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99화 (200/287)

< 보강(1) >

애너하임으로 향하는 비행기.

보스턴의 젊은 선수들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야, 너 그거 아냐? LA 에인절스. 사실은 LA팀이 아니다?”

“에이, 그게 무슨 소리야.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가 로스앤젤레스 팀이 아니라니. 로스앤젤레스 팀도 아닌데 왜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라는 이름을 쓰겠어. 애초에 팀 이름 부터가 에인절스잖아. 그거 로스앤젤레스에서 따온 이름 아니야?”

“그건 잘 모르겠고, 에인절스는 로스앤젤레스가 아니라 애너하임에 있어.”

“애너하임?”

“로스앤젤레스랑 구분되는 도시야. 디즈니랜드 있는 곳.”

“아!! 그래? 근데 왜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라고 이름 붙인 거지? 혹시 카운티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라서 그런가?”

“아니, 카운티도 오렌지 카운티더라.”

“신기하네.”

“그러니까.”

애너하임 에인절스가 LA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으로. 그리고 다시 LA 에인절스로 이름을 바꾼 지도 벌써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이제 막 자라나는 20대들은 대체 왜 애너하임에 위치한 에인절스가 LA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할 만큼 긴 시간이다.

-뭐, 이야기하자면 긴 이야기지. 그러니까 이게 애너하임 시와 디즈니의······.

‘괜찮습니다. 나중에 궁금하면 그냥 인터넷에서 찾아볼게요.’

-아니, 그래도.

성민이 필 니크로의 말을 막았다. LA 에인절스의 유래 따위 어차피 굳이 들을 필요도 없는 긴 이야기다. 뭐 대충 춘천이나 홍천 같은 도시에 있는 팀이 인구수 많은 지역 팬의 유입을 위해서 ‘경기 ㅇㅇㅇ’ 같은 이름을 쓴다 정도겠지.

그보다 중요한 것은 LA 에인절스의 현재 전력. 그리고 성민이 상대해야 하는 선수들이 어떤 선수들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래도 대부분 작년에 한 번은 상대해봤던 애들이네요.’

-그리고 그건 바꿔말하자면 걔들도 너를 한 번은 상대해봤다는 의미겠지.

LA 에인절스는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소속이다. 하지만 작년 성민이 있던 다저스와는 매년 프리웨이 시리즈라는 라이벌 매치를 하는 팀이기도 했다. 덕분에 작년 성민 역시 에인절스를 상대로 한 경기를 등판했었다.

당시 성적은 6이닝 1실점으로 무난한 승리.

‘뭐, 기껏해야 한 경기였죠. 게다가 저도 작년보다 더 괜찮아졌잖아요?’

-하지만 니 뒤를 지키는 녀석들이 작년보다 심각하게 형편없어졌지.

‘그거야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요.’

그렇게 필 니크로와 가벼운 농담 따먹기를 하며 산타나 존 웨인 공항에서 바로 버스를 탔다.

“성민 오늘 저녁 어때? 근처에 타이 푸드 잘하는 레스토랑이 있다는데?”

“이봐, 맥스. 너도 이제 생각이라는 걸 좀 해라. 성민은 오늘 바쁘잖아.”

“뭐가? 왜?”

루카스 버튼이 성민에게 저녁을 권하는 맥스 슈피겐을 끌고 갔다. 성민 역시 그냥 어깨를 한 번 으쓱할 뿐 딱히 뭐라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애너하임이 LA는 아니다.

행정구역으로 따져도 로스앤젤레스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애너하임은 오렌지 카운티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어차피 LA에서 애너하임까지는 차로 1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조이 제임슨이 충분히 차를 몰고 찾아올 수 있는 거리라는 뜻이었다.

“성민!!”

조이 제임슨이 성민에게 손을 흔들었다. 비수기라서 살짝 살이 찌긴 했지만, 평소 워낙 마른 탓에 딱 보기 좋은 모습이었다.

그녀가 다정하게 달려와 성민의 팔에 살짝 매달렸다. 성민 역시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그녀의 머리를 몇 차례 쓰다듬었다.

두 사람이 다정한 모습으로 귓속말을 주고 받았다. 그야말로 오래간만에 만나 사랑을 속삭이는 서로 죽고 못 사는 연인이다.

‘몇이나 돼?’

‘내가 확인한 것만 셋.’

‘일단 이동하자. 차 선팅 상태는 괜찮아?’

‘나쁘진 않은데 요즘 카메라가 너무 좋아서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물론 소곤소곤 주고 받는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는 아니었다. 성민의 시선이 은근하게 주변을 훑었다. 파파라치 놈들. 정말 잘 숨긴 잘 숨었다. 최소한 셋이라는 것을 알고 살펴도 그의 눈에 보이는 건 둘밖에 없다.

“자기, 급하게 오느라 목 마르지.”

“어?”

조이 제임슨이 갑자기 쌩뚱맞게 자신의 가방에서 음료수를 하나 꺼냈다. 성민이 마실 리 만무한 탄산음료다.

‘야, 너!!’

‘걱정하지 마. 다 따라내고 물 담은 거야. 로고만 잘 보이게 들고 마셔. 나도 저번에 네가 협찬받은 차 광고한다고 온종일 차만 타고 다니는 거 협조했잖아.’

조이 제임슨이 웃는 얼굴로 병을 따서 성민에게 건넸다. 이미 따져있던 병이지만 마치 지금 따는 것처럼 리얼한 연기까지 해가면서 땄다. 확실히 전문 연기자는 전문 연기자다.

성민과 조이가 나란히 음료를 마시는 사진이 실시간으로 SNS에 올라갔다. 단순히 SNS에 팔로워가 많은 것만으로도 각종 협찬부터 광고의뢰가 들어오는 세상이다. 이렇게 화제를 모으는 커플이 파파라치샷에 찍히는 건, 어쩌면 드라마에 PPL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큰 홍보효과를 갖는다. 아무래도 현실에서 진짜 마신다는 것은 그만큼 더 진실되게 보이기 때문이다.

‘저녁은?’

‘이번에 허머슨 그룹에서 새로 런칭한 프랜차이즈가 있어. 거기로 가자.’

이런저런 각도로 충분한 사진을 찍혀준 두 남녀가 차로 쓱 들어갔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는 법. 조이 제임슨이 몰고 온 차는 평소 그녀가 몰고 다니는 차가 아니었다.

한국을 지배하는 유명 브랜드의 차량이다. 성민은 이 차량 브랜드와 계약을 맺고 협찬과 CF를 찍는 대신 다른 브랜드의 차를 타고 다니는 장면을 절대 노출하지 않도록 계약을 맺었다. 조이 제임슨과 함께 차를 타는 장면을 노출하는 것은 옵션 계약으로 들어가 있었는데 이것 역시 만만한 금액은 아니었다.

성민은 이 차량 회사에서 받는 금액만 연간 250만 달러에 달한다.

“후, 좀 살 것 같네.”

“그래도 너무 방심하지 마. 나도 예전에 선팅된 차량이라고 안심했다가 이상한 사진 인터넷에 나돈 적 있으니까.”

“오케이. 그나저나 잘 지냈어? 뭐 새로운 사건 같은 건 없고?”

“영화 제의 하나 들어왔었는데 망했어. 제니퍼가 하기로 했다네. 뭐 표면적으로는 오디션을 보자느니 어쩌느니 하지만, 누가 봐도 제니퍼 쓰겠다는 소리지 뭐. 젠장. 영화 하나 말아먹었다고 취급이 아주 거지 같아.”

자율주행 목적지를 설정한 조이 제임슨이 불평을 늘어놓으며 차에 비치돼있던 초콜릿을 하나 입에 넣었다. 단순히 비수기라 살이 조금 찐 줄 알았는데, 그보다는 스트레스 탓이 큰 것 같았다.

“괜찮아. 어차피 지금 드라마 두 달 정도 남았잖아. 요즘 반응도 괜찮고, 피날레만 따지자면 거의 너를 위한 피날레에 가깝잖아. 그거까지 하고 나면 반응 확 달라질 거야. 영화야 그 이후에 찍으면 그만이지.”

“그럴까?”

“그래, 그러니까 스트레스받지 말고. 초콜릿도 그만 먹고. 곧 밥 먹을 건데 괜히 입맛 떨어지겠다.”

여러 가지 부분에서 사업적인 관계가 우선시되고 있긴 했지만, 성민과 조이는 기본적으로 제법 맞아 들어가는 파트너였다. 무엇보다 최초의 만남이 비즈니스가 아닌 나름대로 스파크가 파파밧 튀는 만남이었다는 점이 주효했다.

물론 처음 성민은 그녀의 유명세를 적당히 이용해보고자 하는 마음도 상당히 컸지만, 이후 만남을 거듭할수록 조이 제임슨이라는 여성이 점점 인간 자체로 괜찮다고 생각하게 됐다.

-유유상종이라 이거지.

‘조이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시네요.’

-글쎄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민이 자신의 어머니인 권 여사와 비슷한 성격의 여자를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말을 아꼈다. 세상에는 해도 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 법이다. 필 니크로가 보기에 이건 후자였다.

이게 쇼윈도 커플인지, 아니면 진짜 커플인지 아리까리한 두 사람의 데이트가 이어졌다. 그것은 옷 하나를 고를 때도, 사소한 군것질거리를 쥐는 순간에도 여러 가지 사소한 것들을 고려해야 하는 머리가 지끈한 데이트였다.

놀랍게도 보통 사람이라면 다 때려치우고 카메라 없는 곳으로 얼른 들어가자고 소리칠 것 같은 그 데이트를 이 두사람은 진심으로 즐겼다.

그리고 모든 데이트가 끝나고 연인이라면 응당 향해야할 곳으로 향하여 응당 치러야할 행사를 치른 직후 서로의 스마트폰을 꺼내 기사와 댓글들을 읽어가며 때론 깔깔거리고 때론 흥분하여 익명의 대댓글을 달겠다는 것을 서로 말렸다.

“이제 오늘은 등판 준비해야 한다고 했지?”

“어.”

“알았어. 그러면 나는 LA로 잠시 돌아가서 스케줄 소화 좀 하고 내일 경기 보러 올게. 경기 끝나고 잠깐 얼굴 볼 수 있나?”“상황에 따라서. 경기 잘 풀렸으면 괜찮을거고, 아니면 좀 그렇지.”

“오케이. 그러면 일단 스케줄은 경기 잘 풀렸다고 생각하고 맞춰둘게. 경기 끝나고 밤 비행기로 바로 보스턴으로 돌아가나? 아니면 저녁 먹을 시간은 있어?”

“잠깐 저녁 먹을 시간은 있어. 식당 가서 먹기에는 조금 빠듯할 수도 있고.”

“그러면 미리 도시락 준비해둘게. 내일 봐.”

새벽, 호텔 앞까지 자신을 마중 나온 성민에게 키스한 조이가 차를 몰고 사라졌다.

이제 더워지기 시작하는 6월 초.

전국을 떠돌아야 하는 긴 시즌 속에서 성민에게 진정 기쁨을 준 것은 5월 이달의 투수가 아닌 조이와의 데이트였다.

***

“다시 말하지만, 바그너 가이탄과 루시 알베리를 모두 내주는 건 절대 안 돼. 차라리 다른 옵션을 이야기해보라고. 조금은 상식적인 걸로 말이야.”

“그렇다면 매튜······.”

“헛소리하지 말고.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라고 했잖아.”

확실히 바그너 가이탄과 브라이언 보일만 따지자면 바그너 가이탄 쪽이 더 무게감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라만 그레고리가 얹힐 만큼은 절대 아니다.

게다가 보스턴 쪽에서 제시하는 이런저런 선수는 영 구미에 차지 않았다.

“그렇다면 로버트 보일은 어때.”

“로버트? 설마 작년 우리의 1라운드인 로버트를 말하는 건가? 오, 조지. 우리 제발 좀 양심적으로 거래를 하면 안 될까? 그 녀석 루키를 다섯 경기 만에 건너뛰고 바로 하위 싱글A로 올라가서 내는 성적은 보고 이야기하는 거지? 좀 급이 맞는 카드를 들이밀어야지.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힘들어.”

“잠깐, 잠깐만. 그렇게 급하게 나오지 말고. 일단 우리에게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전화기를 내려놓은 그가 잠시 생각했다.

이거 어쩌면 되겠는데?

“만약 우리가 로버트 보일을 데리고 올 수 있다면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다고 보지?”

“로버트 보일이요? 에이, 그 친구는 뭘 희생해도 데리고 올 수가 없죠. 애초에 보스턴이 내놓을 리가 없잖아요. 그 친구 작년 전체 2위 아닙니까.”

“그렇지? 애초에 내놓을 리가 없는 매물이지?”

“당연하죠.”

정상적이라면 절대 내놓아서는 안 될 매물이다.

그래, 정상적이라면.

하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풍경과 객관적인 풍경이 전혀 다르다면? 만약 자신들이 올 해 대권을 잡을 수 있다는 허황된 생각을 하고 있는 머저리들이라면?

어쩌면 미래를 팔아 당장의 1년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보스턴 레드삭스가 가장 필요로 하는 포지션이 어딘지. 그리고 우리 중복자원 중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자원. 아니다. 우리 내야 유망주 중에서 가장 잘 팔릴만한 녀석 리스트 가지고 와봐.”

“네?”

“당장!!”

< 보강(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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