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05화 (206/287)

< 괴물들(2) >

내셔널리그 올스타팀의 선두타자는 다저스의 이루수 마르타 블랑코.

[타석에 마르타 블랑코 선수가 들어옵니다.]

[이 선수 같은 경우 작년 커리어 하이를 기록한 데 이어서, 이번 시즌도 지금까지 17개의 홈런포를 쏘아 올리며 그게 단순히 플루크가 아니라 브레이크 시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살짝 아쉬운 점은 그 브레이크 시즌이 조금 늦었다는 점 정도죠. 한 2, 3년만 일찍 이런 모습을 보여줬으면 정말 명예의 전당도 노려볼 수 있는 성적이었을 겁니다.]

[에이, 그거야 모르는 일이죠. 20년 전 아드리안 벨트레 선수도 32세에 텍사스 들어간 이후 아름다운 6년을 통해서 명예의 전당이 확실해졌잖습니까. 마르타 블랑코 선수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죠.]

마르타 블랑코가 가볍게 호흡했다.

분명 그는 작년 한 단계 스텝 업을 했다. 단언컨대 지금, 이 상태가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상태다. 컨디션 역시 훌륭하다. 다저스는 현재 메이저리그 최강의 팀이며 마르타 블랑코는 그런 다저스 공격의 포문을 여는 선봉장이다.

마운드의 성민이 와인드업했다.

간결한 폼. 저런 폼으로 90마일짜리 속구를 뿌린다는 것 자체가 녀석의 재능을 증명한다. 하지만 재능이라면 그도 역시 만만치 않다.

할 수 있다.

공이 날아온다.

몸쪽? 바깥쪽? 높은 곳? 아니 어쩌면 낮은 곳.

종잡을 수 없는 그 공을 향해 방망이를 뻗었다.

-딱!!

타구가 저 멀리 파울라인을 넘어갔다.

다시 방망이를 단단히 다잡고 타석에 섰다. 할 수 있다.

몸에 기억된 타이밍에 맞춰 공을 노렸다.

하나.

둘!!

-뻥!!

세······.

-부웅!!

“스트라잌!!”

바깥쪽 높은 코스 빠른 속구.

90.7마일.

아무래도 기합이 잔뜩 들어간 것은 디아고 헤밍턴만이 아닌 것 같았다.

“젠장, 이거 이벤트 전이잖아. 뭐 저리 빡빡하게 구는 거야.”

“그러는 너도 한 방 날려보겠다고 아주 힘이 잔뜩 들어갔잖아. 게다가 너희 쪽 디아고도 만만치 않더만.”

마르타 블랑코의 투덜거림에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답했다. 괜히 한번 투덜거렸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세 번째.

흔들리는 공이 날아왔다.

느리고, 느리고 느리다.

하지만 괜찮다.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다. 극한으로 단련된 마르타 블랑코의 단단한 체간이 그의 스윙을 꽉 잡아주었다. 하지만 문제는 단순히 타이밍만이 아니었다.

대체 어디로 오는가.

성민의 느린 너클볼이 마르타 블랑코의 방망이를 희롱하듯 피해갔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삼구삼진.

성민의 시선이 마르타 블랑코를 스쳐 반대편 덕아웃의 디아고 헤밍턴에게 잠시 머물렀다. 그 빨강머리의 사내 역시 성민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너, 분명 예전에 경기가 무슨 선발끼리 싸우는 것도 아니고 저 녀석은 신경 안 쓴다고 하지 않았었냐? 근데 지금은 아주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것 같구나?

‘물론, 그랬었죠. 근데 그때는 솔직히 제가 좀 딸리는 느낌이 없잖아 있었잖아요. 아무래도 이기기 힘들 것 같다 싶으면 그렇게 넘어가기라도 해야죠.’

-그거 정신승리의 다른 말 아니냐?

‘그래도 정신으로라도 승리한 게 어딥니까.’

성민의 그 뻔뻔함에 필 니크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긴 애초부터 이 녀석은 이런 녀석이었다. 게다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만으로는 만족이 안 된다 그런 이야기로구나.

‘이제 슬슬 감이 옵니다. 컨디션 좋은 날의 저는 컨디션 보통인 날의 디아고보다 좋은 투수예요.’

-그게 지금 자랑이라고 하는 거냐?

‘아까 말씀하셨잖습니까. 저 자식, 지금 기량만 따지면 영감님이 직접 목격한 모든 투수를 통틀어도 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고요. 영감님이 야구를 40년대부터 보셨으니까 라이브볼 시대 거의 모든 투수를 본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중에 손에 꼽는 녀석이면 그냥 말 그대로 야구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을만한 투수라는 소리잖습니까.’

-뭐, 굳이 이야기하자면 그렇게 되겠지.

‘그렇다면 그런 투수에 버금가는 기량 정도면 충분히 자랑할만하죠.’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다.

‘게다가 컨디션 좋은 날의 저 녀석이 저보다 좋은 투수라고 딱히 승부에 질 생각은 없습니다. 녀석은 녀석의 야구가 있고, 저는 저의 야구가 있죠. 그렉 매덕스와 랜디 존슨이 함께 뛰던 시절에는 누구도 랜디 존슨을 그렉 매덕스에 비교하지 않았지만, 결국 랜디 존슨은 그렉 매덕스에 뒤지지 않는 커리어를 쌓았죠.’

-그래서 지금 저 녀석이 그렉 매덕스라면 넌 랜디 존슨이다. 뭐 그런 이야기냐?

‘그것보다 훨씬 낫죠. 전 너클볼 투수니까요.’

-뻐엉!!

“스트라잌!!!”

***

미국에도 올스타 퓨처스 게임은 존재한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이쪽이 원조다. 올스타 퓨처스 게임의 경우 역시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로 팀을 나눠 경기를 치른다.

“언젠가는 나도 저 무대에서······.”

올스타전의 관중석.

루시 알베리가 반짝이는 눈동자로 경기장을 바라봤다. 바로 이틀 전 그는 똑같은 운동장에서 마찬가지로 공을 치고 던지고 잡았었지만, 도저히 그때 그 경기와 지금의 경기를 같은 ‘야구 경기’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최근 몇 달, 이스턴리그에서 한 단계 스텝 업을 했다고 생각해왔다. 실제로 그의 성적을 보면 0.254/0.331/0.373으로 매우 훌륭했다. 물론 숫자만 보면 고작 OPS 0.704가 뭐가 매우 훌륭한 성적이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루시 알베리가 뛰고 있는 이스턴리그는 극심한 투고타저 리그로 올해 리그 평균 OPS가 0.659밖에 안된다. 실제로 이렇게 퓨처스 올스타에 초청을 받았다는 점이 그의 성적이 객관적으로 매우 훌륭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마운드의 성민이 공을 뿌렸다.

이번 시즌 50홈런 페이스를 달리고 있는 로키스의 홈런왕 카를로스 페랄타의 방망이가 허무하게 허공을 휘저었다.

“스트라잌!! 아웃!!”

대단하다.

하지만 너무 당연했다. 그가 기억하는 성민은 저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해내는 투수다.

그리고 마운드에 디아고 헤밍턴이 올라왔다.

루시 알베리의 시선이 그에게 못 박혔다.

지난 4월. 그는 저 투수를 상대해본 적이 있었다.

96마일의 속구는 마이너에서도 볼 수 있다. 좌완으로 100마일을 던지는 괴물도 존재한다. 하지만 저 남자의 속구는 그 질이 달랐다. 어마어마한 힘이 실린 그 속구는 마치 포수의 미트를 뚫고 날아갈 기세로 들어온다.

게다가 그 살벌했던 슬라이더의 각은 알고도 쳐내지 못할 것 같았다. 체인지업? 물론 손도 대지 못했다.

‘하지만 진짜는 역시 커터였지······.’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루시 알베리는 마지막까지 그의 속구와 커터를 구분하지 못했다. 보통이라면 땅볼을 유도하는 공이겠지만 애초에 건드리지도 못했으니 뭐라 할 말도 없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루시 알베리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디아고 헤밍턴의 피칭을 지켜봤다.

하나, 둘, 그리고 셋, 넷, 다섯.

-부웅!!

“스트라잌!! 아웃!!”

하지만 마음속 결과는 1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론 타석에 직접 선 것이 아니니 확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디아고 헤밍턴의 피칭은 아름다웠고 한 단계 스텝 업을 했다고 생각했던 자신은 부족했다.

사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그보다 수준 높은 빅리그에서 뛰는 선수들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투수이며, 빅리그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가락에 꼽을만한 투수다. 굳이 저 투수를 상대로 승부욕을 불태울 필요는 없다. 애초에 빅리그에 머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굳이 저런 괴물들까지 두들길 수 있는 능력까지는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빅리그에서의 한 달.

마지막 성민이 건넸던 이야기가 그의 가슴에 남았다. 저 바다 건너 어떤 유격수의 이야기.욕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항상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한 발 더 멀리 있는 것을 노려야 한다는 그 이야기.

그의 시선이 디아고 헤밍턴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저 자식 오늘 컨디션 아주 죽여주는데요?’

전광판에 97.3이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좌완 투수의 97.3마일. 강속구 투수가 넘쳐나는 현대 야구에서도 흔치 않은 구속이다. 이건 디아고 헤밍턴도 오늘 딱 2이닝만을 소화하기에 가능한 퍼포먼스다.

-컨디션 보통인 날의 저 녀석보다는 네가 낫다고 했던가?

‘정확히는 컨디션 좋은 날의 저 녀석에게도 딱히 질 생각은 없다고 했죠.’

-저런 괴물한테?

‘어차피 오늘 2이닝씩 던지는 날입니다. 저 녀석이 출루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저도 역시 타자를 안 내보내면 그만이죠.’

과연 누가 저 투수를 공략할 수 있을까?

어쩌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즌을 보냈다는 99년의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

-딱!!

아메리칸리그 올스타팀의 5번 타자.

하락세에 접어든 것이 확실한 37세의 노장.

순수하게 실력만으로 평가했다면 올스타에 선발되기에는 조금 부족했을 Mr. 양키스.

리암 루카스의 방망이가 디아고 헤밍턴의 체인지업을 후려쳤다.

[쳤습니다!! 리암 루카스!!]

[제대로 잡아당긴 타구!! 좌측 담장을!! 좌측 담장을!! 넘어갑니다!! 홈런!! 홈런입니다!! 2회 초 리암 루카스의 선제 솔로 홈런포!! 아메리칸리그 올스타팀이 1점을 앞서 나갑니다.]

성민이 웃었다.

괴물? 역사상 가장 강력할지도 모르는 투수? 그래, 맞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괴물이라고 해도 하락세에 접어든 노장의 방망이에 홈런을 허용하는 것이 야구다.

야구공이 미트에 꽂히기 전까지는, 방망이를 휘두르기 전까지는, 날아간 타구가 글러브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무도 결과를 알 수 없다.

마운드의 빨강머리가 바닥을 걷어찼다.

평소 가정적이고 순박한 그 모습을 떠올리기 힘든 난폭함. 하지만 그 난폭함은 그의 피칭을 무너트리지 못했다.

97.7마일.

한층 더 빠른 속구가 미트를 꿰뚫었다.

두 타자 연속 삼진.

성민의 차례가 돌아왔다.

선두타자를 상대로 초구 내야 뜬공.

산뜻한 출발이었다.

그리고 타석에 5번 타자가 들어왔다.

아메리칸리그 올스타팀에 Mr. 양키스 리암 루카스가 있다면, 내셔널리그 올스타에는 이 남자가 있다.

캡틴이라는 호칭이 그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LA 다저스의 중심.

케빈 체임벌린.

필 니크로가 입을 다물었다.

평소라면 ‘방심하지 말아라’ 정도의 잔소리를 할 법도 했지만, 지금은 굳이?

그는 이미 아메리칸리그 최고의 투수였으며 그가 목격했던 모든 투수 가운데 정점을 다툴만한 투수를 자신의 사정권에 넣고 있는 남자였다.

19세기 말인지 20세기 초인지 알 수 없는 언젠가.

누군지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최초의 너클볼을 던진 이래. 1938년 최초의 전문 너클볼 투수인 더치 레오나드가 존재했으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너클볼 투수였던 필 니크로 본인이 있었다.

그 누구도 필 니크로가 너클볼 그 자체였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렇게 단언할 자격이 있었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너클볼 투수 가운데, 지금 이 자리에 선 남자보다 더 강력한 투수는 없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너클볼 투수의 공이 두둥실 떠올랐다.

< 괴물들(2)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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