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강(4) >
트레이드가 늘 그렇듯 보스턴의 라커룸이 한 차례 크게 변화했다.
당연한 일이다. 새로운 선수가 온다는 것은 기존의 선수 누군가가 빠져야 한다는 뜻이다. 하물며 이번에는 트레이드되어 오는 선수의 숫자가 무려 넷이었다.
게다가 아직 DL에서 복귀하지 않은 바그너 가이탄과 작년 1라운드인 로버트 보일이 탬파베이로 이동한 관계로 보스턴의 25인 로스터에서 트레이드로 빠지는 선수는 한 명도 없다.
당장 라만 그레고리와 브라이언 보일만 하더라도 선발 투수 중에서 성민을 제외하면 그들보다 나은 투수는 없다. 스캇 모스와 태너 뱅크 역시 마찬가지다. 보스턴의 마무리인 릭 코디노리 조차도 태너 뱅크보다 나은 투수라고 이야기하긴 힘들었고, 스캇 모스만 하더라도 루카스 버튼 정도를 제외하면 그보다 나은 불펜이 없다.
12명의 투수 가운데 4명이 25인 로스터에서 빠져야 한다는 뜻이다.
25인 가운데 4인.
12명 가운데 4명.
매우 높은 비율이다. 이 정도면 거의 집단 내에 집단이 들어왔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분위기 좀 뒤숭숭해지겠는데?”
“응? 뭐가?”
“투수의 1/3이 바뀌는 거잖아. 뭐, 투수야 야수처럼 조직력이 중요한 집단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좀 분위기 뒤숭숭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어? 게다가 한 번에 4명이 그렇게 들어오면 자기들끼리 좀 뭉칠 수도 있고 말이야.”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우려를 표했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긴 하다만······.
필 니크로가 고개를 저었다.
-네 녀석이 있는데 그런 꼴이 나올 리가.
성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세,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긴 하겠지. 하지만 네 이야기처럼 우리 투수잖아. 뭐, 좀 뭉쳐봤자 경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팀 분위기야 너랑 내가 하기 나름아니겠어? 우리 2월에 그 개판 같았던 분위기도 이렇게 수습했잖아.”
“하긴. 그건 또 그렇네.”
“그냥 이번에 새로 오는 애들 때문에 내려가는 애들. 그리고 걔들이랑 친하게 지냈던 애들이나 좀 다독여줘. 괜히 날 세우게 두지 말고. 애들이 아직 어려서 이런 거 익숙하지 않은 애들도 많잖아. 프로는 다 이런 거라는 거 잘 모르는 애들.”
“그 부분은 난 다른 애들이야 그렇다 치고 맥스가 제일 걱정이다. 그 녀석이랑 친하게 지내는 루카스야 뭐 원체 똑똑한 애니까 알아서 할 것 같은데. 본인이 상처를 크게 받지 않을까? 더군다나 그 녀석 빅리그 콜업 이후로 아직 마이너 내려가 본 적 없잖아.”
“그 부분은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될거야. 안 그래도 미리 이야기를 좀 해뒀거든.”
“이야기?”
***
“괜찮아?”
“어? 뭐, 어쩔 수 없지. 지금 선발 중에서 마이너 옵션 남은 투수는 나밖에 없잖아.”
생각보다 훨씬 담담한 맥스 슈피겐의 이야기에 루카스가 살짝 놀랐다. 본래 녀석의 성질머리대로라면 노발대발해서 아주 난리를 피우는 것이 보통일 텐데 말이다.
“무엇보다 내가 더 잘 던졌더라면 애초에 이런 일도 없었을 거잖아. 어중간하게 서너 번째 즈음하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착각이었다.
녀석은 담담한 것이 아니었다. 맥스 슈피겐은 지금 그 어느 순간보다 격렬하게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단지 그 타는듯한 분노를 격렬한 표현이 아닌 강력한 다짐으로 변환하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성민이 그러더라고. 만약 올해 우리가 달릴 생각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나는 남을 수 있었을 거라고. 미래에는 내가 더 좋은 투수가 될 거라는 기대감을 갖고 말이야. 하지만 우리는 당장 우승을 노리고 있고, 그런 미래의 기대 따위는 전혀 고려할 요소가 아니라잖아.”
“맥스······.”
“너무 그렇게 보지마. 우리는 진지하게 우승을 노리는 팀이고 거기서 중요한 건 결국 ‘지금의 실력’이잖아. 설사 1,000만 달러쯤 낭비하는 결과가 되더라도 압도적인 실력의 선수가 있다면 얼마든지 지명 할당해버릴 수 있는 게 지금 우리 팀이잖아. 안 그래?”
포기하지 않았다.
팀이 우승을 노리는 이상 마이너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다시 빅리그로 콜업될 수 있다. 설사 옵션이 없는 선수를 큰 손해를 보고 지명 할당하더라도.
“그러니까 난 괜찮아.”
평균 자책점 5점 중반대. 최악의 타고투저가 진행 중인 AAA 인터내셔널 리그.
맥스 슈피겐이 포투켓으로 향했다.
***
연습용 마운드.
-뻐엉!!
태너 뱅크의 속구가 미트를 두들겼다.
97.6마일.
좌완이라고 믿기 힘든 강속구였다.
게다가 구위 역시 매우 훌륭하다. 마치 공이 붕 떠서 날아오는 것 같은 높은 종 무브먼트. 속구 하나만으로도 A급으로 분류해도 괜찮을 구위다. 심지어 거기서 끝이 아니다.
-뻐엉!!
86.4마일의 횡 슬라이더. 구속 차이는 크지만 무브먼트가 어마어마하다. 마음에 드는 공을 보여주는 것은 태너 뱅크만이 아니었다.
익히 알고 있던 라만 그레고리도, 작년에 활약이 혁혁했던 스캇 모스도 상당히 괜찮은 피칭을 보여주었다.
무엇보다
-뻐엉!!
“굿볼!!”
최근 결과가 그리 좋지 못했던 브라이언 보일은 대체 왜 최근 성적이 별로였는지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공을 보여줬다.
“이거 기대한 것보다도 볼이 훨씬 좋은데요?”
“당연하지. 저 넷 합쳐서 연봉만 거의 5천만 달러야. 이 정도면 우리 팀도 이제 사치세 라인 아슬아슬하다고. 어쩌면 살짝 넘어갈지도 모르지. 이거 위에서도 마음을 아주 단단히 먹었어.”
최근 몇 년.
솔직히 말해 코치진 입장에서는 딱히 부담이 없었다. 애초에 선수단 구성 자체가 성적을 기대하는 구성이 아니었다. 그저 욕을 최소한으로 들어가며 꾸역꾸역 버텨보겠다는 모양새였다. 물론 그건 그거대로 힘들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패를 들고 게임을 하는데 패배한다고 욕먹는 것이 편할 리는 만무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열정적으로 밀어주니 그건 또 그거대로 부담스럽다. 이전에야 선수단이 엉망이니 이길 수 없었다는 변명이라도 된다. 헌데 이런 지원을 받아가면서는 그것도 힘들다.
“그냥 애들끼리 부딪히지 않도록 조율만 좀 잘 해주자고. 알잖아. 우리 애들 조금 유난스러운 거.”
“아무래도 자기들끼리 마이너부터 지지고 볶으면서 올라온 애들이 워낙 많으니까요.”
“그래, 그런 애 중에는 자기 동료가 쟤들 때문에 밀려서 내려갔다고 생각하는 녀석들 분명히 있을 거야. 뭐 머리로는 아닌 걸 알아도 감정적으로는 그런 애들도 있을 거고.”
그렇기에 새로운 선수들이 온전히 보스턴의 전력으로 더해지는 것은 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들 역시 최근 보스턴의 기세가 무언가 특별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물을 끓게 하는 것은 마지막 1도씨의 열기이고 물을 얼게 하는 것은 마지막 1도씨의 냉기이다.
수면 아래 무언가가 부글거리는 지금. 저 네 명의 투수가 무사히 합류할 수만 있다면 저들은 그 마지막 1도씨가 되줄 수 있을 것이다.
***
스캇 모스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전체적으로 젊은 팀. 대충 견적이 나온다.
무엇보다 무려 넷이나 되는 투수가 한 번에 들어왔다. 2, 3선발이 거의 확실한 선발 투수. 당장 마무리를 해도 괜찮을 불펜. 그리고 스캇 모스 자신도 이 팀의 불펜 상황을 생각하면 매우 준수한 투수다.
‘이거 이 정도면 우리가 굳이 약하게 나갈 필요가 없겠는데?’
보스턴의 기존 투수들을 대충 분석했다.
여기서 언터쳐블의 위상을 가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성민이다. 만약 성민이 투수진 전체를 규합해서 이끌어나가는 분위기였다면 사실 이런 생각도 할 것 없어 얌전히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성민은 투수들과 딱히 적극적인 교류를 하지 않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방관자에 가깝다. 듣기로는 이번에 마이너에 내려간 맥스 슈피겐이라는 녀석 정도만이 성민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저 친구를 우리 그룹에 넣어서 전체를 이끌어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설사 성민을 그룹에 포함시키지 못하더라도 상관없다. 열두 명의 투수. 그 가운데 네 명. 한 명의 절대적인 에이스가 방관자라면 2선발과 3선발. 그리고 마무리와 승리조의 불펜 하나. 거기에 몇몇 떨거지만 더 합류시키면 이쪽이 오히려 주류다.
스캇 모스가 슬쩍 성민에게 다가왔다.
“이야기로만 들었는데, 직접 보니 공이 더 좋던데? 아, 난 스캇. 스캇 모스라고 해.”
“김성민.”
스캇 모스가 내민 손을 성민이 맞잡았다.
“아, 괜찮으면 혹시 오늘 저녁 어때? 내가 보스턴은 몇 번 안 와봐서. 괜찮은 식당을 알고 있다면 좀 소개받고 싶은데 말이야. 물론 저녁은 내가 사도록 할게.”
“그럴 필요 없다. 멀리까지 왔는데 내가 대접하도록 하지. 너 말고 마이애미에서 함께 온 사람이 저기 태너 뱅크 맞지?”
“어.”
“그 친구도 그러면 함께 불러. 탬파베이에서 온 애송이들이야 어차피 보스턴을 나보다 더 잘 알 테니 굳이 부를 필요는 없겠지.”
성민의 이야기에 스캇 모스가 잠시 당황했다.
생각보다 훨씬 적극적이다. 하지만 이내 납득했다. 이번 트레이드 직전까지 맥스 슈피겐이라는 애송이 녀석과만 친하게 지냈다고 들었다. 아무리 남들과 교류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 성격이라고 해도 아예 홀로 떨어지는 것을 원할 리는 만무하다.
크게 번잡스럽지 않은 둘 정도. 성민이 원하는 범위일 것이다. 이왕이면 탬파베이에서 함께 온 라만 그레고리와 브라이언 보일을 함께 데려가면 더 좋겠지만, 그래도 나쁠 것은 없다.
그들이야 얼마든지 따로 친해질 수 있다. 이미 단단하게 결속된 보스턴의 기존 선수들보다 자신들이 편한 것은 그들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래, 좋아.”
스캇 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
모두가 기존 선수들의 텃세를 걱정할 때.
성민은 그 너머를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넷이 아니라는 정도네.”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넷이 아니라니요?”
카테고리는 매우 강력하다.
본래라면 아무 상관이 없는 것조차도 같은 카테고리로 묶이는 순간 무언가 이해할 수 없는 끈끈함이 생긴다. 환경이 가혹하면 가혹할수록 더하다. 괜히 만리타향에 오면 같은 고향 출신이라는 것만으로 절친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근데 사실 이걸 자세히 따져보면 정말 별거 아니란 말이지. 게다가 이 카테고리라는 놈은 정말 웃겨서 같은 카테고리 내에서도 다시 카테고리를 나눌 수가 있어요.”
“아니, 그러니까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정확히 말하자면 탬파베이에서 건너오는 네 명의 투수가 아니야. 둘은 탬파베이 소속, 둘은 마이애미 소속이지. 물론 그냥 내버려 두면 그들끼리 똘똘 뭉칠 수 있어. 하지만 그건 애초에 그런 기회를 안 주면 그만이거든.”
지난 스프링 트레이닝.
성민은 루카스 버튼에게 맥스 슈피겐을 내버려둘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지금.
성민이 루카스 버튼에게 요구한 것은 정확히 그 정반대의 일이었다.
성민이 스캇 모스와 태너 뱅크를 데리고 사라진 직후
루카스 버튼이 브라이언 보일에게 다가갔다.
***
한순간의 화학작용이 일어나기까지 필요한 것은 단 1도씨의 변화였다.
그리고 성민은 그 1도씨의 변화에 해가 되는 것을 허락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러니까 애초에 그런 꼴이 나올 리가 없었다니까.
2034시즌의 6월.
26승 29패를 기록하던 보스턴이 달리기 시작했다.
< 보강(4)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