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클볼-193화 (194/287)

< 고향의 맛(4) >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처음 트루이스트 파크로 구장을 옮기겠다는 발표를 했을 때, 많은 사람은 그들을 향해 미쳤다고 이야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원래 사용하던 터너필드 역시 지어진 지 20년밖에 되지 않은 신 구장이었고 위치나 시설 역시 크게 나무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안 그래도 중계권료도 조금 받아서 허덕이는 애틀랜타가 신 구장이라니.

하지만 2034년 현재, 그들의 선택은 매우 훌륭한 선택이었다고 평가받고 있었다. 주변 지역의 슬럼화가 진행 중이던 터너필드와 달리 애초에 교외에 지어진 트루이스트 파크는 주차를 비롯한 접근성에서 낙후된 구도심에 있던 터너필드보다 훨씬 우월했다.

-무엇보다 터너 그 개자식 이름이 붙은 구장을 더 사용하지 않는 점이 제일 좋은 점이었지. 애초에 그 구장은 행크의 이름이 붙어야 했어.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좋은 이름도 많았지.

‘니크로 스타디움이라든지 뭐 그런 거요?’

-흥, 뭐 그것도 나쁘진 않지. 어쨌거나 터너 그 개자식 이름이 붙은 구장은 정말 아니었어.

필 니크로가 테드 터너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사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사랑하는 사람이 테드 터너 전(前) 구단주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2007년의 그 형편없는 중계권 계약, 아니 횡령의 중심축 중 하나였으니까.

-뭐, 그 개자식이 당시 회사에서 발언력이 약했니 뭐니 하는 말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건 면죄부는 될 수 없지.

‘워워, 어차피 이제 다 끝난 일인데 흥분은 그만하시고. 그보다 저기 저거. 영감님 언제 시절입니까?’

성민의 시선 끝에 트루이스트 파크 3루 입구 앞에 놓인 필 니크로의 동상이 보였다. 좌측 외야 입구의 워렌 스판 동상처럼 역동적인 모습은 아니었지만, 필 니크로의 피칭 폼과 그립, 심지어 야구공의 실밥까지 그대로 잘 살린 훌륭한 동상이었다.

-은퇴하기 직전의 모습을 담았다고 하더구나. 뭐 여러 가지로 미흡한 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성의가 있으니······.

마지못해 받아줬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말과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넘쳤다. 사실 그럴 만했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는 미국의 모든 프로 스포츠팀 가운데 가장 오래된 팀이다. 조금 복잡한 셈법을 치러야 하긴 하지만 2034년인 현재 그 역사만 무려 163년에 이른다.

필 니크로는 그런 구단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두 명의 투수 중 하나로 꼽힌 것이다. 물론 몇 년만 있으면 거기에 최소 그렉 매덕스, 어쩌면 존 스몰츠와 톰 글래빈도 함께 꼽힐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잘 관리된 동상을 바라보는 성민의 눈에도 약간의 부러움이 묻어났다.

마린스에도 전설적인 투수는 존재한다. 또한, 그 투수를 위한 동상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그 동상의 근처는 빈말로도 잘 관리 됐다고 말하기 힘들다.

시민 의식의 차이? 그럴 리가. 성민이 보기에 이건 그냥 위치의 차이다. 입구의 정면 대로변과 경기장 뒤편 아이들을 위한 구장 옆은 다르다. 심지어 으슥한 것이 숨어서 담배를 피우고 쓰레기 무단투기하기 딱 좋은 위치다.

굳이 깨진 유리창 이론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람은 본래 남들 눈이 없는 곳에서는 얼마든지 추해질 수 있고, 추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추한 짓이 아니라는 것처럼 뻔뻔해질 수 있는 존재다.

‘나도 나중에 마린스에서 동상 세워준다고 하면 정문에 세워달라고 해야겠어요.’

-너 마린스에서 꼴랑 10년 뛰었고 결정적인 활약도 마지막 1년이 전부 아니었나? 그런데 동상이라니? 아무리 너라도 그건 조금 도둑놈 심보 아니냐?

‘에이, 도둑놈 심보라뇨. 정규시즌 무패에 포스트시즌 무패. 퍼펙트만 두 번에 총 233이닝. 거기다가 한국 시리즈 활약까지. 솔직히 재작년에 마린스 전력으로 통합우승이 가당키나 했습니까? 창단 50년 만에 첫 정규시즌 우승. 40년 만에 한국 시리즈 우승입니다. 아마 저 그대로 은퇴했어도 영구결번에 동상 세워줘야 했을걸요? 근데 어라? 심지어 메이저에서도 잘나가네? 거기서 끝이 아니죠. 전 세계구급 스타가 될 거고, 그래놓고는 마지막에 마린스에서 1년 마무리해주고 감독 직행까지 할 겁니다. 이 정도면 솔직히 동상으로 끝낼 게 아니라 사직 구장 이름을 성민 구장으로 바꿔야 하는 수준이에요.’

뭔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다.

-그래, 하지만 그 모든 전제는 어디까지나 네가 메이저에서 잘나가고, 세계 구급 스타가 돼서 마지막 마린스에서의 1년까지도 완벽하게 마무리했을 때 이야기겠지.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 테고 말이다.

‘압니다. 잘 알죠. 그러니까 우선은 코앞에 닥친, 영감님 고향 팀부터 묵사발을 내줘야 한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끄응. 결국, 이야기가 그렇게 돼버리는군.

[SNS는 인생의 낭비다.]

어느 유명한 감독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구단에서는 선수 개개인의 SNS 사용에 대하여 여러 가지 교육을 실행했다. 물론 반강제적으로 SNS 사용을 막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성민, 너 이거 엄청나게 잘 나왔는데 내 SNS에 올려도 괜찮아?”

“뭔데?”

보스턴의 선수단은 대체로 젊었다.

SNS의 반대편 날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교육으로는 들었지만, 직접 경험해본 선수는 드물었다. 그리고 구단에서 일괄적으로 진행하는 교육은 선수들에게 그리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법이다.

제롬 스튜버츠가 성민에게 스마트폰을 건넸다. 거기에는 성민이 필 니크로의 동상을 아련하게 바라보는 사진이 떠 있었다.

“흠, 이건 괜찮아 보이는데?”

“그래? 그러면 나 올린다? 올리면 와서 좋아요도 눌러줘. 성민 너 팔로워가 무슨 백만 단위라며.”“어, 팔백만인가?”

“미친. 팔백만? 천만이 코 앞인 거잖아?”

“뭐 그렇긴 하지. 근데 난 애초에 한국에서 프로 생활을 10년이나 했잖냐. 게다가 한국에서 난 케빈 체임벌린이나 리암 루카스 수준으로 유명하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아저씨들도 팔로워 천만은 안 된단 말이야. 와, 어쩌면 야구 선수 중에 팔로워 제일 많은 거 성민일지도 모르겠는데?”

제롬 스튜버츠가 자신의 SNS 계정을 바라봤다.

팔로워 10만3천.

얼마 전에 10만을 돌파했다고 그렇게 좋아했는데, 팔백만이라니. 이 정도로 아득하게 차이가 나면 경쟁심도 안 생긴다.

“어쨌거나 좋아요 하나만 눌러줘. 알았지?”

“알겠어. 근데 내 계정은 내가 관리하는 건 아니라서. 관리자한테 일단 이야기는 해둘게.”

“뭐야. 성민 너 SNS 관리자까지 따로 있어?”

“당연하지. SNS가 얼마나 위험한데. 이름값 좀 있는 선수들은 대부분 전문적인 관리인 하나씩은 다 두고 있어. 그게 아니면 디아고 헤밍턴처럼 가족사진만 가끔 올리는 식으로 운영하는 거고.”

“하지만 그러면 SNS 하는 재미가 없잖아!!”

“멍청한 소리 하기는. 애초에 SNS는 재미로 하는 게 아니야. 그게 얼마나 강력한 홍보 수단인데. 실력이 비슷하면 굿즈 하나라도 더 팔리는 선수를 쓰는 게 메이저리그야. 똑똑하게 행동해야지.”

제롬 스튜버츠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구단의 교육에서 주로 강조하는 것은 SNS의 위험성이었다. 성민처럼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유리한지를 이야기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어쨌거나, 토니한테 사진 올라오면 좋아요 누르라고 해뒀어. 사진이 구도가 참 좋네.”

***

뉴 미디어.

거창한 이름이지만 이건 결국 발달한 인터넷망으로 인해 정보의 소비자와 공급자가 혼재된 새로운 미디어 시장을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다.

기존의 언론이 일방적으로 가공된 정보만을 받아먹어야 하는 데 반하여, 이 뉴 미디어라는 것은 날것 그대로의 정보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 매우 매력적이었다. 물론 그 정보의 신뢰성이나 편향성은 기존의 언론 이상이었지만, 어차피 그거야 정보를 소비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상관없는. 아니, 오히려 더 좋은 일이었다. 애당초 머리를 쓰는 것은 귀찮은 일이고, 그렇기에 대부분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듣고 싶은 것만 듣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존 언론은 자리를 제법 크게 잃어버렸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들은 그런 변화 속에서 또 다른 자신의 포지션을 찾았다. 그것은 직접 취재를 나가는 대신 SNS에 범람하는 정보들을 편집하여 기사로 만드는 신박한 방식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기사를 만들 수 있지만 품은 크게 들지 않는 이 방식은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라고 할 수 있었다.

보스턴의 한 언론사.

아니, 언론사라고 하기에는 직원은 하나, 사무실은 자기 오피스텔인 그 소박한 회사의 사장이자 유일한 기자는 오늘도 부지런히 기사를 양산하고 있었다.

“호, 이게 뭐야? 김성민이랑 필 니크로 동상? 직접 좋아요도 눌렀네?”

그리고 그 기사 역시 그런 많은 기사 중 하나였다.

정보의 홍수 속에 묻혀버릴 그렇고 그런 기사.

하지만 그런 식으로 기사를 양산하는 사람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고, 800만이 넘는 팔로워를 가졌다는 것은 그런 ‘기자’ 수십을 움직일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너클볼 투수 김성민, 너클볼의 마스터 필 니크로에게 경의를 표하다.]

[필 니크로란 누구인가?]

국경과 언어를 넘어.

고작 사진 하나에 좋아요 하나를 누른 것만으로 수십 개의 기사가 양산됐다. 물론 그 사진이 제법 스토리가 있는 사진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성민이 자신이 원하는 ‘영향력’을 점점 갖춰가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와우, 역시 쪼랩 때는 쩔이 최고인가?”

덤으로 제롬 스튜버츠의 팔로워는 고작 하루 만에 두 배가 넘게 늘어났다. 앞으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성민의 사진을 올려달라는 요청과 함께.

***

1회 초.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투수인 아서 클라인이 힘차게 공을 던졌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뚝 떨어지는 낙차 큰 커브가 2번 타자인 매튜 쿠퍼의 방망이를 끌어냈다.

1번 타자인 제롬 스튜버츠는 진작에 내야 땅볼로 물러난 이후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이어지는 랄로 가야르도의 잘 맞은 타구를 우익수인 콜 그린이 끈질기게 추격해서 결국 외야 플라이로 만들었다.

삼진을 하나 포함 한 삼자범퇴.

사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보스턴 타선의 기세, 그리고 오늘 선발로 올라온 아서 클라인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5선발이라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이건 제법 고무적인 일이었다.

“좋았어!!”

마운드의 아서 클라인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올해 29살.

미니멈급 선수로 이 팀, 저 팀을 떠도는 저니맨이었지만, 어쨌거나 이 팀, 저 팀을 떠돈다는 것은 메이저에 붙어있을 만한 최소한의 실력은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왠지 컨디션도 좋았다.

지난 4년 동안 8번을 싸우면서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팀.

야구에서 징크스는 매우 중요하다. 사람의 심리란 얄팍한 구석이 있어 그런 사소한 것에 기대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는다.

오늘 아서 클라인이 그랬으며 끝까지 랄로 가야르도의 타구를 추적했던 콜 그린이 그랬다.

우리 팀은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는 운이 좋다.

그리고 마운드에 성민이 올라왔다.

행운의 너머에 있는 진짜배기 에이스가.

< 고향의 맛(4) > 끝

ⓒ 묘엽

작가의 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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