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97화 (198/287)

< 타이밍(4) >

“자네 혹시 미쳤나?”

탬파베이의 단장 조지가 강력하게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저울에 바그너 가이탄을 올린 존 맥도웰이 부른 것은 브라이언 보일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야기의 시작이 됐던 라만 그레고리까지.

아무리 바그너 가이탄이 대단한 자원이라지만 2대1 거래라니. 물론 바그너 가이탄에 다른 이름이 더 붙기는 했다.

“라만 그레고리에 브라이언 보일까지 원하면서 바그너 가이탄과 후안 칼초라니. 그런 걸 원한다면 최소한 바그너 가이탄에 루시 알베리는 저울에 얹어야지.”

“아니, 자네도 이전에 이야기했듯이 두 선수의 공존은 힘들지. 하지만 후안 칼초라면 지금 보시다시피 쏠쏠한 내야 백업이잖나.”

후안 칼초는 30대의 내야 백업. 지금 당장은 쏠쏠하게 써먹을 수 있는 자원이지만 탬파베이에는 맞지 않는 조각이다. 물론 트레이드 칩으로 써먹을 수도 있긴 하다. 하지만 에이스 카드 두 개를 내주는 대가로 트레이드 칩을 가지고 오기에는 여러모로 아쉽다.

“그거야 우리 내야는 보스턴과 상황이 다르잖아. 얼마든지 다른 포지션으로 두 선수를 공존시킬 수 있다고. 라만 그레고리에 브라이언 보일을 원하신다면 바그너 가이탄에 루시 알베리를 저울에 올려놓고 이야기를 시작해야지.”

***

앞서 말한 것처럼 주루 플레이에 능하지는 못했다. 달리기는 빠른 편이었지만 애초에 달리기만 빠르다고 주루를 잘 할 수 있다면, 현재의 메이저 리그 구단들이 단거리 주자들을 대주자로 기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실제로 과거 한, 미, 일 삼국 모두 단거리 선수들을 지명 대주자로 사용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결과는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애초에 베이스와 베이스의 거리는 90피트 27.43미터에 불과하다. 올림픽을 기준으로 할 때 단거리 달리기의 경우 최저가 100미터다. 100미터를 달리는 능력과 90피트를 달리는 능력은 다르다.

그렇기에 현대 야구, 아니 대부분의 현대 구기 종목이 단거리 가속력을 보는 40야드 기록을 살핀다. 게다가 무엇보다 주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슬라이딩’이다. 1루까지 달리는 것은 단순히 발이 빠른 것으로 해결된다. 1루를 밟고 지나가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루와 3루의 경우는 다르다. 2루와 3루는 베이스를 오버 슬라이드 하는 순간 태그 아웃이다. 마지막까지 속도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부상을 피하고 오버 슬라이드 없이 베이스를 터치하는 것은 상당한 기술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재능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노력과 연습이 필요하다.

성민의 경우 바로 그 부분이 부족했다. 애초에 투수가 그런 부분을 연습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작년, 다저스에 있던 시절에는 투수도 타격이 필요했기에 제법 많은 타격 연습을 했다. 하지만 슬라이딩의 경우 최소한의 연습밖에 하지 않았다.

제롬 스튜버츠의 타구는 약했다.

유격수가 달려 나와 공을 잡고 가볍게 이루수에게 건네고 다시 일루로 공을 던져 더블 플레이를 노리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제롬 스튜버츠의 빠른 발은 더블 플레이를 선행 주자 땅볼 아웃 정도로 막아낼 확률이 높았지만.

어쨌거나 성민이 살아나가기는 지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성민의 몸이 날았다.

헤드퍼스트 슬라이딩? 물론 그게 조금 더 빠르다. 하지만 아니었다.

성민은 애초에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연습한 적이 없었다.

왼발을 앞으로 쭉 뻗은 벤트 레그 슬라이딩.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이루수인 숀 힉스가 자신을 향해 날아 올 유격수의 공을 기다렸다.

‘느려!!’

원래대로라면 벌써 공이 들어왔어야 했다. 가볍게 2루 포스 아웃을 시키고 1루에 공을 뿌리면 되는 쉬운 상황이다. 물론 1루에 공을 뿌리는 것을 저 슬라이딩이 조금 방해하긴 하겠지만, 그거야 능숙한 이루수인 숀 힉스에게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성민의 반응과 판단이 생각 이상으로 빨랐다.

스타트를 끊는 속도 자체가 빨랐다는 의미다. 게다가 주루 속도 역시 범상치 않았다. 다저스 같은 괴물들이 모인 선수단 전체를 통틀어 중위권의 주루 속도다. 메이저 전체로 따지면 능히 30% 안에 들어갈 만하다.

물론 단지 그것뿐이었다면 당황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상황 자체가 평범한 유격수 앞 내야 땅볼이었다. 1루 주자가 아무리 빨라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이런 박동엽 같은!!

평소였다면 항상 짜증이 가득할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 그 말을 내뱉는 필 니크로의 목소리에 담긴 감정은 오직 기쁨. 기쁨뿐이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유격수가 공을 더듬었다.

약 0.1초의 짧은 시간.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허둥지둥 던진 공이 이루수의 글러브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공을 받기 위해 무너진 자세.

이루수의 발이 2루 베이스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만약 아웃이었다면 이루수의 송구를 방해했을 왼쪽 발로 베이스를 밟고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1루로 달리는 제롬 스튜버츠를 도울 필요는 없었다.

-뻐엉!!

“세이프!!”

그의 발은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을 만큼 빨랐으니까.

노아웃 주자 1, 2루.

타석에 매튜 쿠퍼가 들어왔다.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연달아 타자를 내보낸 아서 클라크는 흔들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지금이다.

지금이야말로 큰 거 한 방을 날려 줄 타이밍이다.

매튜 쿠퍼가 성민을 향해 ‘내가 편하게 걸어 들어가게 해줄게.’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 눈을 찡긋했다.

초구. 멋지게 떨어지는 커브볼.

매튜 쿠퍼의 방망이가 힘차게 움직였다.

-딱!!

높게 뜬 타구.

그가 성민에게 약속을 지켰다.

아쉬운 점은 지키기는 지켰는데 딱 절반밖에 지키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비록 걸어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편하기는 편했다.

애초에 2루 베이스에서 발을 뗄 필요가 없었으니까.

-어휴, 저 자식은 하여간.

아름다운 영웅스윙이 만들어 낸 큼지막한 외야 플라이가 우익수 콜 그린의 글러브에 가볍게 쏙 들어갔다.

원아웃 주자 1, 2루.

5월 말. 낮 최고 기온 30도를 오가는 애틀랜타.

이제 서산에 걸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태양이 슬슬 따갑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피칭 때 쓰는 야구모자와 다르게 단단한 플라스틱 헬멧이 영 거슬린다.

필 니크로가 투덜댔다.

-이거 이렇게 개고생해놓고 점수 못 내면 나가리인데.

‘잘하겠죠.’

그리고 타석에 3번 타자인 랄로 가야르도가 들어왔다.

가벼운 연습 스윙.

그리고 초구.

-부웅!!

“스트라잌!!”

툭 떨어지는 커브가 그의 방망이를 피해갔다.

볼카운트 0-1

잠시 고개를 갸웃한 랄로 가야르도가 두 번째 공을 기다렸다.

-딱!!

라인을 크게 벗어나는 파울.

볼카운트 0-2.

그리고 세 번째.

이전 이닝보다 날카로움이 훨씬 부족한 그 커브에 고개를 갸웃했던 랄로 가야르도가 마침내 그 여러모로 어설퍼진 커브에 맞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깊숙하게 퍼 올리는 완벽한 타구.

과거 플라이볼 혁명 당시, 많은 사람은 20도에서 35도 사이의 타구각을 강조했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20도에서 35도 사이의 각도로 날린 공을 저 담장 너머까지 날려버릴 힘을 지닌 타자라면 타구각이 낮아졌을 경우 담장을 두들겨버릴 확률이 높아진다. 그렇기에 그것은 옳다.

랄로 가야르도는 거기에 부합하는 타자였다.

마운드의 아서 클라크가 고개를 떨궜다.

29.8도.

약 93.7마일.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홈런이 트루이스트 파크 3층 좌측 외야 관중석을 직격 했다.

두들기는 즉시 홈런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대형 홈런.

성민이 랄로 가야르도를 향해 엄지를 치켜주고 가벼운 마음으로 3루를 돌아 홈 베이스를 밟았다.

그리고 서둘러 시원한 덕아웃 구석의 자기 자리로 돌아가 에너지 드링크를 세 모금 삼키고 오른쪽 어깨에 투수용 점퍼를 걸쳤다.

5월 말의 태양으로 따끈해진 머리가 서서히 식어갔다.

6회 초 3:0

큰 점수다.

하지만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게다가 성민의 경우 오늘 개인적인 욕심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이달의 투수.

사람들에게 가지고 싶다고 떠든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찌 탐이 나지 않겠는가.

기록과 상은 좋은 경기를 펼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하지만 바꿔 말하자면 기록과 상이란 좋은 경기를 펼쳤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기도 하다.

5월.

현재까지 평균자책점은 1.59다.

이번 경기 7회까지만 무실점으로 막아낸다면 평균자책점은 1.50이다. 거기에 노 히터까지 있으니 가능성은 충분하다.

‘게다가 만약 그 안타만 에러로 바뀐다면.’

볼티모어전에서 있었던 매튜 쿠퍼의 수비. 그것만 안타가 아닌 에러로 바뀐다면 평균자책점은 극적으로 감소하여 1.00까지 떨어질 수 있다.

5월의 마지막 등판.

성민이 최후까지 최선을 다했다.

***

많은 한국 사람들이 미국인들은 난잡하고 문란한 성생활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 뭐, 영화나 드라마는 극적 과장이 있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한국보다는 훨씬 개방됐으리라 믿는다.

10대로 한정 짓는다면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다. 실제로 한국과 미국의 10대 성 경험은 제법 큰 차이가 난다. 물론 그 차이의 근본적인 원인은 ‘여가 시간’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제법 되는 점은 조금 슬픈 이야기지만.

어쨌거나 20대 이상으로 넘어가면 미국과 한국의 성 개방도는 사실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몇몇 주의 경우에는 더 엄격하기까지 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자유로운 성생활은 미국보다는 오히려 유럽 쪽, 특정하자면 프랑스에 더 가깝다. 괜히 미국인들이 유럽 애들을 문란하다고 욕하는 것이 아니다.

“조이, 오늘 캐머린 집에서 풀 파티 한다는데 어때? 이번에 캐머린 새로 사귄 남자친구 있잖아.”

“잭 아담스의 새로운 속옷 모델이라는 그 남자?”

“그래, 그 치골 죽여주는 걔. 걔가 이번에 자기 친구들로 쫙 부른다고 하더라. 내가 슬쩍 SNS로 둘러봤는데 몸매가 아주 다들 죽여줘.”

물론 LA 같은 대도시.

특히 헐리웃 같은 곳은 성적인 개방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굉장히 높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미국인에 가장 가까운 동네다.

하지만 거기도 역시 다양한 지역에서 올라 온 사람들이 있다. 조이 제임슨의 경우 미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도시 탑 10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애리조나주 길버트 출신이었다. LA에 와서 조금 개방적으로 변하기는 했지만, 성장 과정에서 접했던 수많은 것들은 여전히 그녀의 정신에 깊게 남아있었다.

“미안, 나 요즘 그런 장소는 좀 그래서.”

“아, 맞다. 너 요즘 그 야구 선수랑 만나고 있었지? 게다가 그냥 가자고 하기에는 그거 지금 방송이랑 겹쳐서 무슨 조항 같은 거도 있는 거 맞지?”

TV 쇼의 경우 일정 부분에 대하여 사생활에 제약을 거는 경우가 종종 존재한다. 물론, 인기 스타가 되면 그런 것 정도는 가뿐하게 무시할 수 있지만, 조이 제임슨의 경우는 재작년 라이프 오브 헐리웃으로 이제 막 뜨기 시작한 배우다.

심지어 지난가을 비수기 때 찍었던 영화가 쫄딱 망하기까지 했다. 드라마 스타가 영화로 진출해서 실패하는 건 늘 있는 일이기에 특별하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당분간 라이프 오브 헐리웃에 더 찰떡같이 붙어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그거고, 사실 나 양다리는 별로 안 좋아해서.”

“양다리? 조이 제임슨. 너 설마? 진지한 관계야?”

조이 제임슨이 대답 대신 그냥 웃음으로 답했다.

이게 진짜 진지한 관계일까? 아니면 계약에 대한 프로페셔널한 태도일까? 사실 뭐가 됐건 그녀가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이곳은 LA였고, 조이 제임슨이 아니더라도 캐머린의 풀 파티에 참여할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은 널렸으니까.

< 타이밍(4) > 끝

ⓒ 묘엽

작가의 말

헉, 2분 늦었네요.

지각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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