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08화 (209/287)

< 하반기(3) >

-뻐엉!!

연습용 마운드.

브라이언 보일이 며칠 전 등판을 끝내고 루틴에 따라 불펜에서 공을 던졌다.

‘뭐, 좀 던지긴 던지네.’

마이너에서 올라온 맥스 슈피겐이 팔짱을 끼고 그의 피칭을 지켜봤다. 확실히 잘 던지긴 한다. 자신을 몰아내고 마운드를 차지할 만하다.

“어때?”

“뭐, 공이 좋긴 좋네요.”

그렇기에 성민의 질문에도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실제로 좋은 공이었으니까. 성민이 맥스 슈피겐의 이야기에 웃으며 그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남을 인정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었다. 타인을 폄훼하지 않더라도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다. 마이너에 내려가서 잠깐 고생 좀 했더니 인간적으로 한층 성장했다.

물론 그 정반대도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너도 공 좋아.”

“저도 압니다.”

이 맥스 슈피겐이라는 인간이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슬라이더 빼면 제가 전체적으로 조금 더 나은 것 같네요.”

“저 녀석 주 무기가 슬라이더인데 그걸 빼고 이야기를 하겠다고?”

“쟤가 저보다 한 살 많잖습니까. 그 정도 패널티는 줘야죠.”

“너도 이제 생일 지나서 동갑 아니냐?”

“메이저 공식 나이는 7월 1일 생일을 기준으로 하니까 전 공식적으로는 항상 저 친구보다 한 살 어립니다.”

맥스 슈피겐의 이야기처럼 메이저리그에서 ‘몇 세 시즌’이라는 말을 쓸 때의 나이는 보통 7월 1일을 기준으로 한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라면 엥? 그게 뭐야? 나이를 왜 그따위로 계산 해? 라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1월 1일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 1월생과 12월생은 커리어에 1시즌 차이가 생기는데 동일 나이로 묶여 버린다.

그렇기에 4월 초에서 9월 말까지를 시즌의 기준으로 잡고 그 중간인 7월 초를 만 나이의 기준으로 매겨버리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미국의 입학 시즌이 7월 4일이라는 점 역시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성민의 경우 역시 2002년 11월 27일생으로 현재 한국 나이로는 33살이지만, 만으로 31세이며 이번 시즌 역시 31세 시즌으로 취급된다.

물론 기록 같은 걸 세웠을 때는 만 나이에 날짜까지 얄짤없이 따지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슬라이더까지 더하면 어떤데?”

“그거야 이제 마운드에서 던져 봐야 알 일이죠.”

맥스 슈피겐이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이것 역시 마음에 든다.

이 녀석은 아직 젊은 투수였다. 그리고 젊은 녀석들이 그렇듯 너무 뜨거웠다. 물론 뜨거운 녀석들 가운데도 좋은 투수는 많다. 실제로 이 시대 최고의 투수 디아고 헤밍턴 역시 펄펄 끓는 용광로 같은 녀석이다.

하지만 그거야 재능이 넘쳐서 끓어 오르는 녀석들의 일이다. 빡치는 상황을 끓어오르는 열혈로 이겨낼 수 있는 녀석들은 메이저리그 역사를 통틀어도 몇 되지 않는다. 보통은 거기서 열내다가 말아먹는다.

맥스 슈피겐은 보스턴에서 기대하고 키울만큼 재능있는 투수였지만, 그 정도 수준의 재능인가 하면 아쉽게도 그 정도는 아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이번 마이너행이 너에겐 도움이 된 모양이네.”

“뭐, 그렇죠. 가장 큰 도움은 역시 앞으로는 절대 이런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는 결심이 들게 해줬다는 점이겠지만요.”

***

지난 4월.

처음 메이저를 밟았을 당시 루시 알베리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3주만 버티자.

난 아직 메이저를 뛸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후안 칼초가 돌아오면 난 다시 마이너로 내려갈 것이고, 거기서 꾸준히 더 기량을 쌓는다면 언젠가 빅리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멍청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시점에서 그는 다시 마이너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는 행운아였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행운아다.

일단 그것이 멍청한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내려간 것이 첫 번째 행운이었다면,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기회를 받았다는 점이 두 번째 행운이었다.

물론 두 번째 행운은 그의 노력과 성적이 만들어 낸 행운이다. 하지만 그 성적이 리그를 폭파시킬 정도가 아닌 이상에서야 메이저에 콜업되는 것은 분명 행운이다. 마이너에는 그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기록하면서도 팀 사정상 40인에서 머무르는 선수가 널렸으니까.

그렇기에 이번에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리라.

자세를 낮추고 두 눈을 번뜩이며 상대 타자를 노려봤다. AA에서는 수비와 공격 모두 한 꺼풀을 벗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AAA에서는 공격은 으응? 이었지만, 그래도 수비만큼은 준수했다.

메이저는 어떨까?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맥스 슈피겐의 97.4마일 속구가 공략당했다.

-딱!!

낮은 각도의 라인드라이브성 타구.

애매하다.

루시 알베리가 고민했다. 가능할까?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좋았다. 누가 봐도 어려운 공. 이걸 잡아낸다면 그야말로 영웅이다.

하나, 둘, 셋. 그리고 점프.

[아!!!]

야구공이 루시 알베리의 글러브를 스치고 쭉 날아갔다. 점프가 3센티만 높았더라면, 팔이 3센티만 길었더라면. 아니, 앞으로 몇 걸음만 더 나올 수 있었더라면.

아쉬웠다. 하지만 곧바로 머리를 툭툭 털었다.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는 생각은 아니다. 기회는 한정적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지나간 일에 미련을 가져서는 안된다. 과거에 얽매여 미래의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루시 알베리가 이번 경기에 오롯하게 집중했다.

[보스턴 레드삭스 4:3 아쉬운 패배!!]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야구는 기세 싸움이라고. 한참 달아 올라있던 팀에 찬물이 끼얹어졌는데 별수 있어?-

-그래도 이 정도면 ‘졌지만 잘 싸웠다.’ 아니냐?-

-졌는데 잘 싸운 게 무슨 상관임?-

-그래도 맥스 슈피겐은 괜찮더라.-

-맥스야 원래 재능은 있던 녀석이잖아. 너무 어린 나이에 빅리그 콜업되서 안전 빵으로 쭉쭉 온다고 좀 풀어졌던 게, 이번 일로 바짝 조여진 거라고 본다.-

-그래, 부룬디 쿠치에 빈자리는 맥스 슈피겐이 잘 메워준다고 치는데, 매튜 쿠퍼 자리는 어쩌냐?-

-그러니까, 우리가 그래도 공격력으로는 걱정을 안 하던 팀인데 졸라 한숨이 푹푹 나오더라.-

-매튜 한 사람 사라졌다고 우리 핵빠따가 어떻게 되겠냐? 그냥 잠깐 몇 경기 그런거겠지. 8월이면 선수들도 지칠 때도 됐고. 그래서 지금 로테이션 돌리면서 휴식 주는 것도 있잖아.-

-아니, 그건 그런데, 이번에 올라온 루시 알베리 타격 성적 봤음?-

-이제 한 경기 했는데, 뭐 그리 예민하게 구냐.-

-걔 4월 성적도 좀 보고 이제 한 경기라고 말하지 그러냐. 그 새끼 빠따는 진짜 절망 그 자체야.-

4타수 무안타 2삼진.

루시 알베리가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빅리그다. 브레이킹 볼에는 제법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2개의 삼진을 각각 슬라이더와 커브에 헛스윙으로 당했다. AA나 AAA와는 브레이킹 볼의 수준이 또 달랐다.

성민이 슬쩍 루시 알베리에게 다가갔다. 가장 좋은 라커룸과 가장 나쁜 라커룸. 투수와 야수. 제법 먼 거리였지만 어색하지는 않았다. 루시 알베리의 라커가 문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뺀질거리기만 하더니 많이 좋아졌더라.”

“네, 네?”

“오늘 세 번째는 그냥 운이 없었던 거야. 이제 신경 쓰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해. 여름인데 괜히 오버해서 힘 빼지 말고.”

성민이 루시의 어깨를 한번 툭 치고 가던 길을 갔다.

-뭐야? 설마 제 2의 박동엽이냐?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그냥 앞으로 한 달은 또 같이 뛰어야 할 것 같아서 한숨이 좀 나왔었는데, 내려가기 전보다는 나아진 것 같아서 그냥 한마디 해준 겁니다. 어차피 같이 뛸 거면 이왕이면 제대로 하는 게 좋잖아요.”

-그건 그렇지.

“근데 뭐, 이번에 올라온 애송이들이야 그렇다 치고, 이거 분위기 자체가 좀 불안불안하네요.”

-동료들의 부상에, 팀은 연패에. 게다가 더위까지. 지칠 때도 됐지.

“뭐,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우리 아직 가을 야구 가능성도 있고 심지어 지구 1위 가능성도 남았잖아요.”

-성민아, 60경기쯤 남은 상황에서 여덟 경기 차이면 보통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 하지 않겠니?

확실히 어려운 일이다.

양키스의 현재 승률은 6할 6푼에 가까웠다. 그들이 남은 경기에서 지금과 같은 승률을 유지한다고 치면 보스턴이 지구 우승을 위해 필요한 승률은 무려 8할.

60경기 가운데 무려 48경기를 승리해야 한다.

“옛날에 요기 베라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역시 잘 아시는군요.”

확실히 어울리는 말이기는 하다.

실제로 요기 베라가 메츠의 감독을 하던 시절 지구 선두인 컵스와 9.5게임 차가 날 때 이런 이야기를 했고, 그걸 역전하며 끝끝내 지구 우승을 시켰었으니까.

-하지만 요기 베라 감독이 그 이야기를 할 때는 7월 초에 9.5경기였고, 지금 너는 8월 초에 8경기라는 걸 생각해야지.

“그걸 고려하기 이전에 당시에 요기 베라는 감독이었고, 전 에이스 투수라는 걸 생각해주셔야죠. 아시잖습니까. 야구에서 감독이 할 수 있는 일과 에이스가 할 수 있는 일. 어느 쪽이 더 큰 영향을 주는지를요.”

-확실히 그건 그렇다만······.

잘 달려 나가던 팀이 한순간 삐끗하는 일은 흔한 일이다. 특히 젊은 팀이 기세로 달려나갈 경우 종종 그런 일을 경험한다. 보스턴은 지난 트레이드로 30대 투수 둘을 데리고 왔었지만 그럼에도 리그에서 가장 젊은 팀이었다.

하지만 보스턴에는 다른 젊은 팀에는 없는 것이 존재했다.

김성민.

다시 말하지만, 그는 무려 부산 마린스를 통합우승으로 이끈 남자였다.

2033년 그가 빠진 직후 깔끔하게 가을야구 탈락.

2034년에는 아직 시즌이 두 달이나 남은 8월에 가을야구에 탈락하고 9위 경쟁을 하는 바로 그 부산 마린스를 말이다.

“제가 또, 망해가는 분위기 살리는 법은 누구보다 잘 알죠. 왜냐하면, 우리 팀은 항상 망해가는 분위기였거든요.”

-그건 솔직히 인정······.

“아!! 그런 거 그렇게 쉽게 인정하시지 말라고요. 부산 마린스의 팬이면 팬답게 팀을 조금 더 자랑스럽게 생각해주세요. 마린스는 까도 나만 깐다!! 이런 정신으로요.”

-그 무슨 미친 소리를? 대체 누가 마린스 팬이라는 말이냐!!

“그래서 마린스 현재 승률은?”

-3할 2푼 5리. 27승 56패. 큭······.

8월.

보스턴 레드삭스의 에이스가 침체하고 있는 팀 분위기를 살리겠노라 호언장담했다.

-근데 그래서 대체 어떻게 분위기를 살리려고?

“그야 간단하죠.”

-간단?

“프로 구단 분위기 살아나는 거 별 거 있습니까. 경기에서 이겨야죠.”

-승리? 그냥 승리? 그걸로 되겠어?

“에이, 당연히 그냥 승리는 아니죠.”

-그러면?

“압도적인 승리. 누가 봐도 ‘쟤랑 같이 있으면 가을에 야구 하겠구나.’ ‘쟤랑 가을야구 가면 가능성 있겠구나.’ 싶은 그런 승리요.”

필 니크로가 대체 이 미친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하는 눈빛으로 성민을 바라봤다. 아니 누군 지고 싶어서 지는 건가? 심지어 팀원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압도적인 승리라니.

아니지, 근데 그래도 뭔가 이 녀석이라면······.

허풍처럼 들리는 소리.

하지만 지금까지 해온 일을 보면 또 모르겠을 아리까리한 소리.

펜웨이 파크.

성민의 등판이 돌아왔다.

< 하반기(3)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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