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204화 (205/287)

< 괴물들(1) >

MIT에서 실시한 최근의 연구 결과가 하나 있다.

미국 내의 백인 여성이 다른 인종에게 백인 남성과 동등한 매력을 느끼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가 하는 부분이었다.

결론 부분부터 말하자면 평균적으로 동양인 남성이 백인 남성보다 연봉이 31만 달러가 높으면 백인 여성은 동등한 수준의 매력을 느꼈다.

같은 조사에서 키가 150cm 미만인 남성의 경우 약 17만 달러를 더 벌어야 동등한 수준의 매력을 느낀다는 점을 고려할 때, 미국의 백인들이 동양인 남성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갖고 있는지는 명백했다.

물론, 이런 이미지를 가진 것은 백인만이 아니었다. 크게 백인, 히스패닉, 흑인. 심지어 같은 동양인까지도 그랬다. 이 네 가지로 분류된 인종군에서 다른 모든 인종의 여성들은 같은 인종에 대한 선호가 더 높았는데, 오직 동양인 여성만은 같은 인종에 대한 선호가 1위가 아니었다.

또한, 다른 모든 인종들 역시 동양인 남성을 가장 매력적이지 않은 인종이라고 평가했다.

‘재밌기는 한데 남자친구로는 별로?’

‘조금 게이 같아요.’

‘아시안은 섹시하지 않잖아요.’

즉, 동양인 남성은 미국 사회에서 연애에 있어서 가장 큰 약자다.

그렇기에 헐리웃 오브 라이프의 그 장면은 아주 큰 충격이었다. 허버트 로렌스라고 하면 성공한 백인 남성의 표본 같은 남자였다. 그는 부유하고 인기 있고 잘생긴 금발이다.

그런 남자가 무려 2시즌에 걸쳐 꾸준히 찝쩍거리던 여성의 남자친구라고 동양인이 떡 하니 등장한 것이다.

물론 성민이 등장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이 모두 인터넷을 통해 그런 정보들을 미리 접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터넷을 통한 정보교류가 느린 사람들 대부분은 조금 더 ‘보수적인’ 사람들이었다.

“뭐야?”

“조이 남자친구 있다는 게 진짜였어?”

그런 사람들 눈앞에 성공한 백인 남자의 구애를 꾸준히 거절하던 여성의 남자친구랍시고 젊고 배고픈 동양인 남성이 나타났다.

물론 현실의 성민은 허버트 로렌스에 못지않은 부자였지만, 극 중에서의 성민은 아직 마이너에서 잼이나 바른 빵을 먹는 가난한 마이너리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드라마를 보는 모든 시청자가 성민을 보는 순간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허버트 로렌스는 가장 인기 있는 백인 남성이었다. 40대 초반에 성공했으며 잘생기고 매력적인 남자다. 심지어 연예인답게 철저하게 관리받은 외모는 몸매부터 피부까지 평범한 40대 남성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째서 조이 제임슨이 허버트 로렌스의 구애를 거절했는지를 단박에 이해했다.

194cm. 97kg.

길쭉한 팔다리와 진짜 운동으로 단련된 건장한 체격. 완벽하게 털 하나까지 관리된 허버트 로렌스의 그것과는 다른 야성적인 젊음이 물씬 풍겨났다.

그 순간, 사람들은 머릿속에서 ‘동양인은 이렇다. 혹은 동양인은 저렇다.’라는 편견을 도저히 남겨둘 수 없었다. 그것은 그들이 생각해왔던 전형적인 동양인과는 너무 달랐다.

스크린에 성민이 잡혔다. 그가 어깨에 매고 있던 더플백을 털썩 내려놓고 양팔을 벌려 큰 소리로 조이를 불렀다.

그 표정이, 그 목소리가. 정말 오랜 시간 만에 사랑하는 연인을 만난 그 얼굴이.

-지금 라이프 오브 헐리웃에 저 남자 누구야?-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앞선 장면에서 슬쩍슬쩍 지나갔던 것 같은데?-

-여기 허버트 로렌스랑 투샷으로 찍힌 장면도 있다.-

-맙소사. 뭐야? 이게 진짜 허버트라고?-

-허버트가 늙긴 늙었구나.-

-이 남자, 김성민이잖아. 작년에 LA 다저스에서 뛰었던 보스턴 레드삭스의 에이스.-

-보스턴 레드삭스? 아, 그 야구팀?-

-난 거의 다 알 줄 알았는데. 보스턴 지역에서는 드라마 출연 예정돼있다고 기사도 뜨고 했었는데 몰랐던 사람이 많았구나. 올해 서른둘이고 한국에서 온 투수야. 작년에는 LA다저스에서 뛰었었지.-

-뭐야? 이 얼굴로 나이가 서른둘이나 됐다고?-

-난 진작에 팬이었어. 특히 저 손가락. 너무 섹시하지 않아?-

-게이도 아니고. 남자가 손가락이 너무 곱상한데? 얼굴도 솔직히 좀 계집애 같잖아.-

-무슨 헛소리지? 지금 저 몸을 보고도 그런 이야기가 나와?-

SNS를 폭발시키고, 폭발한 SNS가 기사로 번지고. 그 기사들이 다시 SNS를 점화시키는 선순환.

그 속에서 2034년 메이저리그 올스타 브레이크가 시작됐다.

***

“오래간만이야.”

성민의 인사에 디아고 헤밍턴이 반갑게 달려와 성민을 끌어안았다.

“성민, 너 요즘 너무 잘나가는 거 아니야?”

“잘나가다니. 지금 압도적으로 양대 리그 승률 1위를 찍고 있는 팀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그거 말고.”

“아, 드라마 말하는 거구나.”

“그래, 덕분에 제시랑 릴리도 너 한 번 초대하라고 아주 난리다. 그나마 스텔라는 아직 어려서 뭘 모르니 다행이지.”

LA 다저스의 에이스 디아고 헤밍턴의 투덜거림에 성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부러우면 너도 드라마 하나 출연하든지. 원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그렇기는한데, 난 너처럼 그렇게 할 자신은 도저히 없네. ‘조이!! 조이 제임슨!!’ 크, 근데 너희 진짜 사귀는 거 맞지? 제시가 꼭 물어보라고 그러던데.”

“글쎄다.”

“아, 비싸게 굴지 말고.”

“그것보다 초대라니? 오늘 경기 끝나고 보면 되는 거 아니야? 아 설마 이번에는 같이 안 온 거야?”

“어, 스텔라가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지금은 좀 괜찮아졌다는데, 그래도 아직 아기니까 조심해야지. 그래서, 너랑 조이는 대체 무슨 사이야?”

***

“나쁘지 않은 관계지.”

“나쁘지 않은 관계? 그게 대체 무슨 헛소리야?”

자신을 추궁하는 친구를 향해 조이 제임슨이 그냥 웃었다.

“하긴, 요즘 남자 놈들이 다 그렇지. 돈 많고 여유 있으면 그냥 즐기려고만 하지 진짜 사랑을 모른다니까. 망할 자식들.”

“뭐, 서로 너무 바쁘니까. 난 나대로 바쁘고, 성민은 야구 선수라서 더 바쁘고. 그거 알아? 야구 선수는 1년 중에 8개월을 주 6일씩 출근을 한다? 게다가 비행기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느라 한 도시에 일주일 이상 머무르는 때가 별로 없어.”

“계속 들어보니까 그거 바람피우기 딱 좋은 조건인데?”

“글쎄다.”

슬쩍 시선을 돌리는 조이에게 친구가 바짝 다가갔다.

“너 대충 보니까 지금 마음이 확 기운 것 같은데. 내가 아주 불안해 죽겠어. 이거 그냥 생긴 거랑 다르게 순둥순둥해서 또 당하기만 하겠네.”

“에이, 순둥순둥이라니 나도 그 정도는 아니다.”

“이년아. 네 예전 연애들을 좀 생각해봐. 내가 이런 말 안하게 생겼나.”

“뭐가? 내가 뭐 어때서. 난 그때 그때마다 최선을 다해서 열정적으로 사랑을 했던 거야. 후회는 없다!!”

“그래, 넌 후회가 없겠지. 근데 그걸 그냥 라이브로 지켜봤던 내 인생은 막 후회가 되거든?”

***

다저스의 옛 동료들 가운데 내셔널 리그 올스타로 참가한 선수는 무려 다섯 명이나 됐다. 이번 시즌에도 그들은 양대 리그 통합승률 1위를 기록하며 쭉쭉 달려 나가고 있었다.

1회 초.

내셔널리그 올스타의 마운드에 디아고 헤밍턴이 섰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1번 타자로 나선 양키스의 에노모토 코이치가 깔끔하게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저 녀석이 올해로 27살이었던가?

‘네. 그렇죠.’

만 27세.

육체적으로 절정기에 이르는 나이다.

게다가 1회 초, 이벤트 경기인 올스타전임에도 불구하고 96.8마일짜리 강속구를 집어넣는 승부욕. 그의 유일한 약점으로 꼽혔던 큰 무대에서 약하다는 부분도 작년 월드시리즈를 재패하며 쏙 들어갔다.

10년을 한 세대로 봤을 때, 이 세대 최강.

20년을 한 시대로 본다면 이미 시대의 지배자로 꼽힐 수 있는.

그리고 100년을 하나의 역사로 본다면 역사에 이름을 새길 가능성이 농후한.

2034년의 디아고 헤밍턴은 어느새 한단계 더 대단한 투수가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타자를 압도하는 피칭.

-딱!!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직접 상대해봤기에 알고 있었다. 지금 타석에 선 타자인 로버트 네일러가 얼마나 대단한 타자인지. 디아고 헤밍턴과 마찬가지로 27세에 브레이킹 시즌을 맞이한 그는 이번 시즌 아메리칸리그의 강력한 MVP 후보 중 하나였다. 비록 토론토가 타자구장이라고는 하지만 올스타브레이크 이전까지 29개의 홈런을 쳤다는 것은 절대 무시할 수 있는 기록이 아니다.

[높게 뜬 타구!! 내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런 로버트 네일러 조차 초구 내야뜬공으로 허망하게 물러났다.

그리고 들어선 타자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가장 강력한 타자인 랄로 가야르도.

-부웅!!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공격적인 부분에서는 거의 완성에 가까운 녀석이다. 하지만 디아고 헤밍턴의 피칭은 그런 랄로 가야르도를 농락했다.

몸쪽 높은 속구. 떨어지는 커브. 그리고 존을 살짝 벗어난 슬라이더와 속구. 마지막 뚝 떨어지는 커브까지.

랄로 가야르도가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대단하군. 내가 직접 본 괴물 중에서도 저 녀석에 필적할만한 녀석은 몇 되지 않는다.

그가 직접 눈으로 봤던 많은 전설적인 투수들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샌디 쿠팩스, 스티브 칼튼, 드와이트 구든, 페드로 마르티네즈, 밥 깁슨, 로저 클레멘스, 그랙 매덕스, 랜디 존슨, 클레이튼 커쇼, 맥스 슈어저.

메이저리그의 긴 역사 속에 빛나는 이름들.

하지만 그들 가운데서도 지금 저 마운드에서 공을 뿌리는 199cm에 117kg짜리 주근깨 가득한 빨간 머리투수를 능가하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전 제가 직접 본 괴물 중에서는 최고 같은데요?’

-그래서, 무서우냐?

성민이 웃으며 답했다.

‘그럴 리가요.’

작년 올스타전에서 성민은 3회에 마운드에 올라갔었다.

‘올스타전에 나갔다는 것이 중요하지, 등판 순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라는 말이 꼭 틀린 것은 아니다.

사실 3회에 나가나 4회에 나가나 7회에 나가나 별 차이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선발.

그래, 선발만큼은 다르다. 어떻게 보면 가장 먼저 마운드에 서는 단순한 보직이지만, 가장 좋은 투수가 선발로 서야 한다는 이념이 160년 가깝게 존속된 이상, 이벤트 전이라고 해도 선발은 단순히 가장 먼저 마운드에 서는 투수가 아니다.

리그 최강.

단순한 말이지만, 이것은 사나이의 피를 끓게 만드는 그 말의 증명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2034년 7월의 올스타전.

‘아쉽게도, 전 제 플레이를 비디오로만 봤지 직접 본 적이 없어서 말이죠. 이 시대의 괴물 중에서 누가 진짜 최고인지는 겨뤄봐야 알 것 같네요.’

성민의 그 거만한 이야기에 필 니크로가 기꺼이 웃었다.

아메리칸리그 올스타의 마운드.

2034년 아메리칸리그에서 가장 강력했던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갔다.

본인 역시 앞선 괴물에 못지않은 괴물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 괴물들(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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