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96화 (197/287)

< 타이밍(3) >

앞서와 다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몸에 가장 잘 맞는 스윙폼 그대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응?

손끝에 느껴지는 묵직한 감각. 의문을 표할 시간 따윈 없었다. 마지막까지 힘차게 방망이를 돌려 저 먼 곳을 향해 공을 날려보낸다.

-딱!!

시원하게 돌아간 방망이가 야구공을 두들겼다.

마운드에 선 아서 클라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성민의 타격 때문일까?

아니었다.

실투다.

중지 손가락 끝의 열점이 오돌오돌한 물집으로 발전했다.

아서 클라크의 시선이 날아가는 공을 향했다. 유격수의 키를 넘기는 제법 큰 타구. 좌익수가 빠르게 달려왔지만 늦었다.

1루에 여유롭게 세이프.

굳이 2루까지 달리지는 않았다. 성민은 투수다. 굳이 여기서 위험한 슬라이딩까지 도전해가며 2루를 탐할 필요는 없었다.

배팅장갑과 다리 보호대를 벗어 1루 코치에게 맡기고 주루용 벙어리 장갑을 꼈다. 어지간하면 위험할 일이 없겠지만, 어쨌거나 안전이 최우선이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코치가 마운드로 올라왔다.

[애틀랜타의 덕아웃이 움직입니다. 무슨 일이죠?]

[부상인가요? 공을 던진 직후 아서 클라크 선수의 표정이 조금 안 좋아 보이기는 했는데요.]

“괜찮습니다.”

“괜찮기는. 손 이리 줘봐.”

“정말 괜찮다니까요.”

메이저 리그에서 코치를 하다 보면 지금 아서 클라크처럼 마치 오늘밖에 없는 것처럼 구는 녀석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게 바로 이 직업의 엿같은 점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멍청아, 오늘만 날이 아니야. 너에게는 내일도 모레도 있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런 말이 통하는 것은 진짜 재능이 넘치는 한 줌의 녀석들 뿐이다. 많은 숫자의 녀석들에게는 정말 ‘오늘’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역할은 이런 녀석들을 동정하는 일이 아니다. 구단에서 그에게 돈을 주는 이유는 이런 일을 ‘관리’하기 때문이다.

“손.”

아서 클라크가 마침내 손을 내밀었다. 아직 크지 않다.

“던질 수 있겠어?”

“네!!”

“그래, 이번 이닝 끝나고 물 빼고 본드 바르고 액상 반창고 붙이자. 아웃 카운트 세 개만 더 잡자고. 너 오늘 컨디션 죽여주잖아.”

잠깐의 망설임.

만약 아서 클라크가 비싼 선수였다면 지금 당장 녀석을 내리고 최대한 빠르게 회복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녀석은 그 정도로 꼭 필요한 전력은 아니다. 굳이 분류하자면 미니멈급에 불과하다.

오늘같이 환상적인 피칭을 이어가는 날은 드물다. 나중에 며칠을 더 쉬게 두거나, 혹은 DL에 올려서 10일 정도 휴식을 주더라도 오늘은 조금 더 던지게 하는 것이 이득이다.

무엇보다 이 녀석의 일생에 오늘같은 환상적인 날이 언제 또 올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으니까.

보스턴의 1번 타자 제롬 스튜버츠가 타석에 들어왔다.

3번째 타순의 시작이었다.

***

“루시라······. 자네 너무 욕심을 내는 거 아닌가?”

“욕심이라니. 말이 심하군. 메이저에 적응도 못 하고 내려간 AA급 유격수와 사이영 상을 수상한 선발 투수. 과연 누가 욕심을 부리는 걸까?”

존 맥도웰이 피식 웃었다.

“루시 알베리가 최근 이스턴리그에서 어떤 성적을 거두고 있는지는 나도 자네도 잘 알잖아.”

“그래 봐야 AA리그라는 것도 잘 알고 있지. 거기에서 좀 괜찮은 성적을 낸다고 빅리그에서 제대로 된 성적을 내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점 정도는 상식 아닌가? 게다가······.”

“게다가?”

“보스턴은 지금 내야를 조금 교통정리 할 필요가 있을 텐데? 아닌가?”

아주 잠깐의 침묵. 곧바로 이야기는 이어졌지만 그 0.1초의 짧은 침묵은 충분한 대답이 됐다. 탬파베이의 직원 하나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이건 확실히 제대로 먹혔다.

“바그너 가이탄이 이제 3년 차야. 20홈런이 가능한 유격수를 버릴 생각이야? 게다가 작년에 1라운드로 뽑았던 로버트 보일은 또 어떻고.”

“미래는 모르는 일이지. 게다가 루시가 꼭 유격수만 가능한 것도 아니고. 원래 수비에 재능이 있는 녀석이잖아?”

“그렇지. 매튜 쿠퍼, 랄로 가야르도, 제롬 스튜버츠. 와우. 내가 보기엔 내야에는 누구 하나 버릴 자원이 없어 보이는데?”

확실히 보스턴의 내야는 짱짱했다. 현재 실력으로만 보면 조금 부족한 면들이 있었지만 하나 같이 20대 초중반의 젊은 나이다. 게다가 포텐셜만 따지면 장차 올스타, 어쩌면 MVP를 노려볼만한 재능을 지닌 자원들이다.

루시 알베리가 순조롭게 성장한다고 가정했을 때, 보스턴의 내야는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 뭐 우리 내야가 조금 두껍다고 치자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제 3선발급도 될까 말까 한 투수를 반년 렌탈하는 대가로 루시 알베리라니. 이건 농담이 조금 심한 것 같은데?”

“지금 자네 라만 그레고리가 3선발급이라고 생각한다고?”

“그렇지.”

“그럴리가. 만약 정말 그렇게 생각을 했다면 자네가 지금 나에게 전화를 걸 이유가 없었을 텐데? 무엇보다 라만 그레고리가 3선발급이라면 보스턴에는 대체 2선발과 3선발이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 팀의 2선발인 부룬디보다는 우리 라만 그레고리쪽이 훨씬 좋은 투수인데 말이야.”

이번에도 탬파베이의 직원들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단장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이거 아무래도 입장을 좁히기가 상당히 힘들어보이는군.”

“그야 입장을 좁히려면 조금 더 개방적인 자세로 나와야하지 않겠나.”

존 맥도웰이 잠시 침묵했다.

1초, 2초.

그리고 3초.

“이건 어떤가.”

“무슨 제안인지 일단 들어나 보지.”

“브라이언 보일.”

“브라이언 보일? 하하, 이 친구 농담이 아주 수준급이로군. 루시 알베리와 브라이언 보일? 메이저 상위 선발과 AA리그의 유격수라니.”

“그 선발 투수는 3년 차이고 우리는 아직 서비스 타임을 1달도 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해야지. 게다가 상위 선발이라니. 대체 언제부터 브라이언 보일이 상위 선발이었지.”

“후, 굳이 입씨름할 필요 없는 이야기로군. 이런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를 할 생각이라면 이만 끊도록 하지. 분명히 말하겠네만 라만 그레고리를 원한다면 루시 알베리는 내줘야 할걸세.”

“잠깐만. 아직 이야기가 다 끝난 것도 아닌데 너무 급하군.”

“루시 알베리와 브라이언 보일 같은 이야기는 굳이 더 길게 이어갈 필요도 없는 이야기지.”

존 맥도웰이 웃었다.

“누가 루시라고 그랬나?”

“그러면?”

“바그너 가이탄. 자네가 말한 20홈런도 가능할 올해 3년 차의 젊은 유격수지.”

잠시 시끄러운 소음이 존 맥도웰의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탬파베이 프런트들의 반응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정적.

이건 볼 것도 없이 음소거 버튼을 누른 거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바그너 가이탄이다. 그는 2년 차인 작년에 올스타급에 근접한 활약을 보여줬던 터무니없는 유망주로 마이너 시절 랄로 가야르도, 매튜 쿠퍼와 함께 보스턴의 삼종신기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물론 보스턴의 유망주들이 다들 그렇듯 수비에서는 약간의 불안함을 보여줬지만, 타격으로 그것을 충분히 메울만큼 활약했다. 작년 성적이 137경기 유격수 출장. 0.281/0.364/0.498에 홈런만 19개를 기록했다.

그리고 브라이언 보일이 지난 경기에서 괜찮은 모습을 보여준 것은 확실하지만, 존 맥도웰의 말처럼 아직 상위 선발이라고 할 만한 실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이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합니다.”

“맞습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바그너 가이탄 쪽이 훨씬 좋은 선수입니다. 그리고 보스턴 레드삭스가 내야를 조금 정리해야 하는 것처럼 저희도 선발쪽 자원에는 여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투수는 무조건 많은 쪽이 좋은 법인데······.”

“투수야 많으면 좋죠.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시장에 브라이언 보일을 팔아도 바그너 가이탄 급의 유격수를 데리고 올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바그너 가이탄은 유격수 수비에서 조금 문제가!!”

“그거야 몸을 더 키워서 삼루수로 컨버전해도 되는 문제죠. 바그너 가이탄의 어깨라면 당장 올스타급 삼루수도 가능합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제안.

탬파베이의 프런트 직원들이 시끄럽게 떠들었다.

“하지만 바그너 가이탄의 경우 아직 햄스트링 부상이!!”

“다음 달이면 복귀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오히려 그편이 더 좋죠. 마이너에서 리햅경기를 갖게 하고 천천히 시기를 조절해서 올린다면 슈퍼 2 대상자에 포함이 되지 않으면서 1년을 더 뽑아먹을 수 있습니다.”

금전적인 부분이나 컨트롤 할 수 있는 기간에서도 나쁘지 않았다.

탬파베이 레이스의 단장 조지가 잠시 음소거로 돌려놨던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좋네. 바그너 가이탄과 브라이언 보일. 받아들이지.”

“워워, 자네 아까부터 이야기했지만, 너무 급하군.”

“뭐라고?”

“말했잖나. 이야기를 시작해보자고 말이야.”

벌써 시즌을 포기한 팀.

그리고 아직 시즌을 포기하지 않은 팀.

필요할 자원과 꼭 필요한 자원의 거래가 시작됐다.

***

-솔직히 성민이 이 정도면 KBO에 타자로 돌아와도 충분할 듯.-

-메이저 통산 OPS가 0.7이 넘는 타자임. KBO에 용병으로 오는 어지간한 놈들보다 낫다.-

-에이, 그건 아니다. 솔직히 KBO에 용병으로 오는 타자들 보통 타격만 보고 데리고 오는 경우 많잖아. 걔들도 빅리그 가면 OPS 0.750 이상은 할걸?-

-KBO에 대한 환상이 너무 넘치시네요. 마르타 노엘 최근 MLB 성적 좀 보시죠.-

-맞아. 난 성민이가 당장 마린스 와서 일루수는 해도 지금보다 훨씬 낫다고 본다.-

-일루수만? 내가 보기엔 지금 마린스 시부럴 타자놈들 중에서 성민이보다 괜찮은 타자는 동엽이랑 현정현 정도밖에 없다고 본다. 특히 김호섭 그 퇴물은 어휴.-

-빠따로만 따지면 맞는 말임. 난 수비까지 따져서 이야기 한 거야. 투수만 했었는데 일루 말고 다른 곳 수비가 어디 가능하겠냐?-

-글쎄다. 난 성민이 재능이면 호섭이 대신에 우익수 자리 박아놔도 그보다 수비 잘 할 것 같음.-

-성민님 그저 그립읍니다.-

보스턴의 경기를 보던 마린스 팬들이 성민의 타격에 감탄했다.

물론 성민의 타격에 자극을 받은 것은 그들만은 아니었다.

‘이거 곤란하네.’

1번 타자로 출장해서 2타수 무안타 2삼진.

그런 상황에서 투수가 안타로 출루에 성공했다? 그것도 엄청 잘 던지고 있는 선발 투수가? 제롬 스튜버츠가 턱을 긁적였다.

밥값은 해야지?

이게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1루에 서 있는 성민이 보내는 눈빛에서 왠지 그런 목소리가 읽혔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팬들이 살짝 쫄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 한 채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도 그럴 것이 제롬 스튜버츠다.

땅볼의 왕.

주자가 없을 때는 내야 안타가 될 때도 많지만, 주자가 있을 때의 제롬 스튜버츠는 노아웃 주자 1루를 주자가 바뀐 원아웃 주자 1루로 변신시키는 재능이 있다.

‘뭐, 그래도 성민이면 발은 제법 빠르니까.’

마운드의 아서 클라크가 첫 번째 공을 준비했다.

물집이 영 거슬렸지만 어쩔 수 없다. 그의 유일한 무기인 커브가 날아올랐다.

팀 전체를 통틀어 중간 이상은 가는 주력을 지녔지만, 주루 플레이는 익숙하지 않았다. 두 걸음 그리고 반.

성민의 시선이 제롬 스튜버츠의 방망이에 박혔다.

-딱!!

놀라운 동체 시력이 타구의 높이를 캐치 했다.

일단 절대 뜬 공은 아니다.

그렇다면 성민이 해야할 것은 한 가지.

그의 몸이 2루를 향해 빠르게 튀어 나갔다.

< 타이밍(3) > 끝

ⓒ 묘엽

작가의 말

이번 주 토요일은 개인 사정으로 연재를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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