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반기(2) >
7월이 빠르게 흘러갔다.
날씨는 점점 더워졌고 몸은 지쳐갔다.
특히 남부지역으로 내려갈 경우 40도에 달하는 기온은 선수들의 진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가장 먼저 탈이 난 것은 매튜 쿠퍼였다.
“뭐라고? 감기? 이 더위에 다른 병도 아니고 감기라고?”
“그게, 너무 더워서 에어컨을 켠 채로 이불도 안 덮고 잠을 잤다고······.”
“환장하겠군.”
“그래도 다행인 건 경기를 못 뛸 정도는 아니라고 합니다.”
엔리케 로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에어컨을 켜고 잤다는 것만으로 감기에 걸렸다고 보기도 힘들었다. 최근 상황을 보면 면역력이 떨어질 만한 환경이기는 했다. 더운 날씨, 거듭되는 원정. 특히 매튜 쿠퍼의 경우 거의 전 경기를 결장 없이 출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팀닥터 말이 어차피 리노 바이러스라고. 직접적으로 접촉만 하지 않고, 선수들이 손만 잘 씻으면 전염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됐어. 이번 기회에 하루 호텔에서 푹 쉬라고 해. 어차피 하루 정도 휴식일 줄 때도 됐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감독 입장에서 짜증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짜증은 짜증이고 판단은 판단이다. 어차피 감기에 걸려 무겁고 멍한 몸으로 경기를 뛰어봤자 대단한 활약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차라리 수액이라도 맞아가며 하루 푹 쉬고 빠르게 건강해지는 것이 이득이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9명 중에 하나.
어떻게 생각하면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명타자를 사용하는 아메리칸리그와 내셔널리그를 생각해보면 그 하나가 얼마나 큰지를 짐작할 수 있다.
리그 평균 OPS가 0.01 정도 차이가 난다. 게다가 전체 득점 역시 약 2% 정도 차이가 난다. 적은 차이가 아니다.
무엇보다 매튜 쿠퍼는 현재 보스턴 레드삭스 공격의 중심 중 하나였다. 공격력이 확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젠장.”
브라이언 보일이 살짝 짜증을 냈다.
7이닝 2실점을 했는데도 게임에 졌다. 불펜 탓도 아니다. 보스턴에 보기 드문 빈공 때문이었다.
“브라이언.”
그런 브라이언 보일을 향해 라만 그레고리가 살짝 인상을 썼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더러운 성격을 마음껏 방출하는 브라이언 보일이었지만 빅리그 초년생 시절부터 자신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라만 그레고리에게만큼은 예외다.
보스턴의 다른 선수들 역시 브라이언 보일이 지랄하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에야 기분이 나빴지, 등판일에 지랄 맞은 선발이야 딱히 대단한 일도 아니다. 무엇보다 저렇게 라만 그레고리라는 훌륭한 제어기도 붙어있지 않은가.
“그래서 매튜 몸은 좀 어때?”
“애초에 경기를 못 뛸 정도로 아팠던 것도 아니고, 하루 푹 쉬었더니 이제 괜찮아졌다고 합니다.”
“그러면 내일 경기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도록 하자고.”
본래는 보스턴의 2선발이었지만 라만 그레고리와 브라이언 보일이 온 이후 네 번째까지 순서가 밀렸던 부룬디의 등판일이었다.
경기 직전의 배팅 연습 시간.
매튜 쿠퍼가 힘차게 방망이를 돌렸다.
-딱!!
아슬아슬하게 담장 앞까지 날아가는 타구.
“뭐야? 오늘 영 비실비실한대?”
“비실비실은 무슨. 그냥 어제 하루 쉬느라 그런 거야. 게다가 그 비실거리는 타구도 네 공보다는 멀리 나가는 것 같은데?”
“나야 무식하게 힘만 쎈 너랑은 다르지. 이 빠른 발이 있잖냐.”
제롬 스튜버츠와 매튜 쿠퍼가 악담을 주고받았다.
날 선 대화 같았지만, 딱히 악감정은 없었다. 애초에 서로가 저런 대화에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가능한 대화였다.
경기가 시작됐다.
부룬디는 작년 4.07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렇기에 보스턴은 그가 성민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2선발 역할을 훌륭하게 해주리라 기대했다. 4.07의 평자책이라고 하면 조금 우습게 보일 수도 있지만, 당장 작년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서 4점 미만의 평자책을 기록한 투수가 10명이 채 안 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보스턴의 그런 기대는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이번 시즌.
부룬디는 지금까지 4.92의 평자책을 기록하며 매우 부진했다. 작년 쏠쏠하게 써먹었던 체인지업이 완전히 공략당한 덕분이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체인지업의 비중을 줄이고 새로 익힌 각이 큰 슬라이더를 사용해봤지만 영 재미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는 중요한 선수였다.
꾸준히 이닝을 먹어줄 수 있고, 대충 답이 나오는 투수다. 4선발로는 충분했다.
-딱!!
5회 말, 볼티모어 오리올스 타자의 타구가 힘차게 뻗었다.
100마일을 상회하는 빠른 타구였다. 그리고 그 타구가 향한 방향은 마운드. 정확히 부룬디의 머리 쪽이었다.
-뻑!!
그야말로 대형사고. 마운드의 부룬디가 그대로 쓰러졌다.
순간의 정적.
보스턴의 덕아웃이 빠르게 움직였다. 마운드 위로 팀 닥터가 달려갔다. 명백한 의식 소실. 다행히 부룬디가 쓴 모자는 일반적인 야구모자가 아닌, 마운드에 투수용으로 특별히 제작된 모자였다. 충격흡수패드가 들어가 모양은 조금 볼썽사나웠지만, 이번엔 그것이 부룬디의 목숨을 구했다.
금방 정신을 차린 부룬디가 들 것 없이 마운드를 내려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구장에 비치된 응급차를 타고 곧바로 지정병원으로 향했다.
“괜찮겠지?”
“자세한 건 MRI랑 이것저것 찍어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멀쩡히 걸어들어왔잖아. 괜찮을 거야.”
“평소에 못난이 모자를 쓴 녀석들을 놀렸었는데, 앞으로는 그러지 말아야겠어. 이렇게 눈으로 직접 보니 정말 아찔하네.”
하지만 슬프게도 보스턴의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딱!!
방망이를 휘둘러 96.4마일짜리 속구를 두들긴 매튜 쿠퍼가 손목을 움켜쥐었다. 빗맞은 타구는 이미 내야 관중석을 직격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왼쪽 손목 염좌.
안 그래도 감기 기운으로 컨디션도 좋지 않던 차에 빗맞은 타구가 그의 손목에 무리를 주었다.
볼티모어와의 2차전.
두 명의 선수가 부상으로 물러났고 보스턴은 5:4로 간신히 경기를 승리했다.
***
“안 좋은 일은 몰아서 온다더니. 미치겠군.”
“그래도 두 선수 모두 시즌 아웃 급 부상은 아니라는 게 다행입니다.”
“다행은 무슨. 안 그래도 와일드카드 경쟁 빡빡하게 가져가는 와중에 주 전력이 둘이나 이탈을 했는데.”
“부룬디 선수의 경우는 뇌진탕으로 3주 정도 휴식을 취하며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고 했고, 쿠퍼 선수는 4주 정도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둘 다 8월 말은 돼야 돌아올 수 있다 이 말이군.”
존 맥도웰이 실시간으로 빠지는 머리카락을 느꼈다.
“일단 투수는 맥스 슈피겐 올리고, 삼루수는······.”
마이너의 유망주들을 훑었지만, 딱히 눈에 들어오는 녀석이 없었다. 바그너 가이탄이 새삼 아쉽다. 녀석이 매튜 만큼 어깨가 강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삼루 수비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존 맥도웰이 이내 머리를 저었다.
아니다. 애초에 녀석을 내주고 넷이나 되는 투수를 데리고 옴으로써 지금의 구도가 만들어졌다. 그 트레이드는 성공적인 트레이드다.
“단장님, 이렇게 된 이상 애초의 계획대로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애초의 계획?”
“루시 알베리 말입니다.”
“그거라면 지금 당장은 무리라고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잖나.”
“그렇기는 합니다만, 지금 당장 트레이드가 가능한 상황도 아니고, 어차피 내야수 하나를 올려야 한다면 녀석도 괜찮지 않을까요? 어차피 주전 유격수로 뛰고 있는 후안 칼초나, 현재 내야 유틸로 뛰는 에릭 크레이그. 둘 다 유격수와 삼루수가 가능한 자원이잖습니까. 일단 그 둘을 주전으로 사용하고 루시 알베리를 백업으로 사용한다면······.”
“······.”
***
지난 올스타브레이크 직후 루시 알베리의 신상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숫자로 표시되는 성적에 큰 변화는 없었다. 그의 OPS는 여전히 0.700에서 0.710을 오갔다. 하지만 올스타브레이크 직전의 0.704가 매우 긍정적인 소식이었다면 지금의 0.710은 그리 긍정적인 소식이 아니었다.
인터내셔널 리그 포투켓 레드삭스.
현재 루시 알베리가 뛰는 팀이었다.
본래 AA 이스턴리그 포틀랜드 시 독스에서 뛰던 그는 갑작스럽게 AAA리그로 콜업 됐다. 더 수준이 높은 리그에서 비슷한 타격 성적을 거두고 있으니 나쁜 소식은 아니지 않는가 하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스턴리그의 평균 ops는 고작 0.659 반면 인터내셔널리그 같은 경우는 무려 0.787이다. 이스턴리그의 루시 알베리는 평균 이상의 생산성을 보여주는 유격수였다면, 인터내셔널리그에서는 평균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생산성을 보여준다는 의미다.
이는 상당히 나쁜 소식이다.
AAA 리그의 투수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메이저의 투수에 비하면 부족하다. AA 리그를 두들겼지만, AAA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말은, 수준 높은 투수를 상대로는 아직 부족하다는 의미였다.
삼진으로 물러난 루시 알베리에게 맥스 슈피겐이 다가왔다.
“조만간 익숙해질 거야.”
맥스 슈피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 중에서는 가장 예쁜 말이었다. 루시 알베리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래야지.”
그의 목표는 더 높은 곳에 있었다. 고작 AAA 리그에서 포기할 생각 따윈 전혀 없다. AA에 있으면서 브레이킹 볼들에는 제법 적응을 했지만, 여전히 싱커나 커터 같은 변형 패스트볼은 어렵다.
‘제법 적응을 했다고 해봐야 여전히 폭풍 같은 삼진이나 당하는 신세이긴 하지만 말이야.’
AA에 적응했던 것처럼, 시간만 주어진다면 여기도 얼마든지 적응할 수 있다. 그리고 AAA의 상위권 투수들은 메이저의 하위권 투수에 비길만하다. 또한, 루시 알베리는 이제 22살에 불과했다. 물론 22살에 빅리그에 콜업되어 날아다니는 몇몇 괴물도 존재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22살이면 AA에서 성공적인 성적만 기록해도 훌륭하다.
아직 시간은 많았다.
“네?”
“못 들었어? 짐 싸라고.”
“지금 그러니까······.”
“부룬디랑 쿠퍼가 부상으로 DL에 올라갔어. 콜업이다.”
아니, 착각이었다.
시간은 많지 않았다.
루시 알베리의 생각보다 훨씬 빠른 타이밍. 생각하지 못한 기회 속에 그가 다시 메이저 무대를 밟았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연이은 불운!! 부룬디 쿠치에, 매튜 쿠퍼 DL 등재!!]
[맥스 슈피겐, 루시 알베리 콜업!! 보스턴의 남은 시즌은?]
-아, 미친. 한참 분위기 달아오르고 있었는데 주전 선수 둘이 부상이라고?-
-이번에도 가을 야구는 텄네, 텄어.-
-심지어 트레이드로 전력보강 하는 것도 아니고 맥스 슈피겐이랑 루시 알베리를 올린다고? 가을야구 할 생각 없다고 광고라도 하는 거야 뭐야?-
-그래, 맥스 슈피겐까지는 인정. 근데 루시 알베리는 진짜 아니지.-
-하, 이거 팀 분위기도 완전 박살 났겠는데? 한참 의욕 끓어 올리면서 으쌰으쌰 하는 찰나에 이런 일이 터지다니 말이야.-
< 하반기(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