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이밍(1) >
사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선수들이 성민을 쉬운 상대인 것처럼 이야기했던 것은 성민이 진정으로 쉬운 상대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직전 해 사이 영 2위. 퍼펙트게임을 기록한 투수다. 성민이 대단한 투수라는 것은 어떻게 봐도 뻔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기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로서는 바로 직전 경기 성민이 2피홈런 4실점을 허용한 것을 강조하며 의욕을 불태울 수밖에 없었다.
즉 그들의 그런 태도는 겁먹은 강아지가 더 크게 짖는 그런 종류의 용기였다. 그리고 그런 용기들의 결말은 항상 뻔하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헛스윙 삼진!! 타자의 타이밍을 완벽하게 빼앗는 느린 너클볼이었어요.]
[그 느린 너클볼로 1회 말, 김성민 선수가 두 번째 삼진을 잡아내며 이닝을 마무리를 짓습니다.]
[참 대단한 선수입니다. 바로 직전 등판에서 속구 구속이 떨어져 혹시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는데요. 오늘 이렇게 그런 걱정이 괜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네요.]
[물론 아직도 최고 구속이 89.4마일에 불과하긴 합니다만 그거야 아직 1회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문제가 될 건 없습니다. 이전 경기 같은 경우는 1회에는 구속이 88마일 남짓하게밖에 나오지 않았거든요.]
[사실 그것보다는 빠른 너클볼의 구속이 안정적으로 74마일대가 나오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결국, 김성민 선수 피칭의 근본이 되는 건 저 빠른 너클볼이거든요.]
“확실히 까다로운 공이긴 하군. 하지만 괜찮아. 너클볼이라는 것이 워낙 생소해서 그렇지 몇 번 더 상대해보면 충분히 공략할 수 있을 거야.”
“맞아, 게다가 오늘 아서도 아주 죽여주잖아.”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선수들이 애써 위축되는 자신들을 다독였다.
-오늘 초반부터 너무 힘주는 거 아니냐?
‘그냥 평소대로 하는 겁니다. 평소대로.’
아니었다.
사실 필 니크로의 이야기는 성민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까지 필 니크로가 보여줬던 모습은 성민이 어린 시절 생각해온 ‘아버지’의 모습 그 자체였다.
때로는 인자하게 때로는 엄격하게 때로는 어른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언제까지 그가 나와 함께할지 모른다.
우습게도 필 니크로를 만난 이후 성민은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며칠 전 필 니크로와의 대화에서 성민은 처음으로 그것을 의식하게 됐다.
필 니크로가 바라는 것은 성민이 월드클래스 급의 너클볼 투수가 되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다.
야구는 이미 그 역사가 160년이 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런 역사 속에서 너무 많은 기록이 나왔다.
무엇보다 야구는 누적의 스포츠다. 데뷔 직후 풀타임 1, 2년 차에 두 개의 사이 영을 타내고 4년 연속으로 올스타에 선정됐으며 5년 동안 3개의 우승 반지를 손에 쥔 투수라든지, 전성기 5년 동안 사이 영 두 개에 트리플크라운까지 타낸 투수가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첫턴 광탈 하는 것이 이 바닥이다.
따라서 필 니크로가 말하는 수준의 투수가 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최소 10년. 아니 너클볼이라는 구종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15년도 바라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성민은 무의식적으로 필 니크로가 최소 10년, 아니 15년은 자신과 함께 할 것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꼭 그러라는 법이 있을까?
마운드의 아서 클라인이 피칭을 이어갔다.
확실히 오늘 그의 컨디션은 그야말로 최고조였다.
커브는 모든 변화구 중에서 가장 특별하다.
투수가 던지는 모든 공은 백스핀이다. 타자 입장에서 봤을 때 회전이 뒤로 간다는 의미다. 하지만 단 하나 커브는 예외다. 탑스핀이다. 물론 포크볼 역시 기본적으로는 탑스핀이지만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탑스핀의 포크볼이 멸종된 지는 제법 됐다. 백스핀이 걸리는 스플리터 쪽이 여러 가지 면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커브의 가장 큰 약점이 생겨난다.
이질적인 움직임.
속구와 완벽하게 반대되는 회전을 보이는 만큼 투수의 손을 떠나는 그 순간, 발사각 자체가 다르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헛스윙 삼진!! 아서 클라인!! 오늘 아주 물이 올랐습니다. 2회 초. 벌써 경기 세 번째 삼진입니다.]
[오늘 커브가 아주 좋습니다. 보스턴의 타자들이 거의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어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지금 커브의 발사각이 속구와 고작 0.3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래서야 타자로서는 속구와 커브를 구분할 길이 막막해지죠.]
[보시면 정말 먼 곳까지 공을 끌고 나오고 있어요. 이럴 경우 공에 회전을 걸기가 까다로워지는 만큼 낙폭에서는 조금 손해를 봅니다만, 속구와는 정말 구분하기 힘들어지죠.]
[그렇다고 공의 회전수가 적는가 하면 또 그것도 아니에요. 보시면 분당 회전수가 2430에 육박합니다. 이건 평균 이상의 회전량이에요. 검지와 중지에 굉장한 악력으로 공을 튕겨낸다고 봐야죠.]
오늘 아서 클라인은 속구보다 커브를 더 많이 던지는 볼 배합을 가져왔는데 상당히 유효한 전략이었다. 보스턴의 타자들이 그의 커브를 좀처럼 공략하지 못했다.
‘뭐, 확실히 변화구에 왕이 있다면 그건 커브죠.’
-듣는 슬라이더가 섭섭할 소리를 하는군.
‘그래도 사실은 사실이죠. 투수들에게 만약 단 하나의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변화구를 고르라면 최소 절반 이상이 커브를 선택할걸요.’
-뭐, 제대로 구사하는 투수가 가장 적은 변화구 정도라면 인정할 수 있겠구나.
‘가장 숙련되기 힘든 변화구라고 해두죠.’
2회 말.
마운드의 성민이 애틀랜타의 타자를 맞이했다.
앞선 1회 초, 놀라운 수비로 랄로 가야르도의 안타를 훔쳤던 우익수 콜 그린이 타석에 들어왔다.
초구.
망설임은 없었다.
손가락 끝에 만져지는 실밥의 단단한 감촉. 성민의 손가락이 야구공을 밀어냈다.
74.2마일의 빠른 너클볼.
흔들리는 야구공이 콜 그린의 눈을 현혹했다.
-부웅!!“스트라잌!!”
커다란 헛스윙. 존을 완벽하게 벗어나는 공이었다.
에두아르도 크루즈가 건넨 공을 성민이 가볍게 받았다.
그래, 커브는 분명 변화구의 왕이라 할만하다. 특히나 저 정도로 완성된 커브는 더더욱 그렇다. 아마, 단일 구종으로 메이저에 ‘버틸 수’ 있는 공을 꼽으라면 커브 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가 성립 가능한 것은 성민도, 그리고 필 니크로도 애초에 그 ‘변화구’라는 틀에서 너클볼을 빼놓았기 때문이다.
변화구란 무엇인가?
속구를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변화구인가? 그렇다면 무빙패스트볼은? 투심은? 커터는? 머리 아픈 이야기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그 모든 공이 지향하는 점은 결국 더 많은 회전으로 공의 실밥이 공 주변에 기압 차를 만들어 냄으로써 공의 궤적을 조절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너클볼은 정확히 그 반대 지점에 있다.
-부웅!!
“스트라잌!!”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지난 4년 동안 단 한 번도 보스턴에게 패배하지 않았다. 야구라는 게임은 같은 리그 수준에서 이뤄진다면 아무리 실력 차이가 나는 팀이라도 10번 중 3번은 이기기 마련이다.
심지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보스턴의 차이는 그 정도도 아니었다. 지난 4년 동안 애틀랜타는 단 한 번도 6할 이상의 승률을 기록한 적이 없었고, 보스턴 역시 작년을 제외하고는 4할 이하의 승률을 기록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것은 오늘 아서 클라인이 최고의 날일 맞이한 것과 같은 일종의 징크스였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런 징크스 앞에 위축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성민은 달랐다.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올 확률은 5할이다. 그런데 8번 내내 뒷면이 나왔다.
‘그렇다면 이제 슬슬 앞면이 나올 때도 된 셈이죠.’
-성민아, 그 원래 확률이라는 건 독립적인 거라서······.
‘저도 그 정도는 알거든요? 그냥 느낌입니다. 느낌.’
-흐음······.
필 니크로의 의심 가득한 눈빛 앞에서 성민이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저 고등학교 나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죠. 진짜 중요한 건 지금 상황이 굉장히 좋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 뭐,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너라면 당연히 그런 식으로 생각할 줄 알았으니까.
성공이 빛나는 것은 앞선 실패가 있기 때문이고 영웅이 빛나는 것은 극복하지 못할 것 같은 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성민은 그 누구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던 실로 영웅 같은 업적을 이미 이룩한 남자다. 그에게 이런 징크스 따위는 너무 하찮다.
‘이제 징크스를 가지고 올 거면 최소한 100년짜리는 가지고 와야죠.’
그렇기에 성민이 바라보는 것은 4년간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팀을 상대로 한 위대한 승리.
힘이 들어간 속구가 콜 그린의 방망이를 끌어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90.1마일.
바깥쪽 높은 코스. 완벽하게 빠지는 속구였다.
***
“그래, 시장 반응은 좀 어땠어?”
“으음, 아무래도 아직은 좀 애매합니다. 몇몇 팀에서 반응이 오기는 했지만······.”
“했지만?”
“반년 렌탈로 괜찮은 유망주를 가지고 오기에는······. 이번 시즌에 그렇게 목숨 걸고 내달리는 팀이 적어서요. 아무래도 성적의 양극화가 확연한 해인지라. 게다가······.”
아직 조금 이른 시기였지만 탬파베이 레이스는 이번 시즌을 반쯤 포기했다. 50경기 남짓한 상황에서 승률이 3할을 조금 넘는다. 이래서야 답은 없다. 그렇다면 어차피 내년 시즌 이후로 잡지도 못할 비싼 에이스를 데리고 있느니 유망주를 받고 파는 편이 무조건 이득이다.
하지만 문제는 메이저리그의 나머지 29개 팀 역시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쨌거나, 디백스와 밀워키, 메츠, 화이트 삭스. 그리고 레인저스 정도가 관심을 보이기는 했습니다만 내미는 카드들이 영 좋지 않습니다.”
“어떤데?”
“그나마 메츠가 내민 애런 콕스 정도가 가장 수준 높은 선수입니다.”
“애런 콕스?”
“작년 중순에 더블A 올라갔고 올해 초 기준으로 BA 일루수 부문 4위입니다. 뭐 거기에 몇몇 선수들을 더 붙여주겠다고는 하지만 사실상 구색 맞추기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미쳤군. 고작 그런 선수를 주고 라만 그레고리를 데리고 가겠다고?”
“아무래도 라만의 올해 연봉이 2천만 달러나 되는 점도 그렇고······. 그래도 경쟁이 조금만 더 격렬해진다면!!”
“포기하는 팀이 더 나올 수도 있겠지.”
무조건 팔아야 하는 사람에게 비싼 값을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그들끼리 경쟁이 붙는다면 또 모르겠지만 라만 그레고리는 2년 전이 전성기였지 작년 이후, 특히 올해 그 당시만 한 기량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당시에는 리그 에이스급 투수였지만, 현재 기량만 따진다면 2선발에서 3선발급 정도. 아직 나이는 많지 않지만, 애초에 반년 렌탈 자체가 당장 뽑아먹겠다고 달려드는 계약이다. 심지어 이렇게 데리고 오면 퀄리파잉 오퍼도 날릴 수 없다.
대단한 선수를 내밀고 그를 데리고 올 이유는 적었다.
-띠!!
단장실의 유선 전화가 비프음을 토해냈다.
“무슨 일이야.”
“보스턴 레드삭스. 존 맥도웰 단장님 연락입니다.”
“존이? 잠시만 기다리라고 해!!”
현재 보스턴의 성적은 21승 26패.
승리보다 패배가 더 많은 팀의 연락이라니. 생각지도 못했던 연락이었다.
탬파베이의 프런트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타이밍(1)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