으로 끝난 것도 있긴 하지만, 우리 팀 자체는 1경기 빼고 모두 이겼었다고.”

그들의 에이스가 연패를 끊어주는 것을.

“오늘 성민 평소랑 좀 다른 느낌이지?”

“어, 평소보다 기합이 단단히 들어간 것 같은데?”

보스턴 레드삭스의 선수들이 성민을 바라보며 수군거렸다.

등판 당일의 선발 투수가 투쟁심으로 이글거리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성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성민에게는 일말의 부드러움이 남아있었다. 이것은 평소의 성격과는 무관한 부분이다.

LA 다저스의 디아고 헤밍턴이나 팀의 라만 그레고리 같은 선수들을 보면 평소에는 정말 착하기 그지없는 선수들이지만 마운드에 선 그들은 투쟁의 화신 그 자체다.

그리고 오늘.

성민은 명백하게 평소와 달랐다.

아무 말 없이 혼자 구석에 앉아있는 건 똑같다. 하지만 사람이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데는 꼭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 표정, 몸짓, 그리고 분위기.

당장에라도 달려 나가 적들을 박살 내고 싶다는 욕구가 무럭무럭 느껴진다.

“역시 오늘 상대가 양키스라서 그런 거겠지?”

“그보다 우리가 요즘 연패하고 있으니까 그거 끊어내고 싶어서 그런 걸지도.”

“뭐가 어찌 됐건 오늘 좀 심상치 않기는 해.”

평소 등판일의 성민이 저 깊숙한 곳에 뜨거운 용암을 품고 있는 잔잔한 호수와 같았다면, 오늘은 마치 터지기 직전의 활화산 같은 느낌이었다.

-성민아.

‘네.’

필 니크로가 차마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성민이 보여주는 이 모습은 몽땅 ‘연기’였기 때문이다.

‘팀 분위기도 좀 흐트러졌고, 이런 때는 역시 빡세게 조여주는 게 필요하죠.’

-그건 그렇지.

성민은 평소 여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실력을 백분 발휘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극약처방도 필요하다. 효과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았다. 원래 온순하던 사람이 화를 낼 때 사람들은 더 큰 충격을 받는다. 게다가 롤모델 역시 충분하다.

지금 성민은 그가 알고 있는, 가장 폭력적이고 압도적인 에이스의 모습. 디아고 헤밍턴의 등판일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뉴욕 양키스의 시리즈 1차전. 이번 시즌 14번째 맞대결이군요.]

[뉴욕 양키스 같은 경우 현재 67승 35패로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서 압도적인 1위로 달려 나가고 있거든요. 중간에 잠깐 부진했던 적도 있긴 합니다만, 최근 10경기에서 무려 8승. 올스타 브레이크 이후로 가장 분위기가 좋은 팀 중 하나입니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기세 역시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현재 성적은 59승 43패. 불과 석 달 전까지 승리보다 패배가 많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말 괜찮은 기세죠.]

[하지만 최근 주전 선수 두 명이 부상으로 이탈하고 그 기세도 조금 주춤한 느낌이 있습니다. 특히 최근 경기에서 3연패를 기록하며 동부지구 3위 팀인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승차가 한 경기로 좁혀졌어요.]

[그래도 오늘 경기는 보스턴 입장에서는 기대해볼 만한 경기죠. 에이스인 김성민 선수가 마운드에 오르는 날이니까요.]

[게다가 보스턴 레드삭스의 이번 시즌 양키스 상대 전적을 보면 7승 6패로 1승을 앞서나가고 있단 말이죠. 동부지구의 모든 팀 가운데 양키스를 상대로 더 많은 승리를 거둔 팀은 현재 보스턴 레드삭스가 유일합니다.]

[자, 지금 마운드 위에 김성민 선수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마운드 위에 올라와 모자를 두 번 매만지고 어깨를 크게 한 번 돌려준다. 그리고 상대 팀 덕아웃과 우리 덕아웃을 한 번씩 바라봤다.

-굳이 이런 것까지 따라 할 필요는······.

타석에 양키스의 선두타자인 에노모토 코이치가 올라왔다. 재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성공과 실패 가운데 실패에 더 가까운 포스팅이었다 정도로 평가받던 그는 작년 이후로 확실하게 자리를 잡았다.

4년의 어정쩡함을 완벽하게 커버하는 2년이었다는 평가 속에서 그의 6년 1억 3천만 달러가 낭비였다는 말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이번 시즌 0.293/0.381/0.493. 그리고 19홈런.

진지하게 MVP를 노릴만한 성적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보다 좋은 코너 외야수는 리그 전체를 통틀어 몇 되지 않는다. 아마 이대로 시즌을 끝낸다면 표 몇 장 정도는 충분히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마운드의 성민이 그를 강하게 노려봤다.

지금까지 에노모토 코이치가 기록한 성민과의 상대 전적은 심히 좋지 못했다. 안 그래도 심리적으로 조금 위축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저 눈빛과 기세. 심상치 않다.

하지만 위축되지 않는다. 고작 투수의 기세에 겁을 먹어서야 올스타급 우익수라는 이름이 아깝다. 에노모토 코이치가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떤 공이 들어올까?

평소와는 다른 저 폭풍 같은 기세에 걸맞은 공이겠지?

그래, 만약 빠른 공이 들어온다면 그대로 담장을 넘겨주마.

에노모토 코이치가 성민의 초구를 기다렸다.

마운드의 성민이 힘차게 와인드업했다. 그 간결한 와인드업과는 어울리지 않는 흉폭한 기세가, 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묘한 위압감이 그 와인드업을 따라 확장됐다.

온다.

온다.

온다!!

에노모토 코이치의 몸이 성민의 와인드업에 맞춰 반응했다. 0.4초. 그 찰나의 시간 속에서 빠르게 날아드는 공을 쳐 내기 위하여. 수없는 연습을 통해 완성된 이상적인 스윙이 그가 생각한 타이밍에 맞춰 이뤄졌다.

‘어?’

에노모토 코이치는 좋은 타자였다.

그렇기에 이상함을 느끼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흉폭한 기세 속에서 당장이라도 모두를 씹어먹을 기세를 품은 투수가 던진 공은 그 기세와 어울리지 않는 속도로 천천히, 몹시 천천히 날아들었다.

이미 바닥을 디딘 오른발. 돌아가기 시작한 몸통을 강제로 멈춰 세운다. 무너진 타격폼. 하지만 그 와중에도 마지막까지 공을 추격하는 것은 그가 그만큼 좋은 타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딱!!

에노모토 코이치의 방망이 끝이 63마일의 너클볼을 건드렸다.

높게 뜬 타구가 내야를 넘지 못했다. 제롬 스튜버츠가 가볍게 몇 걸음을 움직여 타구를 받아냈다.

초구 내야 뜬공 아웃.

그 깔끔한 결말에 에노모토 코이치가 자신도 모르게 허탈하게 웃었다.

아니 대체 어째서 자신은 성민이 속구로 자신을 윽박지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마운드의 성민은 여전히 사나운 기세를 풀풀 풍겨대고 있었다.

한 명의 타자를 잡았음에도 여전히 허기는 사라지지 않았다는 맹수의 눈빛이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요.’

-뭐, 에노모토 코이치는 아무래도 패스트볼 히터에 가까우니까. 물론 그런 것 치고는 브레이킹 볼도 곧잘 걷어내긴 하지만, 그래도 장타를 보면 대부분 작정하고 패스트볼을 노려 친 공들이지.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외향뿐이다. 머릿속은 여전히 평소의 성민 그대로다.

필 니크로가 새삼 성민에게 감탄했다. 그래, 연기를 잘하는 거야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 그 연기라는 것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 몰입하게 된다. 실제로 극 중 역할에 이입하여 울고 웃고 화를 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지금 성민은 누구보다 격정적인 투수를 ‘연기’하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거기에 이입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 연기를 완벽하게 해내면서도 속으로는 평소의 김성민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타석에 양키스의 두 번째 타자 제이크 스컬리가 들어왔다.

작년과 올해, 2년 연속으로 아메리칸리그 올스타팀의 1번, 2번은 에노모토 코이치-제이크 스컬리였다. 그들이 단순히 양키스의 1번과 2번이 아닌 아메리칸리그 전체를 따졌을 때 가장 대단한 리드 오프 콤비라는 뜻이다.

‘오늘 저 녀석 기세가 범상치 않아.’

딱히 에노모토 코이치가 이야기해주지 않더라도 저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제이크 스컬리 역시 에노모토 코이치와 마찬가지로 투수의 기백에 위축되는 일은 없었다.

“오늘 너희 선발 아주 각오를 단단히 했나 보네?”

“글쎄,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하는 건 성민이가 아니라 너희들이겠지? 지금까지 양키스에서 성민이 제대로 공략한 적 없지 않나?”

“지난번에 우리가 이겼던 건 기억 못 하나 보지?”

“그거야 성민이 내려간 이후에 불펜들 두들겨서 했던 거고. 오늘 내 생각에는 성민이가 마운드를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이는데? 이제 니들 어쩌냐?”

가벼운 신경전.

제이크 스컬리가 타석에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평소 성민의 얼굴은 선하다 못해 조금 순둥순둥해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얼굴이 저런 표정과 기세를 뿜어내고 있으니, 이건 무서운 얼굴이 인상을 쓰는 것보다 더 껄끄럽다.

초구 와인드업.

바깥쪽 낮은 코스, 날카롭게 찔러 들어오는 빠른 공이다.

제이크 스컬리의 방망이가 적절하게 움직였다.

-딱!!

라인을 훌쩍 벗어나는 파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성민의 속구가 존에서 한참을 벗어나는 지점으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제이크 스컬리가 고개를 두어 번 휘휘 저었다.

투수에게 압도당하지 말자.

성민의 무기는 너클볼이다. 그렇기에 욕심을 조금 내봤다. 존을 조금 벗어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속구다. 노려볼 만했다.

두 번째.

이번에는 몸쪽 깊숙한 코스.

제이크 스컬리의 방망이가 멈춰 섰다.

-뻐엉

“스트라잌!!”

순식간에 볼카운트 0-2

아직까지 성민은 너클볼을 하나도 던지지 않았다.

“뭐야? 방망이 휘두를 힘도 없는 거야? 아니면 설마 이게 벗어날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는 성민의 무기를 너클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너클볼을 무기로 사용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요소를 잊고 있었다.

던지는 투수 본인조차도 어디로 날아갈지 알 수 없는 공을 스트라이크존의 안과 밖으로 집어넣는 데 필요한 커맨드.

성민의 속구는 존을 6개로 분할했을 때 거의 8할 이상의 확률로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미친 제구력의 소유자다. 게다가 성민의 공을 받는 에두아르도 크루즈는 프레이밍에 있어서 현역 포수 No.1을 자부할 수 있는 포수다.

제이크 스컬리가 묵묵부답으로 성민의 다음 공을 기다렸다.

세 번째.

이번에야말로?

사나운 표정과 기세.

성민의 손끝에서 야구공이 날아올랐다.

두 개 연속 빠른 공.

제이크 스컬리의 오른발이 바닥을 디뎠다.

경기를 지켜보던 보스턴의 팬들이 입을 떡 벌렸다. 성민의 손끝에서 야구공이 날아올랐다는 표현이 한치의 과장도 없는 말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이퓨스?]

투수의 손을 떠난 속구가 포수의 미트에 도달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0.4초. 그리고 이퓨스의 경우 거의 1.2초에 가까운 시간이 걸린다.

덕분에 속구에 타이밍이 맞춰져 있던 제이크 스컬리의 폼이 완벽하게 무너졌다. 이미 볼카운트는 0-2. 어쨌거나 방망이를 휘둘러야 한다.

하지만 높게 치솟았다가 떨어지는 이퓨스를 맞추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것도 저렇게 완벽하게 폼이 무너진 상태에서는 더더욱.

-부웅!!

“스트라잌!! 아웃!!”

44마일짜리 이퓨스가 헛스윙을 끌어냈다. 그야말로 타자를 완벽하게 농락하는 삼구삼진.

마운드의 투수는 여전히 당장이라도 100마일짜리 속구를 던질 것 같은 난폭한 기세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 트루에이스(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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